#258
1.
시우의 수련 일정은 전보다 조금 빡빡해졌다.
특별한 사유가 있다기보다는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정오쯤 2시간 정도 빡세게 수련하던 것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으로 늘였다.
당연히 죽을 만큼 힘들었다.
엄격하고 고지식한 엘로아 선생님이 일정이 촘촘해졌다해서 쉬엄쉬엄 대련할 리는 없고, 결국 아침에 멍투성이가 된 채로 또 한 번 저녁에 두들겨 맞아야 했으니 말이다.
-부우우우웅
고급스러운 엔진음이 들리는 스포츠카.
“그래서,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 휴식 시간이 주어졌는데요. 전에 말씀드렸던 타카쇼라는 친구 도움으로 타로 타운에서 생필품을 샀죠. 뭐, 생필품이라기에는 거의 마법 용품이었지만요.”
“……”
시우가 엘로아의 요청대로 이것저것 게헨나에서 있던 썰을 푸는 동안.
엘로아는 등받이에 편하게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살피던 시우가 묻는다.
“많이 피곤하세요?”
꼭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엘로아가 눈을 떴다.
“아니, 다 듣고 있네. 미안하네, 이야기해달라 말을 꺼낸 건 나였거늘…”
사실 시우의 부탁으로 강행된 이 수련은 엘로아에게도 부담이 있었다.
그녀의 고질적인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구력.
무리하게 자성마법을 수정하며 강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이룩되었던 최적화가 깨져버렸다.
엄청난 힘을 순식간에 발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소진 역시 빠르다.
쉽게 말해 연비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경주용 스포츠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더군다나 엘로아에 비하면 한없이 비실거리는 시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주먹을 휘두르는 힘’보다 시우가 크게 다치지 않게 ‘힘을 통제하기 위한 힘’이 더 많이 들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순두부가 찌그러지지 않게 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추가로 위계가 높다고 무조건 더 많은 양의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낙인의 형태나 마법의 계통에 따라 마녀마다 가용할 수 있는 마력, 저장할 수 있는 마력이 전부 다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거듭 증폭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우는 진작에 25위계 쯤 되었겠지.
엘로아는 마력 저장량이 그렇게 훌륭한 편에 속하지 못했다.
따라서 두 번째 수련이 끝나면 이렇듯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잦았다.
“제가 너무 무리하게 부탁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효과는 아주 좋지 않은가? 그대도 느끼고 있을 터.”
“스승님의 가르침이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죠.”
“또또 짓궂게 말하는구나.”
시우가 익살을 떨듯 말하자 엘로아도 피식 웃었다.
“그래도 썩 나쁜 기억만 가지고 있던 것 아닌 듯하구나.”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못하겠는데요. 그래도 가끔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 친구도 보고 싶고요.”
“메리골드 남작의 전속으로 있었더랬지? 잘 대해 주었는가?”
시우는 머뭇거리다 답했다.
“…네, 그래도 전속으로 된 시점에서는 이것저것 편의를 많이 봐주셨죠.”
아주 약간의 딜레이였지만 엘로아는 금세 시우의 분위기가 애매하게 변했음을 눈치챘다.
이전부터 그는 노예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꽤 활기차게 이것저것 말하면서도 유독 메리골드의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먼저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말이다.
“나중에 또 만나게 된다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해야겠군.”
“아멜리아 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에아 사달멜리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데네브의 주선으로 만났었지. 그 간악한 년은 남작에 의해 최후를 맞았으니 말일세.”
“아….”
생각해보니 또 그런 접점이 있었구나 싶다.
침울해하지 않는지 힐끗 조수석을 보았지만 평소의 엘로아다.
비록 금방이라도 꾸벅꾸벅 졸 것 같은 졸린 눈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떠셨나요?”
“어떠셨냐니?”
“아멜리아 님, 그 상태라던가…”
“글쎄, 그때는 나 역시 경황이 없던지라…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소문대로 무척 아름다운 마녀더군.”
이후 잠깐의 어색한 침묵.
시우가 먼저 아주 살짝 무거워지려던 분위기를 먼저 쳐냈다.
“스승님도 고우십니다.”
“입에 발린 말은 됐네. 하지 말라 그렇게 일렀거늘 또 장난이군.”
“정말인데요.”
“그만!”
언제나 위엄을 지키고자 하는 티페레트지만 시우가 가끔 칭찬을 해줄 때면 근엄하신 스승님도 쑥스러움을 탄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이 보여서 종종 서비스처럼 해드리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은…”
“시우! 앞에!”
한산한 도로로 빠져 골목길에 인접한 국도에 들어섰을 때.
엘로아가 다급하게 시우의 이름을 외쳤다.
그 경계심 잔뜩 어린 부름에 앞을 확인하자 헤드라이트에 그림자가 진 인영이 보인다.
시우는 곧장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급브레이크를 밟자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갈려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린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반응했다 한들 거리가 너무 짧았다.
상대가 완벽한 사각에 숨어 있다 갑작스레 달려 나왔기 때문이다.
-텅!
그리고 고작 한 명의 사람을 쳤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충격에 차체가 덜컹거린다.
우당탕탕 거리는 충격과 함께 앞 유리를 넘어간 물체가 차 천장 위를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시우는 곧장 문을 열고 내리려 할때 엘로아가 시우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내가 먼저 내리겠네.”
“스승님, 이럴 때가 아니…”
“시우, 침착하게. 인간이 아니야.”
엘로아는 어느새 소환한 계약검을 비스듬히 들고 차 범퍼를 가리켰다.
시우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다지 빠른 속도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시속 60km 남짓.
충돌 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슈퍼카의 훌륭한 제동성능을 고려하면 아마 훨씬 속도가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차가 거의 반파 직전이다.
고작 사람 몸에 부딪혔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
엘로아는 문을 열고 차 뒤편으로 날아간 무엇인가에게 칼을 겨눴다.
“…….”
시우도 뒤따라내려 엉망진창이 된 범퍼를 한번 살피고 엘로아에게 다가갔다.
아스팔트 위에는 한 여자가 뻗어 있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끔찍한 상처와 화상 자국들이 온몸에 가득하다.
차에 부딪혀서 생긴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저 여우 같은 용모와 붉은 머리카락은 눈에 익은 것이다.
“마녀로군.”
“제가 아는 마녀입니다. 델라 레드클리프에요.”
시우는 페리윙클이 주고 간 애마가 고작 그 정도의 충격으로 박살 난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마 충돌 순간에 자율방어가 작동했으리라.
요즘 슬슬 정을 붙이고 있던 차가 회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개박살이 난 것은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사람을 쳐버린 것보다는 백배 나아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드클리프라고? 이 자가?”
“네, 확실합니다.”
레드클리프는 소치틀과 막역한 사이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동기이며, 비겁의 마녀가 아직 천수의 마녀이던 시절 오랜 기간 가까이 지냈다는 증언이 있다.
그래서 수아 선생이 다곤의 피리 사건 이후 행방이 묘연한 레드클리프를 공범으로 지목하지 않았던가?
“물러나 있겠나.”
사고의 충격으로 혼절한 듯한 델라.
만약 그녀가 완전한 상태였더라면 자율방어가 이 정도 위력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충격을 확실히 흡수한 뒤 역으로 차를 불태워 버렸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이렇게 형편없이 쓰러져 있을 일도 없겠지.
하지만 델라가 그 전부터 입은 것으로 보이는 상처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마녀라도 이 이상 오래 방치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
그러나 공범자의 혐의가 있는 마녀에게 시우가 가까이 오게 놔둘 수는 없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던 때.
길거리 일대에 흐릿한 돔형의 막이 쳐지기 시작한다.
“이건….”
-쿵! 쿵! 쿵! 쿵! 쿵!
밤거리를 감싼 이면결계와 동시에 등장하는 다섯 기의 백기사.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처럼 완벽하게 동일한 생김새의 백기사는 하얗고 긴 창을 들고있다.
도망친 델라를 추적하던 놈들이었다.
그것들은 제각기 4개의 눈알을 번뜩이며 시우와 티페레트, 그리고 쓰러진 델라를 노려본다.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무언가 소통을 하는 듯 보이지도 않는다.
조잡한 인공지능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행동을 취하면서도 확실하게 포위할 수 있는 방향을 점하고 있었다.
사냥을 위한 대형이었다.
각기 개성은 없고 집단으로서의 일체감만이 느껴진다.
“시우.”
엘로아는 그것들을 살펴보다 시우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시우의 수련을 돕던 중 항상 아쉬운 것이 있었다.
바로 시우의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련을 실전에 가깝게 한다고 한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과는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델라도 당장 목숨이 끊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지금이라면 만에 하나 시우가 위험에 빠져도 즉각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가능하다.
“해보게나. 나는 레드클리프를 살피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타부타 말없이 그림자를 피워올렸다.
사실 백기사가 등장한 이후부터 긴장감과 떨림, 그 뒤편으로는 투지와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엘로아에게 실컷 두들겨 맞으며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법을 완벽하게 익혔고, 발경을 배웠으며, 만병지왕의 계약을 능숙하게 체화할 수 있게끔 무수히 많은 반복 수련을 했다.
그러나 대련의 대상이 엘로아여서야 체감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엘로아는 언제나 힘을 억눌러 한계까지 봐주고 있는 상태였으며 그건 시우가 성장한 이후에도 다름이 없었다.
한 8체급쯤 석권한 복싱 세계 챔피언한테 복싱 좀 배우고 스파링을 한다고 티가 나 봐야 얼마나 나겠는가?
길거리 양아치들 패면서 ‘아 내가 좀 세졌구나’하는 거지.
지난번 쇼핑몰의 옥상에서 백기사를 상대했을 때는 온 힘을 다해서 하나를 처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일대일 상태에서 몇 번이나 사선을 넘기고야 가능했던 결과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근접 전투라면 최강임을 자부하던 엘로아에게 받았던 특훈 이후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피어라.”
어느새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그림자가 검은 연기처럼 시우의 몸을 휘감는다.
날렵하고 날카로운 디자인.
바느질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한 선녀의 옷을 천의무봉이라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시우의 갑옷 역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갑주였다.
취약한 이음매도, 틈새도 없다.
신체의 모든 부분에 빈틈없이 들어맞으면서도 충격을 흡수해주고 움직임 또한 맨몸처럼 제약이 없다.
조금의 빛도 반사하지 않는 묵빛의 갑주.
목등뼈에서 생겨난 투구가 시우의 얼굴을 가리자 마력을 발하는 좌안에서만 찬연한 금빛이 흐른다.
시우가 손을 뻗자 왼손에는 상반신을 전부 가리는 히터 실드가, 오른손에는 여태 숱하게 다뤄왔던 롱소드가 생겨난다.
심장은 갈수록 거세게 뛰는데 손발은 차가워진다.
최악을 상정하며 피어나는 두려움은 심장을 꾸역꾸역 채우고, 싸늘한 긴장감이 피부에 서리처럼 내려앉는다.
역시 싸움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겠지.
그러나 샤론이 익사한 마녀에게 꿰뚫리던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끔찍한 비극을 관망하기만 했던 날.
시우는 깨달았다.
겁에 질려 주저앉은 자는 빼앗길 뿐이라는 것을.
지난 몇 달간 계속되는 수련 중 엘로아는 언제나 말했다.
싸움을 두려워하라고.
결코 즐거운 일이라 여기지 말라고.
그러나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물러서지 말라고.
지금은 주저앉지 않고, 물러서지 않기 위한 방법을 배워갈 시간이다.
시우는 칼을 앞으로 내밀고 숱하게 얻어맞으며 배워왔던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한번 해 보자고.”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동시의 다섯 기의 백기사가 일제히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