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1.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시우는 잠시 멀뚱히 굳어버렸다.
인간은 예기치 못한 것과 마주하면 사고가 멎는다.
시우 역시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뇌 정지가 온 상태였다.
제 손으로 풀어헤쳤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훌러덩 벗겨져 버린 파자마 상의.
5개의 단추 중 3개의 단추가 풀어진 파자마는 이미 의복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눈을 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아름다운 예술품을 보면 정신을 팔리고 마는 것처럼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친애하는 엘로아 티페레트 스승님의 뽀얀 젖가슴이 무방비 상태로 보여지고 있다.
스포츠 브라를 입었을 때 생기는 가슴골이나 자연스럽게 파자마를 들어 올리는 자태를 보고 예상했었지만 생각보다도 컸다.
맨가슴의 박력이라고 해야 할까?
눈대중으로 보자면 대략 D컵 정도 될 것 같은 사이즈.
잘 익은 복숭아를 반으로 잘라 엎어 놓은 듯한 예쁜 모양이다.
그 끝에는 앵두처럼 조그마한 젖꼭지가 반짝거리며 제 색을 뽐내고 있고, 희미한 그라데이션을 그리는 연분홍빛 유륜이 과일을 받친 접시처럼 놓여있다.
완전히 다 벗긴 것도 아니고 침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도중 급하게 벗긴 것처럼 절반쯤만 벗겨진 상의와 복숭아 가슴의 조화는 몹시 매혹적이고 고혹적이다.
“…….”
“…….”
그리고 뒤늦게 느린 반 박자 느린 사고가 현실을 쫓아간다.
우연찮은 사고로 노출된 가슴.
과연 공작님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표출할 것인가.
앞으로 펼쳐질 난감하고도 민망할 해명 타임에 긴장하기 무섭게 무릎 아래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코, 코오오…. 코오오오…..”
시우는 눈을 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엘로아는 타이밍 좋게 잠이 든 것이다.
오늘따라 자는 소리가 유독 커다랗긴 하지만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조금 전 눈을 완전히 감고 있을 때부터 숙면 중이셨던 모양이다.
“휴우… 다행이다.”
시우의 나지막한 혼잣말.
“……”
엘로아는 쿵쾅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죽은 척하는 토끼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어찌나 심장이 빨리 뛰는지 이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직 안도할 수 있는 때도 아니다.
엘로아는 자는 척에만 성공했을 뿐 여전히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다.
그것도 시우의 앞에서 말이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바뀐 건 없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그를 남성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 자체를 그만두기 위해 안마를 부탁한 게 아니던가?
지금이라도 잠깐 잠들었던 것처럼 일어난 뒤 별일 아니라는 양 태연하게 굴면 된다.
엘로아는 촉박해진 사고의 틈에서 끝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이미 뜻밖에 노출에 질겁해 잠자는 척을 한 시점에서 그녀의 다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이미 한번 도망친 사람은 다시 마주하기 어려운 법이니.
“흐음….”
엘로아가 일어날 타이밍을 엿보며 전전긍긍하는 사이 뒷목 아래서 빠져나가는 시우의 손.
그 순간 엘로아의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한 장면은….
얄궂게도 페리윙클의 가슴을 제 것처럼 주무르며 가지고 놀던 시우의 모습이었다.
페리윙클에게 거칠게 박아대면서 가슴이 찌그러질 정도로 움켜쥐고, 젖꼭지를 빨고 잡아당기고, 심지어 뺨을 때리듯이 손바닥으로 때려대던 장면이 어째서인지 선연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언제 일어나면 좋을지를 고민하던 엘로아는 그대로 픽 굳어버렸다.
왜 갑자기 여기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래.
결코 시우를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목격했던 충격적인 광경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엘로아는 열심히 제 나름대로 이해할만한 방향으로 추론을 거듭했다.
그때 시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울린다.
“스승님, 주무시나요?”
그 질문은 일종의 분기점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막 일어난 척을 하며 눈을 부스스 뜨고 애초 계획했던 대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던가.
아니면 이대로 자는 척을 하며 순간의 민망함을 절반쯤 회피하던가.
분명 엘로아는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도저히 눈을 뜨고 난 이후 태연하게 굴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보통 잠이 들었을 때 가슴을 주무르는 정도로는 깨지 않는다.
적어도 시우에게 있어 엘로아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로 비칠 터.
과연 그는 어떻게 할까?
엘로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혹시 완전히 자고 있다고 생각해 움켜쥘까? 만지지는 않을까?
그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라고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한편 이런저런 말 못할 상상은 더 뚜렷해져만 간다.
-바스락!
그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눈을 감아도 사람이 지척에서 움직이는 인기척은 의외로 크다.
체온이 주변을 덥히는 정도, 소리, 그림자만 봐도 대충 그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우의 손이 엘로아의 가슴 쪽으로 뻗었다.
숨을 멈추고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것도 우습게…
“또 안 좋은 꿈 꾸시나 보네.”
시우는 더듬더듬 옷자락을 만지더니 최대한 엘로아의 피부에 손이 닿지 않게 주의하며 단추를 끼워주고 있었다.
자꾸만 옷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묘하게 속도가 느리다.
엘로아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고작 단추 하나 끼우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은 없다.
시우는 지금 엘로아의 흐트러진 복장을 정돈해주면서 그녀의 반나신을 보지 않고자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의식도 없는 엘로아를 배려해 말이다.
‘시우….’
엘로아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든 틈을 타 음흉한 생각을 할 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억측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이래서야 제자보다 못난 스승이 아닌가?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시우는 그제야 후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엘로아의 다리와 등을 부드럽게 감싸는 팔.
시우가 침대 방향과 직각이 되게 누워있는 엘로아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반듯이 눕힌 것이다.
이제 다 끝이다.
안심하고 잠이 들 수 있다는 안도감과 결국 자신의 다짐을 1시간도 되지 못해 어겼다는 묘한 패배감이 혼재했다.
복잡하게 일그러지는 엘로아의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쓰다듬어주는 두툼한 손.
처음엔 이겐 무슨 일이지? 싶어 긴장했던 엘로아도 그 손에 담긴 감정에 이내 차분해졌다.
“…….”
이건 위로의 손길이다.
라피가 힘들어할 때 엘로아가 해주었듯, 따뜻한 온기와 관심이 담긴 손끝이었다.
엘로아가 깨어있는 것을 모르는 시우는 그녀가 뻣뻣하게 굳어 있거나 경직된 표정을 짓는 것이 악몽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겠지.
처음이라기에는 너무 익숙한 손길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해주었던 걸까?
시우는 한참이나 침대 옆에 가로 앉아 엘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손끝으로 흐르는 머리카락.
이따금 두피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시원함.
무엇보다도 강하게 느껴지는 다정함과 두 사람의 연결고리.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남녀로 의식하건, 그가 어떤 눈으로 엘로아를 바라보고 있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엘로아의 몸에 흐물흐물 힘이 빠져나갔다.
아까의 긴장과 당혹은 봄볕을 쬔 눈송이처럼 녹아내리고 잠이 솔솔 몰려왔다.
이윽고 완전히 잠이 든 엘로아.
“쿠우…..”
그날 엘로아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대신 이름모를 풀들이 넓게 펼쳐진 멘델 구릉에서 라피와 함께 말을 탔던 꿈을 꾸었다.
얼마만인지 모를 편안한 잠이었다.
2.
시우는 눈을 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오래 잠을 잔 모양이다.
평상시라면 막 동이 트고 있을텐데 창문 너머로 햇볕이 기분 좋게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음?”
눈을 게슴츠레 뜨고 위를 보자 분홍빛 인영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머리를 차분하게 쓰다듬는 손길도 뒤늦게 느껴졌다.
“일어났는가?”
“무슨 일 있으세요?”
시우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계속해서 시우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사람의 정체는 엘로아였다.
파자마 위로 앞치마를 걸친 그녀는 시우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머리를 쓸어주고 있다.
“별일 없다네. 그냥 해보고 싶었지 뭔가.”
평소 엘로아는 시우를 바라볼 때 바라보는 것만으로 좋다는 양 은은한 미소를 머금곤 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표정은 훨씬 더 자상하고, 자애로운 미소다.
엘로아의 견습마녀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이런 얼굴로 바라보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잠든 얼굴이 꼭 아기 같더구나.”
엘로아의 말에 괜히 민망해진 시우는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를 넘기며 물었다.
“얼마나 보고 계셨나요?”
“얼마 안 되었네. 오늘따라 유독 곤하게 자고 있어 깨우기 미안하더군. 이렇게 일어났으니 잘됐네. 나오게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엘로아는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느릿하게 따라오자 인덕션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가 보인다.
그녀가 자신 있어 하는 요리 중 하나인 치킨누들스프의 냄새였다.
자극적이지 않고 속을 편하게 해준다는 이유로 최근 거의 아침마다 먹는 요리다.
그 옆에는 은은한 훈연내를 풍기는 베이컨이 있었고, 토스터 안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식빵도 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나. 금방 완성될 테니.”
“거들 게 없을까요?”
“매번 괜찮대도 항상 묻는구나.”
엘로아는 주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정성이 한가득 담긴 아침 식사를 내었다.
시우는 언제나처럼 식기랑 우유를 세팅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있으니 양껏 먹게나.”
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두 사람의 식사 분량은 아니다.
엘로아는 손이 큰 것인지 음식을 하면 일가족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을 한 번에 만들었다.
영체라면 굳이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될 텐데.
언제나 시우를 배부르게 먹이고 싶다는 마음일까?
물론 비쥬얼부터 맛까지 완벽한 엘로아 표 아침식사를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여느 때처럼 엘로아가 먼저 첫입을 먹길 기다리는데.
“…왜 그러시나요?”
엘로아는 식사를 들지도 않고 시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우.”
“네.”
“고맙네.”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고개가 슬쩍 돌아가긴 하지만, 무엇 대한 감사인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시우를 만난 이후 엘로아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첫 만남 때 느꼈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당겨진 활시위 같은 느낌이 없달까.
상실의 아픔을 겪은 그녀에게 시우는 일종의 반려동물처럼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해주고 있던 거겠지.
아마 그 점에 대한 감사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말 고맙네.”
이 행복한 평화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엘로아는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아마도 이루어지지 않을 기도를.
덧없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