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55화 (255/917)

#255

1.

“이거 때문인가?”

시우는 담뱃갑 안에 넣고 다니는 분홍색 네잎클로버를 꺼내 들었다.

호호 불면 날아가 바스러질 것 같은 신비로운 색상의 클로버는 페리윙클이 건네주었을 때보다 아주 조금 시들어있다.

시험용으로 만들어 본 것.

기한은 일주일.

그녀가 알려준 것은 거기까지.

정확히 어떤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달리 말해준 것이 없다.

거기에 페리윙클은 시우와 헤어지자마자 해외 연락처도 주지 않고 괌으로 떠났으니 물어볼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이 기기묘묘한 색상을 봐라.

딱 봐도 뭔가 야시꾸리하고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 것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버려야 하나…”

만약 시우가 생각한 것이 맞다면 아무리 호의로 받은 것이라 한들 불필요한 선물이다.

쉴 틈도 없이 곤혹스러운 상황을 연출시키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줬단 말인가?

그림자로 손끝을 덮어 그것을 바스러뜨리려 했으나.

“흠….”

관두었다.

실제로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어쩌면 연둣빛 네잎클로버가 소모됐을 경우를 대비해 쥐여준 예비 장치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에 엘로아의 이부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시우.

요즘 들어 그녀와 같은 방에서 잠들고 있다.

하루에 4시간,  필수적인 수면은 다른 의미론 시우가 가장 위험한 시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위기에 처했을 때 시우가 곧장 엘로아를 깨우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물론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아니고 각기 다른 침대 2개를 나란히 맞붙이는 것으로 타협을 뒀다.

-벌컥!

맞은 편 방문이 열리며 파자마를 입은 엘로아가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다 큰 성인 여성에게, 그것도 지엄하신 티페레트 공작님께 아장아장이라는 표현은 무례하기까지 하지만 저 파자마를 입고 있을 때만큼은 어쩔 수 없다.

시우가 눈대중으로 사 온 까닭에 두 치수 정도 커다란 파자마와 손을 완전히 덮는 소매.

접어 올린 바짓자락을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 이런 표현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불을 정리해뒀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우유 드릴까요? 덥혀 뒀는데.”

“번번이 고맙네.”

“아닙니다. 이 정도로 뭘요.”

시우는 부엌에서 미리 중탕해 두었던 따뜻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건넸다.

그간 지내며 알게 되었는데 엘로아는 상당히 심각한 알코올 홀릭이었다.

영체가 육체적으로 중독될 리는 없으니 아마도 정신적인 의존 쪽이겠지.

그 자체로 이러니저러니 말을 할 생각은 없지만 기왕 자야하는 거 술로 쓰린 속을 달래며 자는 것보다 따뜻한 우유가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며칠 전부터 이렇게 핫밀크를 대접하고 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도움만 받는 처지였으니 이렇게라도 보필해야지 않겠나.

“흐음, 좋군.”

엘로아는 딱 맞는 온도로 맞춰진 우유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홀짝였다.

시우의 발랄한 배려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포근한 미소를 짓으며 다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저런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쌍둥이랑 비슷한 동년배 같아 보인다.

독특한 말투만 뺀다면 말이지.

“시우, 한 가지 부탁이 있네만.”

시우가 머그잔을 정리하기 위해 챙겨 들어 부엌으로 가려던 때.

별안간 엘로아가 그를 멈춰 세웠다.

“네, 말씀하세요.”

“안마를 좀 해줄 수는 없겠나?”

안마?

갑자기?

하필 이런 시국에?

시우는 팬데믹이 발발한 가운데 클럽 가서 놀자는 친구의 제안을 들은 것처럼 질겁했다.

가만히 있어도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판국이다.

그런데 서로 파자마 한 장만 입고 있는 상황에서 신체접촉을 종용하다니.

사실 파자마란 의류는 편안함을 중점에 두는 특성상 방어력이 굉장히 낮은 편에 속한다.

옷감도 얇고 단추도 헐거워서 몸을 조금만 숙여 옷자락이 벌어져도 안이 보인다.

당장 엘로아가 입은 파자마 바지 위로도 팬티의 라인이 고스란히 내비치니 말이다.

“왜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짓는 겐가?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나?”

“네, 뭐, 그렇긴 한데…”

엘로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태연하게 굴었다.

그녀가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해오는 이유는 아까의 다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를 제자로 생각하는 한편 무의식중으로는 그가 남자임을 의식해왔다.

그런 엘로아의 행동이 시우에게 투영되어 그 역시 엘로아를 여성으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갖은 사고에 서로 얼굴을 붉히며 민망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상의 전환.

엘로아가 이런저런 상황에 과민반응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응한다면?

스승의 본분을 지켜 제자의 시선이나 접촉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시우 역시 껄끄러운 벽을 허물고 완벽한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거 라피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부탁하겠네.”

“뭐, 알겠습니다.”

시우는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엘로아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녀가 걸터앉은 침대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는다.

그냥 마음 단단히 먹자.

안마가 별것인가?

그냥 어깨를 쭈물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게나.”

엘로아는 대련할 때처럼 손목에 차고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어깨를 주무를 때 머리카락이 끼어들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그 덕에 시우는 하얀 엘로아의 목덜미를 가까이서 직관할 수 있었다.

최대한 체취를 맡지 않기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능한 숨을 입으로 들이쉬었다.

폭발물을 제거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읏!”

느슨한 파자마 자락은 빈틈투성이였다.

어깨선과 목선이 맞닿아 유려한 굴곡을 그리는 맨살에 시우의 투박한 손이 닿는 순간.

엘로아의 부드럽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어깨에도 바짝 힘이 들어가 누가 보면 전기충격이라도 가한 듯한 모양새다.

아직 손에 제대로 힘을 싣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프세요? 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 아닐세. 계속하게나.”

시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주물주물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딱딱하기만 했던 엘로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부드럽다.

맨살끼리 맞닿는 부분은 물론 얇은 파자마 자락으로 덮인 부분까지 마시멜로처럼 푹신푹신했다.

이것이 여성의 몸이다 라고 피력하는 듯하다.

언제나 커다랗게만 보이던 뒷모습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손을 올려놓으니 아주 작은 어깨이다.

슬픔을 홀로 짊어지기에도, 스스로에게 부여한 막대한 업을 책임지기에도 한없이 작아만 보였다.

“시원하시나요?”

엘로아는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에 아무것도 걸리질 않는 것을 보면 아마 파자마 아래는 노브라겠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주 잠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조건 반사적으로 엘로아의 가슴에 시선이 향한다.

몸동작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언제나 스포츠 브라 안에 꽁꽁 감싸인 가슴이지만 실제로는 힘숨찐 가슴이었다.

앉아 있는 자세임에도 근사하게 파자마를 들어 올리고 있었으니까.

시우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좋은 생각, 좋은 생각을 하자.

요새 민망한 일이 많이 있었서 그런지 자꾸 그쪽으로 발상을 떠올리게 된다만…

좋지 않다.

“흐음….”

번뇌에 젖은 시우의 심정을 모르는지 엘로아의 몸은 느슨하게 풀려만 갔다.

꼿꼿이 서 있던 허리도 어느샌가 편안하게 이완되어 뒤로 완전히 기댈 것 같은 모양새다.

시우는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시원하신가요?”

“무척 시원하네. 제법 솜씨가 좋구나.”

“어렸을 때 부모님께 자주 해드렸거든요. 잠깐 고개 뒤로 넘겨 보시겠어요.”

“고개를 뒤로?”

엘로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시우의 손바닥에 머리를 뉘었다.

시우는 뒤통수 아래의 혈 자리, 흔히 미용실에 가면 서비스 마사지 차원에서 꾹꾹 눌러주는 풍지혈을 꾸욱꾸욱 눌렀다.

“하으으…”

뒤로 반쯤 넘어온 엘로아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리면서 입이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둥글둥글한 이마에 초승달처럼 떠 있던 눈썹도 꿈틀꿈틀 움직인다.

그래 이 반응이지.

안마가 정통으로 먹혀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보이는 반응.

시우는 녹슬지 않은 솜씨에 자화자찬하며 열심히 엘로아의 목덜미를 꾹꾹 눌렀다.

원래 머리 자체의 무게만으로 꽤 지압이 되는 편인데 그녀는 머리가 워낙에 조막만하고 가벼웠기에 별도로 힘을 써야 했다.

“느, 능숙하구나.”

개다래 나무에 취한 고양이처럼 헤실거리는 엘로아.

몸이 점점 뒤로 기우는 듯하더니 이미 거의 넘어왔다.

“불편하시면 아예 누우실래요?”

“그래도 괜찮나?”

“네, 저도 그게 더 편해서요.”

“알겠네.”

엘로아는 아예 몸을 눕혔고 시우는 뒤통수에 손을 끼워넣듯 넣었다.

반복해서 그녀의 목 전체를 주물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일어났다.

벌러덩 드러누운 자세란 필연적으로 좀 더 많은 엘로아의 신체가 시우의 시야에 잡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뒤로 눕는 겨를에 파자마가 조금 위로 올라왔는지 벌어진 밑단 사이로 엘로아의 앙증맞은 배꼽이 보인다.

움푹 들어갔지만 길게 패인, 귀여운 배꼽이었다.

“이런 신통방통한 방법이 있었을 줄이야…”

또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돌기.

하늘거리는 파자마를 들어올린 엘로아의 가슴 위로 유독 도드라진 두 개의 굴곡이 눈에 들어온다.

가슴의 정중앙에 저런 모양새라.

그렇다면 틀림없이 유두일터…

“으극!”

“죄, 죄송합니다.”

당황하는 바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엘로아의 목 뒤를 꽉 쥐자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아닐세, 무척 편안하니 하던 대로 하게나.”

엘로아는 다시 눈을 감고 조물조물 움직이는 시우의 손에 몸을 맡겼다.

내심 흐뭇해하면서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명안이었음이 틀림없다.

처음에 시우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을 때는 조금 움찔하기는 했다.

대련 중에 서로 몸이 맞부딪히거나 때린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신체접촉이 이루어졌던 적은 없으니까.

의외로 거칠고 두툼하고 또 차가운 손이 서늘하게 피부에 맞닿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마저 들었다.

하지만 막상 본격적인 안마가 시작되자 별것도 아니었다.

주물주물 주물러지는 신체접촉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처음엔 쭈뼛거리던 시우도 엘로아가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자 마찬가지로 순수한 반응으로 응대해준다.

서로에게 한 점의 껄끄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엘로아는 비로소 올바른 사제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함을 느끼고 안도했다.

앞으로도 이대로만 하면 될테지.

“흐으으음….”

슬슬 졸음이 몰려온다.

이대로 그의 손으로 안마를 받으면서 잠들 수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질어질하는 머릿속에서 오직 시원하게 뒷목을 주무르는 손의 감각만이 남았다.

매트리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노곤함을 느끼던 엘로아가 슬쩍 몸을 뒤척이는 순간…

귓가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툭

정확히 세 번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 그리고 어쩐지 허전해지는 가슴팍.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또 안마 중에 옷자락이 휘말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이.

안 그래도 헐렁헐렁한 파자마 단추 중 3개가 자연스럽게 풀려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엘로아가 뒤척이는 바람에 단추가 풀어진 파자마 앞섶이 벌어지면서 그녀의 젖가슴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동시에 목을 주무르던 시우의 손도 우뚝 멎는다.

눈을 감고 있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엘로아도 이것만큼은 눈치챌 수 있었다.

최근 자꾸만 벌어진 일련의 해프닝 이번에는 굉장한 스케일로 벌어졌다는 것을.

즉, 우연의 일치로 시우의 앞에 가슴을 훤히 드러내 버렸고.

또한 그가 그것을 목격했다는 것을.

숨이 멎을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엘로아는 침착하려 애썼다.

이제 와서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다면 자연스럽게 시우도 엘로아를 의식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은 척 옷깃을 여미고 ‘뭘 당황하고 있는겐가?’라고 멋지게 말해주자!

“…….”

“…….”

길어지는 침묵.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꼼짝도 하지 않는 입과 몸.

“……코, 코오오…코오….”

엘로아는 자는 척을 시전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