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1.
스승과 제자의 관계란 곧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
특히 마녀 사회에서는 그 관계성이 더 명확해진다.
견습마녀에게 마녀는 어버이이며, 마녀에게 견습마녀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이 말이다.
“그러나 그대는 어디에도 가지 말게. 내 옆에만 있게나.”
넘어서는 안 될 금단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사랑.
이렇듯 엘로아는 평소 시우에게 가지고 있던 알 듯 말 듯 한 마음을 용기 끝에 고백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뭐, 시우는 손을 잡히는 순간 잠깐이나마 착각하긴 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네.”
페리윙클도 시우도 그리고 조금 전 엘로아 조차도.
시우가 죽음에 처하게 되는 원인이 비겁의 마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정황을 따져보아도 가장 가능성이 큰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대마녀조차 죽게 할 재앙이 한 달 이내에 서울에 닥친다.
시우의 손에는 시한부 선고와 같은 불길한 흉괘가 들려있으며, 현재 서울에 있다.
비겁의 마녀는 몇 달에 걸쳐 서울에 여러 사고를 일으켰으며 현재까지 소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한 것들은 생략한다 해도 이 정도의 상황증거가 모인다면 어렴풋했던 윤곽도 조금은 확실해진다.
‘결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엄청 커다란 재앙이 일어난다’인 것이다.
따라서 시우를 에버그린과 함께 게헨나로 피신시키려 했다.
그 순간 엘로아는 떠올렸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면 어떻게 될까?
시우의 흉괘가 비겁의 마녀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최초의 남성 마녀라는 희귀한 타이틀을 지닌 시우를 노리는 공적 등 다른 위험요소가 있는 것이라면?
엘로아에게는 스스로 부여한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엘로아가 짊어진 업에 가까웠다.
어떤 선택지가 주어지더라도 곧 일어날 재앙을 등 돌린 채 외면할 순 없다.
엘로아는 결국 서울에 남아 목숨을 불사르는 한이 있더라도 싸울 것이다.
즉, 만약 시우가 게헨나에서 위험에 빠진다면 엘로아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
고작해야 페리윙클이 건네주고 간 네잎클로버가 제 역할을 다하길 기도할 뿐이겠지.
따라서 고한다.
“…하여 내가 그대를 지키겠네. 내 옆에 있는 것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할 터이니.”
“음…”
시우는 얌전히 기묘한 열기에 사로잡힌 엘로아의 연설을 들었다.
그녀는 조리있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시우가 듣기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조금 더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너무 비약이 심하다.
엘로아가 늘어놓은 가설은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갈 때나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신중한 그녀의 성격을 고려해도 과한 걱정이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시우는 굳이 그러한 점들을 지적하지 않았다.
엘로아가 라피를 잃은 이유는,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사연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엘로아가 한눈을 파는 사이 라피가 에아에게 당해버렸다지.
그런 아픈 과거를 지닌 엘로아로서는 ‘위험에 빠질 것이 예정된 시우를 옆에 두지 못한다’라는 발상 자체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이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축제 한복판에서 불꽃놀이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포격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니, 그 시점부터는 확률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것 따위는 의미가 없다.
엘로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우를 눈앞에 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네 역시 그리 생각하지?”
“네, 스승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계속 옆에 있어 줄겐가?”
“그렇게 할게요.”
엘로아는 불쑥 시우의 코밑까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조금은 유치해 보이는 동작임에도 한없이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이었다.
“부디 약속해주게.”
시우는 잠시 망설였다.
아주 잠깐, 이 약속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사실 엘로아의 옆이라면 어지간한 위험에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가장 염려되던 샤론의 안전이 보장됐다.
또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땐 페리윙클이 주고 간 네잎클로버가 보험이 되어 한 턴을 벌어주겠지.
아니다.
역시 가장 안전한 것은 게헨나로 피신해 있는 것이다.
시우라면 제머나이 백작가의 비호를 받을 수도 있을 테니 구태여 혼돈의 소용돌이가 될 서울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우는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하겠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서 엘로아의 표정이 너무나 절박하고 간절해 보였기에.
2.
그 이후에 이틀에 걸친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수아 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샤론을 게헨나로 피신시켰다.
이후 위치포인트의 펜트하우스에서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온 두 사람.
한동안 지냈던 곳이 워낙 넓은 펜트하우스였던지라 방이 두 개나 있는 오피스텔임에도 바짝 붙어살고 있다는 밀착감을 안겨주었다.
“시우, 어디가는 겐가?”
“아, 담배 피우러 갑니다.”
“항상 동행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같이 가세.”
함께 쇼핑을 다녀온 이후 엘로아의 모습을 표현하자면, 송구한 표현이지만, 분리불안증에 걸린 강아지 같았다.
눈앞에서 시우가 보이지 않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처럼 온종일 옆에 붙어 있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과보호를 하며 시우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엘로아의 모습은 병적이기까지 했으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
그 자체만으로도 살짝 부담감과 불편함을 느낄 법도 한데.
여기서 문제가 추가로 발생했다.
당최 그 원인을 종잡을 수 없는 기묘한 문제였다.
이것 봐라.
시우가 사 준 구두에 체크무니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계단을 먼저 오르는 엘로아.
그 뒤를 방심한 채 따르다 아차 싶었다.
공교롭게도 엘로아의 치맛자락이 아주 기묘한 각도로 말려 올라가 한쪽 엉덩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늘 티페레트 공작님의 픽은 수수한 민트색과 흰색의 줄무늬 팬티.
토실토실해 보이는 엘로아의 엉덩이와 계단을 올라가느라 고무줄 아래로 두드러지는 엉밑살이 코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렇게 짧은 치마도 아니고, 가방 같은 것을 매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인지 시우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아니, 소파에 앉아있느라 저렇게 접혔다고 쳐도 원래 치마라는 게 저렇게 종이 접히듯이 접히는 거던가?
엘로아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듯 입을 열었다.
“그대는 금연할 생각 없나? 물론 연초의 독성 정도로는 영체에 해가 될 수 없지만 중독되어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네.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게 아닌가?”
불과 이틀전만해도 그대로 얼탔을 시우는 자연스럽게 엘로아의 옆에 바로 붙어서 계단을 올랐다.
왜냐하면 요 이틀간 이런 공교로운 우연이 틈만 나면 생겨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성적인 쪽으로.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사안이었다.
“스승님도 술 좋아하시지 않나요?”
슬쩍 옆에 서서 엘로아의 엉덩이 쪽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대로 정돈된 치마.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사고 중에 이 정도면 서로 얼굴 뜨거울 일 없이 끝난 편이다.
이쯤 되면 거대한 악의가 시우를 겨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페리윙클이 말해주었던 죽음의 위기가 결국 선 넘은 실수를 저지른 시우가 엘로아에게 맞아 죽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이런 음모론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술과 담배는 엄연히 다르네!”
그 와중에 엘로아는 제 위스키 컬렉션을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술에는 중독성이 없지만 연초에는 중독성이 있지 않은가? 또한 술에는 멋과 미학 그리고 심도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예술이 담겨있네. 반면에 연초는 마약으로 분류될 정도로 해악성이 짙지.”
그렇다기엔 명백히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병도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스승님이 그러시다는데.
아무튼 담배를 피우고 내려오는 순간까지 흡연의 백해무익함과 위스키를 위시로 각종 주류에 대한 열띤 예찬을 듣던 시우.
“…아무튼 꼭 노력이라도 해보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도착한 순간까지 이어졌던 엘로아의 설교도 끝나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져 있다.
이제 슬슬 엘로아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시우는 굳이 잠을 잘 필요가 없지만 엘로아에게 하루 4시간 수면은 필수적인 계약의 대가였다.
경험상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둘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상황이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시우는 방심하지 않고 몸가짐을 신중히 했다.
“그럼 먼저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게나.”
엘로아 역시 이상함을 의식하고 있는 것인지 두 번의 당부가 돌아왔다.
“꼭 밖에서 있어야 하네.”
3.
그렇게 신신당부한 엘로아는 제 방 안으로 들어왔다.
“…….”
요즘 뭔가 이상하다.
자꾸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몸을 씻을 때 문이 저 혼자 벌컥 열려 샤워 중인 모습을 시우에게 보인다던가(물론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몸을 웅크려 더 큰 참사는 피했다).
대련 중에 쓰러진 시우의 사타구니 위로 손이 닿는다거나(그런 일 없었다는 척 시치미를 뗐다).
우연히 속옷이 노출된다거나…
아무튼 입에 담기 민망한 사건들이다.
엘로아라고 요즘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부끄러워하고, 남사스러웠으나 최대한 태연하게 받아드리는 ‘척’ 모습을 보였다.
겨우 이 정도의 일로 시우와 떨어질 수 없으니 꾸역꾸역 참으면서 그를 옆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빈도는 분명 이상했다.
혹시 시우가 의도적으로 음흉한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이런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지, 잠깐이지만 의심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럴 리 없지.”
시우의 성품과 성향은 엘로아가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엘로아를 대상으로 그런 흉계를 꾸밀 됨됨이는 아니었다.
엘로아는 옷을 벗고, 갑갑하게 가슴을 조이는 스포츠 브라도 끙차 벗어던졌다.
이후 시우가 사주었던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촉감에 하품이 절로 나오며 요새 있던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흐음…”
그렇게 턱을 매만지던 중 퍼득 떠오른 생각에 엘로아는 흠칫했다.
“…엇?”
맨살을 보인다거나, 속옷을 보인다거나, 신체접촉이 생긴다거나.
최근 엘로아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던 다양한 수난은 모두 동일한 전제를 지니고 있었다.
제자에게 맨살을 보여 부끄럽다?
제자에게 속옷을 보여 부끄럽다?
제자와 몸이 맞닿아 부끄럽다?
말이 되지 않는다.
엘로아가 일련의 사건을 불상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들이 ‘남녀관계’일 때 껄끄러운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엘로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남녀관계라?
만불성설, 언어도단, 어불근리.
그건 패륜이나 다름없다.
아직 많은 것에 익숙지 않은 시우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중심을 잡고 선도해야 할 자신마저 은연중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은 엘로아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여태 무엇을 부끄러워했던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떠는 엘로아.
비록 임시라지만 스승으로서 올바른 모습만을 보여야 했거늘.
사소한 일에 경거망동하고 허둥거리는 치태를 보였으니 그가 무엇을 보고 배웠을지도 짐작가능 했다.
최초로 민망한 일이 발생했을 때부터 엘로아가 아무렇지 않게 대처했다면.
아마 시우도 지금처럼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렷다.
엘로아가 먼저 시우를 한 명의 남자로 생각했으니, 시우가 엘로아를 이성으로 여기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잘못된 바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엘로아는 당찬 포부를 품고 방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