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1.
예정대로 옷도 샀겠다.
다음 일정은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식자재들을 사는 일이었다.
엘로아는 의외로 요리가 정말 능숙했고 수련이 끝나면 시우를 초대해 몇몇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오늘 옷을 사준 시우를 위해 근사한 식사를 대접할 예정이었다.
“흠…흠흠흠….”
엘로아는 나풀나풀거리는 셔츠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옆에서는 시우가 웃음을 참으며 쇼핑 카트를 밀고 있다.
엘로아는 기본적으로 꽤 딱딱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기표현이 서툰 것인지 아니면 제 감정을 낱낱이 들어내지 않는 것이 무인의 소양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은 좋고 싫음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저 정도로 기분 좋음을 내비치는걸 보면 오늘 쇼핑이 퍽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잔뜩 들뜬 발걸음으로 식료품 코너를 돌던 엘로아는 퍼득 무엇인가를 깨닫고 슬며시 시우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멈춘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우의 표정이 눈에 비쳤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겐가? 실없이 웃으면서.”
사실 봄날 마실 나온 강아지처럼 좋아하는 엘로아가 귀엽기 때문이지만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하기는 좀 그렇다.
따라서 엘로아가 제일 마음에 든 듯한 옷을 칭찬한다.
“옷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요. 구두도 예쁘고요.”
옷을 살 때몇 번이고 했던 말이지만 엘로아는 ‘옷이 잘 어울린다’라는 칭찬에 매번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들어도 들어도 ‘그런가?’ 싶은 미심쩍은 마음과는 별개로 입꼬리가 느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네. 이렇게 굽이 있는 구두를 신는 것도 처음인지라… 키가 조금 커진 것 같긴 하네만… 너무 눈에 튀지는 않나?”
“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그렇지 않네.”
“잘 어울리셔요.”
“놀리지 말게나.”
스승님 마법 대단해요! 스승님 무술 대단해요! 같은 칭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엘로아였지만, 옷 칭찬은 ‘놀리지 말게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굉장히 쑥스러워한다.
그 반응까지 귀여워 뭔가 계속 칭찬하는 맛이 좋았다.
“깜빡한 것이 있었군.”
“뭐가요?”
“좋은 옷을 사주어서 고맙네. 이렇게 백화점에 와서 옷을 사보는 것도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야.”
“엄밀히 말하면 제 돈으로 사드린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제가 스승님께 받아온 것들도 많고요.”
겸양을 떠는 시우에게 엘로아는 또박또박 말했다.
“제머나이 백작은 마녀임과 동시에 수완 좋은 사업가지. 훌륭한 사업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허투루 쓰지 않네. 백작이 그대에게 물적 지원을 해주었다면 그건 가벼운 호의나 동정이 아닌 그대가 그만한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걸세.”
“음…”
뭔가 엘로아가 옷 칭찬을 받았을 때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괜히 겸연쩍고 민망하고 그런 것.
애초에 시우가 현세에서 이런 풍족함을 누릴 수 있는 원인을 따지고 보자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에아 사달멜리크와 맞섰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변변한 전투 마법 하나 부릴 수 없던 시절에 그 무서운 에아에게 맞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라 그 누가 거기에 있더라도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좀 더 자부심을 갖게나.”
엘로아가 시우의 등을 장난스럽게 팡치고는 앞서나갔다.
카트를 거의 꽉 채울 정도로 이것저것 재료를 구매한 시우와 엘로아는 차에 탔다.
페리윙클에게 받은 하이퍼카.
사실 처음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주차장에 처박아 놓고 거의 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선 시우 자체가 차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서울 시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목을 끌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도로를 돌아본 시우는 벌써 이 차의 매력에 듬뿍 빠져버렸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중후한 배기음과 차와 한 몸이 되는 듯한 일체감.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질 정도로 잘 만들어진 기계장치에 마음을 뺏았겨 버렸다.
시우는 매끄럽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엘로아는 조수석에서 제 옷차림을 이모저모 뜯어보는 중이다.
지금 엘로아의 상태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이제 슬슬 페리윙클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야 할 타이밍이다.
페리윙클에게 들었던 내용은 비단 시우의 안위와만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말할 것 있겠는가? 뭐든 편히 고하시게.”
편안하게 등받이에 등을 받치고 자꾸만 떠오르려는 미소를 억누르는 엘로아.
그녀의 표정이 단단하게 경직되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혹시 페리윙클 마녀님에 대해서 아십니까?”
시우의 입에서 페리윙클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엘로아는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페리윙클?
갑자기 그녀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즐거운 분위기에 묻어가며 지난 이틀에 걸친 VR포르노에 대한 감상을 잊고 있던 엘로아.
36시간 동안이나 성관계를 엿본 것이나, 그걸 보며 주책없이 몸이 달아올랐던 것이나.
그녀의 머릿속에 도저히 남에게 말할 수 없을 부끄러운 해프닝이 떠올랐다.
혹시 시우는 이미 엘로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눈치챈 게 아닐까?
아니면 어떠한 낌새를 차리고 은근히 떠보는 것일까?
“모, 모, 모르네. 난 아무것도 모르네.”
머리가 하얗게 변한 엘로아가 엉겁결에 답했다.
거의 질겁에 가까운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한 시우.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드러난 귀가 벌겋게 익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모르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일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요…”
뭔가 미심쩍은 반응이긴 했으나 대수로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제가 집을 비웠을 때.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분의 점괘에 따르면 제가 곧 위기에 처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음, 아마… 죽을 거라고…”
팔이 잘려나가 죽는다는 자극적인 내용도 빼고 이미 반쯤 해결되었다는 말도 붙였다.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이 있는 엘로아에게 시우의 말이 어떻게 다가올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운을 뗀 시우였으나 엘로아의 반응은 격렬했다.
휙 시우를 돌아보며 거의 패닉에 빠진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지금 뭐라했나…?”
떨리는 눈동자와 삐걱이는 분위기.
트라우마라도 자극당한 것처럼 가빠진 호흡에 시우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아 물론, 호의를 베풀어주신 덕분에 해결책도 받아왔습니다. 제가 어떤 위기에 처하든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부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엘로아에게서 피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의 투기가 쏟아져나왔다.
만약 시우를 위협하는 적이 있거든 죄다 베어버리겠다는 살벌한 투지였다.
첫 만남에 붕권을 꽂아 넣었던 때의 엘로아가 떠올랐다.
우선은 조금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별일은 아닐 겁니다.”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라는 말인가? 행운의 마녀는 점성술에 능한 마녀네. 그녀의 점괘는 거의 빗나가지 않아!”
페리윙클을 전혀 모른다는 것치고는 꽤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또 잃는다면… 그대마저 잃는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나, 나는… 나는….”
벌써 최악의 결과를 상정했는지 부러질 듯 연약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한 엘로아.
시우는 당황하며 일단 차를 갓길에 대었다.
“누구인가? 왜인가? 무엇 때문에 위기가 닥치는 것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나?”
시우의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는 엘로아.
시우는 차분히 그녀를 다독이고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페리윙클 님도 당분간 한국을 떠나신다고 합니다. 점괘에서 한 달 이내에 위기가 닥치리란 미래를 보셨다고 해요.
최근에 있던 비겁의 마녀의 소행을 생각하면 아마도 한 달 안에 그녀가 사건을 일으키고, 아마 제가 거기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
“그녀가 그렇게 말했나?”
“네, 저와 같은 생각이셨습니다.”
얼마 전 있던 비겁의 마녀 습격 사건 이후, 서울은 물론 한국 전체에 전력의 진공이 발생했다.
잇따른 사건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마녀들이 연이어 게헨나로 돌아가거나 국외로 빠져나간 것이다.
수아 지부장이 게헨나와 다른 위치포인트 지부에 지원요청을 해보았지만 대부분은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애초에 마녀의 목적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성마법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 모험을 하기보다 자기 보신을 위해 애썼다.
마녀에게 죽음이란 개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대(代)’의 소멸이니, 괜히 불안해 보이는 데다가 메리트도 없어보이는 사건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가 크게 걱정 말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시우는 담뱃갑에 넣어 둔 네잎클로버 두 장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연둣빛, 하나는 분홍빛.
페리윙클이 목숨을 구해줄 것이라며 준 선물이다.
“제가 죽을 운명에 있을지라도 한 번 빗겨나가게 해주신다고 해요.”
그제야 구석에 몰린 듯했던 엘로아의 표정에도 실낱같은 여유가 생겼다.
행운의 마녀는 마녀 중에서도 유명인사였고 그녀의 클로버가 어떤 효용을 가지는지는 몇 번 들은 바 있으니 말이다.
“미안하네, 너무 추태를 부렸군.”
“아닙니다 스승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네요.”
“그래서 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사실 일전에도 이미 비겁의 마녀에 의해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리란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론을 두고 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두 번이나 연달아 도망친다는 선택지가 내키지 않아 결정을 유보하던 상태다.
하지만 죽음의 운명을 점지받은 순간까지 남아서 싸워야 할까?
20 위계 페리윙클조차 죽음에 빠질 위기라면 차라리 샤론을 데리고 피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도망치게.”
엘로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게헨나로 들어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돌아오지 말게. 그곳이라면 여기보다 안전할 게야.”
“하지만 지부장님께선 샤론을 게헨나에 들이려면 논의에 시간이 걸리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은 내가 돕겠네.”
게헨나에서 추방자의 면책권 심사는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또한 게헨나의 행정업무는 굉장히 굉장히 느려터진 편이기에 정식절차를 거친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정론이긴 했다.
그러나 티페레트 정도 되는 마녀가 제 이름과 권위를 내세워 밀어붙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비록 재산도 발언권도 잃어버려 허울뿐인 작위라 할지라도 일단은 게헨나에 셋밖에 없는 공작 위인 것이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나요?”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사소 부담이 덜어진다.
다른 무엇보다도 의식불명인 샤론이 태풍의 핵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다행이었다.
“이틀 안에 처리해 주겠네 그러니 그대도 에버그린 양과 함께…”
게헨나로 피신해 있게, 라고 말하려던 엘로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
“스승님?”
한동안 멍하니 있는 엘로아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 시우.
엘로아는 아주 간절한 손길로 시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에버그린 양은 게헨나로 피신시키겠네. 그러나 그대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시우의 손을 꽉 잡으며 말한다.
“…어디에도 가지 말게. 내 옆에만 있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