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1.
그것은 검격이라기보다 하나의 춤사위에 가까웠다.
군더더기로 불릴 만한 모든 동작이 제거된.
수천, 수만, 수억 번 지겨울 정도로 검을 붙잡고 휘두르고, 사선을 넘나든 자만이 재현할 수 있는 정제된 검리(劍理).
오로지 발끝으로 지면을 붙잡은 채, 옷자락을 펄럭이며 회전한 엘로아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순수한 것은 아름답다.
한눈 팔 시간은 찰나조차 없거늘.
시우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검을 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콰아앙!
부드러운 몸놀림과는 다르게 경(勁)의 묘리가 스며든 일검이다.
검이 맞닿자 수류탄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일어나며 시우의 몸이 밀린다.
땅을 딛고 선 발이 푹 꺼지고, 그 여파로 주변의 보도블록이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
이마저도 시우가 힘을 흘려낸 것으로 만약 정면에서 일격을 받아냈다면 십 수 미터는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합!”
풀썩 꺾이려는 무릎을 지탱한 시우는 억지로 검을 밀며 공간을 만들었다.
언제든지 검을 포기하고 단검이나 도끼, 방패 등을 만들거나 활용할 수 있는 시우와,
제 키보다 커다란 검을 휘두르는 엘로아.
언뜻 보기에 지근거리에서 격돌했을 경우 시우가 유리하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바짝 밀착한 상태가 되었을 때 엘로아는 자신의 체구가 작음을 역이용했다.
즉, 좁은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발을 밟거나 다리를 거는 식으로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리고 칼머리와 팔꿈치 심지어는 박치기까지 사용하며 공간을 활용한다.
-캉!
시우는 방패를 안쪽으로 끌어들이며 엘로아를 쳐냈다.
타격점 사이에 검을 끼워넣는 듯한 모양새로 측면을 보호한 엘로아가 튕겨 나갔다.
그 자체로는 유효타가 아니다.
엘로아는 묵직한 방패치기의 충격을 흘리기 위해 협력하듯 뛴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시우가 기다리던 것이기도 했다.
“잡았다!”
-끼기기긱!
시우는 공중에 나풀거리며 끼어들 타이밍을 엿보던 네 가닥의 리본을 꼬았다.
일전에 에아가 선보였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한 가닥 한 가닥에는 시우가 전력으로 휘두르는 검격보다 훨씬 강한 힘이 농축되어있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다 놓는 감각으로 아직 공중에 떠 있는 엘로아를 추적 미사일처럼 요격한다.
네 방향을 동시에 점하는 빈틈없는 공격.
속도는 총탄보다도 빠르다.
이 시점에서 엘로아의 패배는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계약한다.”
계약검 옆면의 문자 하나가 빛난다.
농후한 마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지며 엘로아는 공중에 뒷다리를 힘껏 뻗는다.
발 받침대가 없는 공중에서는 아무리 몸을 움직이려 해도 반작용이 거의 생겨나지 않기에 동작에 제약이 생긴다.
이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엘로아는 상식의 선을 초월한 초인.
-텅!
엘로아가 공중에 발을 뻗는 순간 원형의 충격파가 뻗어 나갔다.
음속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뛰어넘은 엘로아의 뒷발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허공을 ‘딛고’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물리법칙을 조롱하는 듯한 폭력적인 완력으로 공기층을 떠밀어 박찬 것이다.
쏘아진 리본은 뒤늦게 방향을 꺾어 엘로아를 추적했지만….
그것은 실책이었다.
“커헉!”
엘로아의 앞차기가 시우의 방패를 쿠키처럼 부수며 명치에 박힌다.
시우는 주차되어있는 자동차를 블록처럼 무너뜨리며 한참을 날아가 화장품 로드샵 내부에 처박혔다.
“끄윽….”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자 뒤따라온 엘로아가 목 끝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오늘도 속이 시원할 정도로 완벽한 패배였다.
“하아, 졌습니다. 콜록 콜록!”
“괜찮은가?”
“오늘따라 힘조절을 잘해주셨는데요?”
“끝나고 쇼핑가야 하는데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 순 없지 않나?”
엘로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우에게 손을 뻗었다.
갑옷은 형체를 잃고 그림자로 되돌아가고 시우는 손을 맞잡고 일어선다.
뭔가 대련을 할 때마다 프로레슬러가 된 기분이다.
그것도 오늘 멋지게 두들겨 맞는 배역을 맡은 악역으로 말이다.
“오늘에야말로 한번 이길 수 있나 싶었는데… 그런 것도 가능하시네요.”
“시도는 좋았네. 저번에 말했던 선제권의 개념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보이더군. 하지만 계획이 먹혔다고 생각하자마자 방비가 허술해졌지. 리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본신의 방어술을 믿었더라면 더 이어갈 수 있었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엘로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우의 실력은 나날이 나아지고 있었다.
이미 계약의 효과로 거의 완벽한 수를 시행하던 시우지만 엘로아가 손봐주기 전까지는 한 가지가 부족했다.
바로 수 싸움이다.
본능을 좇아서만 움직이다 보니 완급조절이라던가 다음 행동을 설계해놓고 따르는 것에 약세를 보였고, 그런 약점이 실전과 비슷한 대련을 통해 보완되었다.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영체 강화까지 완벽하게 능숙해졌으니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도 어지간한 마녀는 상대도 되지 않을걸세. 물론 자성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거의 의미 없군요.”
“그렇지 않네. 지금 이 실력이라면 까다롭지 않은 호문쿨루스 정도는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을게야.”
쓴웃음을 짓는 시우를 보며 티페레트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제와 엊그제 민망했던 경험 탓에 어색함을 느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수련이 시작되니 그다지 의식되지 않는다.
이것이 일상의 관성이라는 걸까?
아마 시우가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았더라면 절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엘로아가 그의 성교 장면을 직접 목격했음은 물론이오 그 탓에 가랑이 사이를 칠칠치 못하게 적셨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면...
아니, 이제 그만 생각하자.
앞으로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니 혼자만의 비밀로만 남겨두면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튼 고생했네.”
“후우, 오늘도 지도 감사합니다.”
시우와 엘로아는 엉망이 된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과 거리 곳곳이 폭격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서져 있다.
하긴 두 사람의 대련은 평범한 인간끼리의 스파링이 아니다.
동작 끝에 살짝 걸친 자동차는 호일로 만든 것처럼 찌그러지고, 단단한 아스팔트 바닥도 고작 한 스텝에 우그러진다.
빗나간 리본이 파헤친 바닥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니 말할 것도 없지.
이 정도 파괴의 흔적도 이면결계가 사라지면 원상태로 수복된다니 참 편리하기 짝이 없는 마법이었다.
위치포인트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인근 백화점으로 향했다.
물론 쇼핑을 위해서였다.
2.
“흠흠흠…”
엘로아는 백화점 내부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뿐사뿐 흥겨운 듯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도 함께 들썩들썩 흔들린다.
시우가 지금까지 봤던 엘로아의 모습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스승님.”
“불렀느냐?”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었는데 슬쩍 고개를 갸웃하던 엘로아가 반 박자 늦게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슬쩍 얼굴을 붉히며 콧노래를 멈춘다.
주책없이 경망 떠는 모습을 보인 듯하여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놀리지 말게나.”
“놀리려던 건 아닙니다. 기분이 좋으시면 저도 좋죠.”
페리윙클에게 선물 받은 멋진 차를 타고 백화점에 함께 입성.
지금은 함께 여성복 코너를 둘러보는 중이다.
고백하자면, 엘로아는 옷이나 장신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견습마녀 시절에는 선대 티페레트가 주는 옷을 입었고, 마녀가 된 이후에도 대충 보이는 옷만을 대충 입어왔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총천연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진 마녀들 사이에서도 티페레트의 색상은 독보적이다.
화려한 것보다는 수수한 것을 좋아하고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 엘로아는 옷을 가능한 무난하게 입음으로써 나름대로 균형을 맞춰왔던 것이다.
그것이 관성이 됐는지 따로 쇼핑이라는 것과 연이 생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시우가 사준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사실 새 옷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보다 시우가 선물을 준다는 쪽이 훨씬 기쁜 엘로아였다.
“흐음…”
“음….”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시우는 어떤 옷이 누구에게 잘 어울리고, 최신 유행은 무엇이고 등등 패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엘로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회전 초밥처럼 빙글빙글 매점을 돌기만 반복하는 엘로아와 시우.
“보통 어떤 옷을 입으시나요?”
“활동하기 편한 옷이나 원피스를 위주로 입는 편이라네.”
“음… 그럼 이쪽에서 찾아볼까요?”
대충 아무 브랜드나 골라잡고 원피스가 많아 보이는 매장으로 들어서자 한참 뒤에나 점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꽤 젊어 보이는 여직원이었는데 시우를 보자마자 한번 깜짝 놀라고, 엘로아를 보고 두 번 놀란다.
시우도 그렇지만 엘로아는 특히 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외관이었으니 말이다.
잠시동안 말을 잊고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점원은 이내 제정신을 차리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다 너무 잘생기고 예쁘셔서 하하… 어떤 옷 찾으시나요?”
아주 잠깐 어색했던 것도 잠시.
점원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눈을 빛내며 이 옷 저 옷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모델이신 건 아니죠? 어머 염색 너무 예쁘게 잘 나오셨다!”
“이건 어떠세요? 요즘에 많이들 찾으시는 건데 고객님이랑 꼭 어울리실 것 같아서….”
“요즘 밤에는 쌀쌀하잖아요? 이렇게 카디건이랑 같이 코디하면 너무 예쁘거든요…”
“보시면 약간 캐쥬얼하고 스포티한 느낌 잘 소화하실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쪽 상품도 괜찮거든요…”
마치 마음에 쏙 드는 인형을 앞에 두고 옷 입히기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쉴새 없이 다양한 옷을 추천한다.
이미 시우는 뒷전으로, 임시 옷걸이가 되어 점원이 추천하는 옷을 잔뜩 들고 옆에서 서성였다.
“한 번 시착해보시겠어요?”
“시착할 것까지야…”
“네, 입어보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탈의실은 저쪽입니다. 수선 원하시면 즉석으로 해드리니 사이즈 좀 안 맞더라도 옷맵시만 봐주세요.”
굳이 그렇게까지? 라는 반응을 보이는 엘로아의 모습을 보고 시우가 대신 답했다.
적은 금액도 아닌데 직접 입어보고 예쁜 걸 사는 편이 더 좋지 않겠는가?
엘로아가 처음으로 들고 간 원피스는 기장이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회색 니트 원피스였다.
말이 니트 원피스지 한국에서는 신도시 미시룩으로 유명한 옷차림이다.
잠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탈의실 문을 빼꼼 열고 쭈뼛쭈뼛 등장한 엘로아.
“와….”
시우가 감탄하기에 앞서 입을 벌리며 감탄하는 점원.
점원이 추천했던 니트 원피스는 다소 몸에 달라붙어 체형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상반신을 널널하게 가려주는 카디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걸을 때마다 살랑이는 엉덩이 모양이 옷 위로 죄다 보일 것만 같다.
"오...."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널널한 트레이닝 바지와 바람막이로 몸매를 잘 가늠할 수 없었지만 엘로아는 몸매의 굴곡이 생각보다 확실한 타입이었다.
방금까지 밀회 나온 공주님 같던 엘로아가 어느새 도발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여배우처럼 변해 있다.
“너, 너무 달라붙는 것 같네만….”
몸 구석구석에 착 감싸지는 듯한 니트의 감촉과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쏠리는 시선에 당황하는 엘로아.
“아닌데~ 딱 보기 좋아요 고객님. 너무 예쁘지 않나요?”
“네? 네, 그렇네요.”
“반응 좀 더 해주셔야죠~ 섭섭하시겠어요~”
“예쁩니다. 잘 어울리셔요.”
그나마 마녀들과 부대끼며 조금은 적응된 시우와 달리 점원에게 엘로아의 미모는 경이롭게 다가온 모양이다.
엄청 호들갑을 떨면서 시우에게 두 번이나 동의를 구했다.
탈의실 안의 거울을 보면서 ‘이게 진짜 맞는 건가…’ 고민하던 엘로아지만 시우의 ‘예쁘다’라는 말에 솔깃하고 귀가 움직였다.
“그, 그런가…?”
“네, 잘 어울리십니다. 다른 것도 한번 입어보시겠어요?”
“알겠네.”
이번에는 청바지와 벨트, 검은 셔츠에 트렌치 코트.
꽤 서구적이고 성숙한 도시의 여자 패션인데도 엘로아에게 너무나 쏙 들어맞는다.
“이건 너무 갑갑한데….”
“갑갑하다니요. 이렇게 보기 좋은데요? 완전 영화배우 같으셔요. 그렇죠?”
“네, 진짜 멋지신데요?”
“그, 그런가…?”
이후로도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탈의실에서 이게 어울리는 게 맞나? 를 고민하는 엘로아.
엘로아가 나오자마자 손뼉을 치며 감탄하는 점원과 동의하는 시우.
예쁘다 혹은 멋지다는 시우의 칭찬에 혹하는 엘로아.
그러다보니 추천해 준 옷을 죄다 사고 말았다.
안 어울리는 옷이 있었어야지.
즉석에서 수선을 기다리는 동안 시우는 아예 신발까지 세 켤레를 사 주었다.
그렇게 눈요기로 즐거웠던 쇼핑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