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1.
미세먼지 매우 좋음.
초미세먼지 매우 좋음.
서울 시가 한복판에서는 산삼보다 귀하다는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달밤이었다.
먼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시우는 술을 마시며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부감을 감상했다.
페리윙클에게 안내를 받고 들어간 방.
침대 위에 수영복이 떡하니 있는 것을 보고 좀 무서웠다.
그나마 방까지 쳐들어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다는 둥, 반대로 도와달라는 둥 하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는 중이다.
철두철미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계획한 대로 무작정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돌아보고 나니 목줄을 차고 질질 끌려다는 기분이었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잘 발라진 생선처럼 탈탈 털리겠군이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들어 술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너무 기다리게 했나?"
커다란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며 페리윙클이 걸어들어왔다.
시우는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옆구리의 천을 중심으로 위아래가 하나로 합쳐진 하얀 모노키니.... 이긴 한데 굉장히 파격적이다.
위에를 보니 가슴 절반을 간신히 가려 조금만 몸이 흐트러져도 유륜이 보일 것 같고, 아래를 보니 비키니 라인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음모가 보일 정도로 천 면적이 좁다.
훤히 드러난 건강미 넘치는 배꼽에는 반짝이는 밸리 피어싱이 박혀있다.
확연히 늘어난 노출에도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
도회적인 조명 속에서 몸매를 뽐내는 페리윙클의 모습은 런웨이를 걷는 모델워킹을 연상케 했다.
물론 실제로 어지간한 모델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멋있고 말이다.
"오, 몸 좋은데? 운동 열심히 했나 봐?"
페리윙클을 격의 없이 거리를 좁혀오며 바싹 달라붙었다.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비율 탓인지, 멀리서 보기에는 시우보다 클 것 같았는데 막상 앞에 오니 시우보다 머리 하나나 작았다.
"그런 건 아닙니다. 요즘 들어 열심히는 하지만요."
"그렇게 세무조사원처럼 딱딱하게 굴 거야? 오늘 날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있는데. 좀 편하게 해봐. 자, 하나, 둘, 셋!"
"........"
"못하겠어? 술도 제법 마셨잖아."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인지 뭔지...
그것만 알게 되면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인데 분위기까지 띄워보라니 그건 무리다.
게다가 발 밑에 방석까지 깔아주니 더 못하겠다.
페리윙클은 맥이 빠졌다는 듯 피식 웃고는 먼저 풀장 쪽으로 걸어갔다.
은근히 책망하는 말투였다.
"내가 대마라도 줘야 하나?"
"그,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 발랄한 성격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계속 우두커니 서 있게? 등대라도 되시려고?"
"저도 들어갈게요."
시우는 페리윙클을 따라 허리 높이의 풀장으로 첨벙 들어갔다.
그래도 슬슬 밤이슬이 차가워지는 시기라 춥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수온은 따뜻했다.
서울 한복판에 온천수를 끌어올렸을 리는 없고 온수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냥 입 다물고 있었다.
하긴 술 한잔에 수백을 태우는데 급탕비가 대수랴.
그렇게 해서 물 안에 함께 들어간 두 사람.
페리윙클이 손가락을 탁 튕기자 로맨스 영화에 어울릴법한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분위기 좋지?"
"안쪽만큼 좋은 것 같습니다. 좋은 곳 구경시켜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긴 한데. 나쁘진 않네."
"넵, 맞습니다."
아주 짤막한 대화 뒤에 어색한 침묵.
근데 이렇게 풀장에 들어와서 뭐하면 되는 거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수영모도 물안경도 없는 게 50M 자유형 시합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어정쩡한 자세로 뻘쭘하게 서 있자니 페리윙클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사포처럼 거칠거칠한 느낌이었다.
"그게 다야?"
"네?"
"더 할 말 없어? 정말로?"
"제가 할 말이라고 해봐야 마땅히 있겠습니까...푸흡!"
갑자기 풀장의 물을 퍼 올려 시우의 얼굴에 물세례를 끼얹은 페리윙클.
"너 진짜 재미없다."
차갑게 변한 목소리가 귓가를 뾰족하게 찌른다.
화를 낸다기보다는 은근히 비웃고 무시하는 느낌이 강했다.
"차를 태워줘도~ 좋은 술을 먹여도~ 멋진 호텔로 데려와 줘도~ 키스를 해도~ 같이 수영장에 들어와도 시큰둥하네. 얼굴도 반반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데리고 좀 놀아줄까 싶었는데. 뭣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윽..."
뾰족한 손톱이 쿡쿡 시우의 맨가슴을 찌른다.
갑자기 돌변한 페리윙클.
시우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것일까?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마녀라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요즘엔 그런 적이 없지만 화내는 상대 앞에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고 억지 미소를 짓는 건 시우의 특기 중 하나였다.
노예 시절에도 무려 5년 가까이 온갖 폭거를 감당하지 않았던가?
시우는 판으로 찍어낸 듯한 미소를 짓고 페리윙클을 마주 보았다.
페리윙클의 말이 허황한 것이든 아니든 확인하고 후환을 없애고 싶은 이상,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다.
"죄송하면 다니?"
죄송하면다니 한 글자를 말할 때마다 쿡쿡 가슴 위로 손톱자국이 늘어간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따끔따끔 아팠다.
"...시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재미없을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 둘 걸 그랬네. 마법까지 써가면서 살려뒀을 필요가 있었을지 모르겠어."
"......."
"아무래도 네가 의욕이 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말을 좀 바꿀게. 저번에 살려준 대가?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내 점괘에 관해서 나에게 도움을 받고 싶으면 즐겁게 해줘."
"어떤 식으로 말인가요?"
그래도 좀 괜찮은 마녀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너무 방심했다.
여태 너무 착하고 순둥순둥한 마녀 옆에서 편하게 지냈었나 보다.
내 팔자가 이렇지 뭐.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한숨을 쉰 시우.
"한 가지 물어보자. 네가 대화를 주도할 능력도 없고 분위기를 띄울 능력도 없는 것 같으니까 좀 막무가내로 할게? 그편이 날 즐겁게 할 확률이 올라갈 거야.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따뜻하게 느껴지던 풀장의 수온이 새삼 차갑게 느껴진다.
페리윙클은 독초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시우를 조목조목 살폈다.
"너 마녀랑 해본 적 있지?"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긴, 전에 네 옆에 있던 에버그린이랑 동거 중이라며. 그때 얼마나 옆에서 날 잡아먹으려고 눈을 부라리던지."
갑자기 사생활을 캐묻는 질문에 시우는 표정 관리를 잊고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그냥 시우만 가지고 노는 것이라면 몰라도 샤론까지 끌고 와 조롱할 생각이라면 과연 앞으로도 잘 넘어갈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
"내가 어려운 질문 했어? 아니면 술이 부족해? 아니면 혹시 바람피우는 것 같아서 대놓고 뻗대는 거니?"
촘촘하게 쳐진 철조망을 얹는 것처럼 쉴새 없이 압박을 가해오는 페리윙클.
좆같은 면접 방식 중에 압박 면접이라는 게 있다고 하는데 그걸 당하면 딱 이런 기분일 것 같다.
"걔는 얼마나 맛있길래 이렇게 뻣뻣하게 구는 거야? 아! 알았다. 딱 보니까 여자애가 기도 세던데 완전히 잡혀 살고 있구나?"
"페리윙클 님, 마음에 들지 않으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잡겠습니다."
시우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시우가 페리윙클에 비해 사회적 배분과 마법적 능력이 훨씬 밀린다고 해도 예전 노예시절처럼 까마득한 격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 마녀로서 게헨나의 시민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티페레트 공작뿐 아니라 제머나이 백작에게도 호의를 사고 있는 시우를 건드리는 것은, 이미 작정하고 엇나간 공적이 아니라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즉, 시우의 지금 행동은 아주 아주 아주 완곡하게 돌려 말한 '적당히 하세요'인 셈이다.
어떤 태도를 보이건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고 부탁을 들어주기로도 약속했다.
사실 굴욕이니 까탈스럽니 해도 이런 투정도 살아있을 때나 부릴 수 있는 것이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계속 허리를 굽히고 스스로를 낮췄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째 꽤 비슷한 상황인 것 같기도 해서 씁쓸한 상념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인제 와서 떠올리는 것도 우습지.
쪽지 하나 꼴랑 남기고 도망치듯 떠난 주제에 아멜리아가 먼저 연락해 올 것이라 생각한 것부터가 도둑놈 심보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쌍둥이를 만나러 게헨나에 방문하게 된다면 한번 만나러 가볼까?
마지막에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하고 나와버렸으니 아예 학을 떼게 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한 건 만나봐야 알겠지.
뭐, 만나주겠다고 한 적도 없지만서도.
심리적 도피 기제의 일종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무튼 다시 불쾌한 현실로 돌아왔다.
잠깐 딴생각을 한 덕에 장작을 뗀 양 욱했던 분노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
"......."
뒤통수 위로 어떤 시선이 쏟아지고 있을까?
시우는 내심 불안하면서도 조용히 페리윙클의 반응을 기다렸다.
"쿡쿡... 아하하!"
별안간 쏟아지는 웃음.
페리윙클은 시우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웃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굴고 있어. 그냥 착한 사람처럼 보이길래 얼마나 착한지 시험해 본 거야. 혹시 기분 많이 나빴니?"
이건 또 뭔 개수작이야 싶어 경계 어린 눈빛으로 페리윙클을 바라보는 시우.
동전 같은 여자다.
시도 때도 없이 위로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이렇게, 뒷면이 나오면 저렇게 하는 것처럼 행동의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다.
"기분 나빴냐고 묻잖아? 책망하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답해 봐."
"썩 좋진 않습니다."
시우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좀 자유분방한 마이페이스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인식은 애진즉 사라진 이후이지만, 어찌됐건 목숨을 빚진 관계 아닌가?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 마녀한테 아랫도리 콱 움켜잡혀 사는 한심한 놈일 줄 알고 실망할 뻔했지 뭐야?"
그래도 이건 꼭 말해야겠다.
"제가 쓴소리를 듣는 것은 상관없지만, 샤론까지 언급하시는 건 듣기 힘드네요. 원하시는 바가 있으면 최대한 부응 할테니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꼴에 자기 여자라고 챙기는거야?"
밑도 끝도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인 페리윙클은 풀장에서 나와 다시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50대 50 확률로 비명횡사할 수 있다', '까딱하면 죽는다'를 연신 되뇌며 이성의 끈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 전에 명함 받아 놓고 연락 안 해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진짜 리액션이 별로라서? 대화 중에 뭔가 말실수한 게 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페리윙클을 따라 침실 쪽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