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1.
대화는 코스 이후 식후주를 몇 번이나 앵콜한 페리윙클이 기분 좋게 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입에 담기 곤란한 부분은 빼버리고, 축약하고 줄였음에도 5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은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배가 부른 상태로 앉아 있기도 뭐하고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는 페리윙클의 말에 느긋하게 밤거리를 걷기로 합의했다.
"재밌네."
제머나이 백작의 호의를 입어 현세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끝으로 장대한 일대기를 마무리 짓자 페리윙클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의 인생사를 귀 기울여 듣는 번거로운 취미는 없지만 그 사람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행기 사고에 연루되어 노예로 잡혀 오고 끝내는 한국으로 돌아온 시우의 여정을 듣는 것은 괜찮은 여흥이었다.
"역시 넌 특별하구나."
"다들 비슷한 말씀 하시는데. 사실 감이 잘 안 옵니다. 저는 그냥 저니까요."
"그건 네가 날 때부터 특별했기 때문일 거야. 원래부터 수학의 귀재였다면서?"
"귀재까지는 아니고요..."
"너무 겸양 떨 거 없어. 어쭙잖은 사람들이 자신을 올려치는 건 볼썽사납지만 지나친 겸양도 답답해서 싫어하는 편이야."
대화의 내용을 총합해 평가를 내리자면 페리윙클의 기준으로 시우는 그다지 재미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여자를 즐겁게 하는 말주변도 없고, 사람이 착한 것은 알겠지만 적당히 나쁜 매력 같은 게 부족하달까?
그렇다고 원래 목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좀 심심하다고 해서 얼굴이 못생겨지는 것도 아니고, 그가 자성 마법과 영체를 지녔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걸어서 도착한 호텔.
'Periwinkle'이라는 로고가 고급스럽게 휘갈겨진 커다란 5성 호텔 앞에서 시우는 멈칫했다.
정신 없이 대화를 나누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원래 목적이 이것이었구나 싶다.
"술이 조금 부족했던 감이 있어서. 들어가서 한 잔 더 하자. 에스코트해 줄래?"
페리윙클의 부드러운 손이 시우의 팔 안쪽을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자세가 되어 호기심 잔뜩 어린 눈길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뭐 진작에 짐작이야 하고 있다만 이렇게까지 노빠꾸일줄은 몰랐는데.
시우는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너 싫다는 거 하지 않을 거야. 가서 둘이 얘기나 더 하자고. 고급술은 다 위쪽에 있으니까."
페리윙클은 뻣뻣하게 굳은 시우를 보고 떨어지기는커녕 한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달라붙어 왔다.
2.
페리윙클 서울.
2개의 대형 연회장과 6개의 레스토랑, 320개의 객실을 포함한 전체 51층 5성급 호텔이다.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듯한 세련된 인테리어.
졸부의 허영이 아닌 귀족의 품위를 느끼게 하는 객실 내 실내 내장은 1년 365일 비수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것으로 유명하다.
1층부터 4층까지 로비를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
5층부터 47층까지 일반 투숙객을 위한 객실이 존재한다면,
최상층인 49, 50, 51층엔 전체를 한 층으로 이어 만들어진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객실이 있다.
페리윙클 호텔의 CEO이자 소유주인 키벨레 페리윙클을 위해 말이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자마자 보이는 정경에 시우는 우뚝 굳어버렸다.
바닥부터 높은 천장까지 총 3층의 층고를 아우르는 유리벽이 정면을 향해 개방되어 명동의 야경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 창 너머에는 수영 시합을 열어도 될 것 같이 넓은 개인 루프탑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조명이 야경에 빛무리 하나를 더하고 있어서.
호텔이라기보다 무슨 우주함대 브릿지에라도 올라선 기분이 들었다.
"와....."
게헨나에 마녀를 겨냥한 고급시설을 돌아다니며 어지간한 화려한 것에는 내성이 생긴 시우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작게 말한 것 같은데 넓은 공간인지라 메아리 같은 것이 생긴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1박을 하려면 돈을 얼마나 내야 할까?
높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3개의 샹들리에는 찬연하게 빛나며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들어와, 신발은 슬리퍼로 갈아신고."
페리윙클은 시우의 반응을 흐뭇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객실 측면에는 손님을 받아도 될 것처럼 잘 꾸며진 모던 바가 있었다.
바텐더는 없지만 아마 평상시에는 있는 거겠지.
시우는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며 페리윙클을 따라갔다.
잘 보니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정돈된 객실 한구석에 짐가방이 몇 개씩이나 쌓여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감상이 어때?"
"별천지 같네요..."
"그렇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디자인한 거야."
게헨나의 최고급 별장을 호텔의 꼭대기로 고스란히 옮긴다면 얼추 이런 느낌 날 것 같다.
페리윙클은 바의 카운터 안쪽 와인셸러에서 와인을 몇 병 골라오더니 담배를 물었다.
그녀가 필터를 빨아들임과 동시에 첨단에서 팟 불똥이 튀며 연기가 피어난다.
"흡연자라면 피워도 괜찮아. 공기 청정 설비도 갖춰놨으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시우는 사양 않고 담배를 물었다.
이런 굉장한 객실에서, 그것도 안에서 담배를 태울 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란히 앉은 채로 담배와 회사원 연봉에 필적할 값비싼 와인을 번갈아 즐기다니.
이런 호화로움이 또 없다.
"앞에 보니 짐가방이 쌓여있던데. 어디 가시나요?"
시우로선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자 분위기 전환 삼아 던진 질문이었다.
"응, 조만간 한국을 뜨려고."
"어디로 가시는데요?"
"어디든, 여기만 아니면 돼. 너도 알잖아? 요즘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
"그렇죠."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수아로부터 들었다.
비겁의 마녀가 무시무시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사실 며칠 전에 점을 봤는데 그다지 좋지 않은 점괘가 나왔어."
"뭔가요?"
"한국에 계속 있으면 한 달 내로 죽는다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나왔다.
와인을 마시려다 우뚝 굳은 시우와는 다르게 페리윙클은 태연하게 제 잔을 비우고 또 한 번 술을 채워 넣었다.
점을 봤다라.
그녀가 말하는 점괘가 대충 길거리에 가판을 펴고 커플의 사주팔자를 논하는 할아버지가 내준 것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 점괘는 20위계의 대마녀 페리윙클이 죽는다는 것.
그만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점을 직접... 보신 건가요?"
"응, 그래서 피해 있으려고. 아마 비겁의 마녀 때문에 난리 통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얼마나 정확한 건가요?"
"나 자신에 한해서는 빗나간 게 드물지. 왜? 너도 봐줄까?"
페리윙클은 빙글 몸을 돌려 턱을 괸 채 유심히 시우를 바라보았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탁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페리윙클.
마치 마술처럼 그녀의 손에는 카드 몇 장이 생겨났다.
"네 운명을 봐줄 수 있어. 술자리 여흥으로는 재밌잖아?"
곧 어마어마한 재앙이 몰려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페리윙클은 남의 얘기를 하듯 물었다.
"어디보자...."
그녀는 12장의 카드를 뒤집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뒤집었다.
크기는 트럼프 카드 정도였지만 안에 그려진 것은 정체불명의 마법식이었다.
따라서 시우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있다.
"어머... 이거 큰일인데?"
"어, 어떻게 된 건가요?"
이제껏 세상만사에 해탈한 듯 초탈한 표정을 짓던 페리윙클의 표정이 바짝 굳는다.
덩달아 긴장한 시우.
페리윙클은 아무 말도 없이 시우를 살피다 슬며시 웃었다.
"키스해주면 알려줄게."
잔뜩 분위기를 잡은 것치고는 김빠지는 행동이었다.
시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든 상황과 장소라는 것이 있는 건데 페리윙클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듯 자유분방하게 행동한다.
분명 매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성격이었으나 쇼킹한 뉴스로 심각해진 시우에게는 아니었다.
"비겁의 마녀에 관련된 건가요?"
"그렇게는 몰라."
"호텔은요? 그냥 내버려 두고 가시는 건가요?"
"무너진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지. 내가 죽으면 말짱 꽝이잖아. 그리고 앞으론 그런 식으로 떠보는 거 금지. 룰 위반이야."
"........."
"결정해? 듣고 싶어?"
어차피 페리윙클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는 처지이다.
그리고 그녀가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낄 정도로 매력적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왠지 떠오르는 샤론의 얼굴.
그녀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마당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바람 비슷한 걸 피우는 것 같아 어딘가 찝찝하다.
"참고로, 꼭 듣는 게 좋을 거야. 널 위해서."
개운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들통난 것인지 페리윙클은 윗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먼저 하는 게 어려우면 내가 할까?"
잠시 고민하던 시우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지는 페리윙클의 얼굴.
새빨간 입술 위로 립슬로스가 빛난다.
키스를 시작하기도 전에 슬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선홍빛의 혀가 달콤함을 자랑하는 듯했다.
"흐음...."
일말의 죄악감을 지닌 채로 시우는 푹신하고 두툼한 입술과 제 입술을 겹쳤다.
그와 동시에 입안으로 순식간에 범람하는 말캉한 혀.
페리윙클 쪽에서 적극적으로 혀를 걸어온 것이다.
와인으로 살짝 차가워져 있는 혀는 향긋한 포도주 향기를 품고 순식간에 체온과 비슷할 정도로 뜨거워졌다.
"흐음... 쮸웁...."
서로 진득한 키스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만큼 페리윙클의 향기가 코안을 깊게 파고든다.
그와 동시에 버튼이라도 눌린 듯이 정욕이 폭발했다.
그녀를 찍어 누르고 범하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힘껏 발기한 물건.
시우는 아득해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은 채 페리윙클을 밀쳐냈다.
페리윙클의 손이 슬금슬금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마 제어하지 못했을듯 싶다.
"벌써 끝이야? 나 아직 만족 못 했는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페리윙클.
시우는 심란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대로 말씀해 주시죠."
"이 정도로는 좀 아쉬운데...."
말꼬리를 흐리던 페리윙클은 시우의 표정이 세상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했다.
"점괘에 따르면 넌 죽을 거야. 조만간."
"네....?"
"팔이 잘려나가서 죽는다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어."
"설마 키스 더 안 했다고 지어내시는 건 아니죠?"
"정말 설마네."
페리윙클은 쿡쿡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없었지만 더 듣고 싶으면 따라오라는 것 같아 시우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뒤를 쫓아 루프탑 풀까지 나왔다.
죽게 될 거라고?
머리를 한대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심지어 페리윙클의 말투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았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시한부를 선고하는 의사처럼 진중한 표정이었더라면 더 신빙성이 생겼을까?
"왜 죽는 건가요? 왜 팔이 잘리는 거고요? 확률은 어느 정도죠?"
"갑자기 수다쟁이가 됐네."
"아니, 조만간 죽을 거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살짝 흥분한 듯한 시우의 반응에 페리윙클은 손을 내저었다.
"내 자신에 대한 점괘가 아니면 정확도는 그다지 높지 않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확률로 따지면 어느 정도인데요?"
"반반?"
"엄청 높은 거 아닙니까?"
죽고 살고가 50% 확률로 왔다 갔다 한다는데 높지 않은 확률이라니.
시우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널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줄 능력이 있어."
극심한 혼란에 빠져가던 중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페리윙클은 재미난다는 듯이 시우를 바라보다가 바짝 붙어섰다.
"궁금해? 도와줄까?"
"....네."
그녀의 손가락이 장난을 치듯이 시우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좋아, 오늘 날 즐겁게 해준다면 도와줄게. 원래도 이틀 동안 나랑 놀아주기로 했으니 나쁜 제안은 아니지?"
사실 페리윙클이 거짓말을 고하는 것인지, 정말로 도와줄 의사와 능력이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말마따나 원래 시우는 오늘 페리윙클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는 기쁨조 역할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도망칠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맞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럼 같이 물놀이나 할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올게."
"저는 수영복이 없는데요?"
"준비해 놨으니까 따라오기만 해."
그렇게 말한 페리윙클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걸음새로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