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41화 (241/917)

#241

1.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

시우는 위치포인트 빌딩 근처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온갖 행정시설이 모여 있는 데다가 하나 같이 거대한 대기업 사옥이 줄줄이 들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서울의 심장이라는 표현이 썩 어색하지 않다.

도로를 달리는 차는 많은데 정작 인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 있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괜찮은 사람들이려나.

야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히고 거대한 빌딩은 도시의 밤을 잊게 했다

대로변의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자니 저 멀리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야?"

"장난감 같이 생겼네."

"야야, 잠만 전화 끊어봐."

"사진 찍자."

고된 하루를 끝내고 길게 줄을 서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도, 지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여자도, 피곤한 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중년남도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생경한 슈퍼카에 시선이 끌리기 시작했다.

리무진처럼 고급스러운 광택을 빛내는 검은 색.

낮은 차체, 보급형 자동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심미적이고 유려한 곡선, 한껏 공기를 빨아들이는 측면부의 흡기구, 길쭉하게 튀어나온 보닛과 말발굽 형태의 그릴.

차에 별로 관심이 없는 시우지만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더럽게 더럽게 더럽게 비싼 차라는 것을 말이다.

평상시 칼치기가 기본인 택시도, 성질 급한 버스도 널찍이 거리 두기를 한 채 오들오들 떨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아...."

중후한 배기음을 흩뿌리며 느긋이 안쪽 차선을 훑어 달리던 하이퍼카는 멋진 불법 유턴과 함께 버스 정류장에서 급정거했다.

그러니까, 괜히 서성거리며 길가에 서 있던 시우의 코앞에서 말이다.

감청색 번호판 옆에는 지역명 대신 '외교'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어디 기름많은 중동 국가에서 놀러온 왕실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할 듯하지만...

어째 알 만하다.

몇몇 마녀는 금전 감각이 이상해질 정도의 부자임을 잠깐 잊고 있었다.

한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지냈던 샤론과 엘로아는 굉장히 검소한 마녀였으니 말이다.

"오랜만이네?"

조수석 쪽 창문이 열리더니 그라데이션 선글라스를 낀 페리윙클이 몸을 기울여 인사한다.

어쩐지 몰디브 해변의 석양이 떠오르는 그린 투 핑크 그라데이션이었다.

이제 보니 선글라스가 아니라 패션용 색안경에 가깝다.

그 외에 옷차림은 조금 밖에 안 보였지만 마치 영화배우 인 것처럼 한껏 꾸미고 있다.

"타."

주변의 시선이 시우에게 쏠렸다.

시선뿐이랴?

저 사람은 뭐야? 아는 사람인가? 호빠 에이스인가? 재벌 3세인가? 부터 시작해서 기타 등등.

속닥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잘 들리는지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부담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후다닥 차 내로 올라탄 시우.

차 문이 닫히자마자 엔진오일 교체 비용만 3000만 원이 들어가는 스포츠카가 유유히 떠났고 그 뒤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만이 남았다.

2.

시우는 생전 처음 타보는 2인승 스포츠카를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분명 밖에서는 꽤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의외로 안은 조용하다.

차 안에서 운치 좋게 흐르는 올드팝을 감상하기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시트와 대시보드는 물론 도어패드까지 소가죽으로 마감되어있다.

사람 가죽을 벗겨 팔아도 이것보다는 쌀 것 같은 고급스러운 소가죽은 엉덩이로 깔고 앉기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듯한 좌석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되어 그다지 넓지 않음에도 누워있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흔히 부모님들이 가르치시길 잘 모르는 사람 차는 함부로 타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멋진 차라면 부모님도 넙쭉 동승할 것 같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몸은 좀 괜찮고?"

"마녀님 덕분에 무탈합니다."

일전 죽을 위기로부터 시우를 구해준 페리윙클.

시우는 대마녀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존재인지는 알고 있다.

본능과 자성마법이 합일(合一)하는 15 위계의 경지.

이 단계부터 마녀는 의도하지 않은 이상 자신의 마력에 의해 자상을 입지 않는다.

생존과 삶을 영위하는 것인 인간의 본성인 만큼 체내의 마력이 자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위협에 대해 '자율방어'가 발동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로부터 무려 다섯 계단을 뛰어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20 위계.

이 시점부터 마녀의 자성마법은 세상에 흐르는 순리와 묘리를 비튼다.

자연법칙과 물리법칙, 현실 세계의 당위성마저 무시하는 대마녀로 인정받는 것이다.

노예 시절부터 숱하게 많은 대마녀를 접해왔던 시우지만 지금처럼 긴장이 되는 일은 오랜만이다.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지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려나.

"왜 이렇게 긴장했어. 좀 들떠도 되는데. 차 별로 안 좋아하니?"

신호등 한 번 안 걸리고 유유히 운전하던 페리윙클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안경 렌즈 너머로 은근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아뇨 좋아합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해서. 이런 차 타게 될 일 평생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치? 한국에는 3대 밖에 없대. 호텔 세워줘서 고맙다고 정부에서 선물로 받았어."

어쩐지 번호판이 조금 남다르더라니...

한국이 무슨 찢어지게 가난한 3세계 국가도 아니고 호텔 하나 세워줬다고 수십억은 족히 나갈 법한 차를 떡하니 줬을 리는 없다.

아마 마녀가 서울에 호텔을 세웠다=>관리를 위해 한국에 자주, 오래 머문다 =>겸사겸사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사냥해주니 이김에 선물 공세로 여기에 묶어두자...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지.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멋지네요."

시우에 대답에 페리윙클은 소리를 내 웃었다.

의아하게 쳐다보자 조수석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아직도 긴장해서 어리버리하네."

"아, 늦었지만 그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 맞아, 그 아가씨는 어때? 에버그린 양이던가?"

"의식을 잃고 있긴 한데 위험한 건 아니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것도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해요."

"됐어, 공짜로 해준 것도 아닌데."

마지막 말을 끝으로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실 시우가 마냥 편하게 차내를 감상하지 못하는 것도 저 맥락에서였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두 명분의 목숨 빚을 그녀는 과연 어떻게 받아내려는 걸까?

괜히 찝찝해하면서 가슴앓이할 바에는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볼까 고민하던 차에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명동에 간판도 없이 운영하는 한 파인다이닝이었다.

"배가 안 고프다고는 했는데 모처럼 예약했거든. 이대로 가는 것도 아쉽고 같이 한 끼 어때?"

"제가 거절할 입장은 아니죠."

"좋은 대답이야."

차에서 내린 페리윙클은 발렛파킹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키를 던지더니 유유히 앞장서 걸어갔다.

꽉꽉 채워 넣으면 100석까지도 들어갈 것 같은 레스토랑.

예전 시우가 살던 축사처럼 넓고 높은 천장을 지닌 레스토랑에는 하얀 천이 덮인 테이블 하나만 외로운 섬처럼 떠 있었다.

"가자."

당연하다는 듯이 종업원에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페리윙클은 식전주를 주문하고는 목에 냅킨을 둘렀다.

"전세 내신 건가요?"

"시끌벅적한 것도 끌릴 때가 있긴한데, 오늘은 아니네. 이름이 시우였던가? 시우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와인잔을 들어 맞대자 페리윙클은 피식 웃으며 기품 있게 와인을 들이켰다.

시우도 와인을 마시며 힐끗 마주 앉은 페리윙클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바로 옆에 앉았던데다가 마땅히 관찰할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은 꽤 여유롭게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시 마녀답게 경국지색의 외모다.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어두운 군청색 머리를 자연스럽게 올려묶었는데도 위화감이 없다.

그만큼 어울리기 때문이다.

육감적인 몸매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 원피스는 단추가 두어 개 풀려 샤론 못지않은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었고, 만개한 장밋빛의 입술이 포도주보다도 붉게 빛나며 한 스푼의 관능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스럽게 찍힌 눈물점은 어지간한 남자라면 단박에 포로로 사로잡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타고난 색기를 갈고 닦고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아는 여자만이 풍길 수 있는 분위기였다.

"더 빤히 봐도 되는데? 닳는 것도 아니고."

틀림없이 눈을 감고 와인을 음미하던 페리윙클은 어떻게 알았는지 시우에게 넌지시 웃음을 흘렸다.

설마 들키리라고는 생각 못 해 당황한 시우.

"정말 보고 있었구나?"

이어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웃는 페리윙클의 모습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리윙클은 상당한 허당인 샤론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빈틈투성이인 티페레트 공작님과 완전히 다른 타입의 마녀였다.

불여우 같다는 의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날 제게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셨죠."

"그랬었지, 익사한 마녀를 죽여주는 대가로 말이야."

"그 내용이 무엇인지 먼저 들을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은 일이야."

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부탁을 100개 들어줘."

그건 좀 양아치 같은데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것을 간신히 되삼켰다.

이 유치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던 찰나 페리윙클은 또다시 피식 웃으며 두 번째 잔을 비웠다.

"농담이 하나도 안 통하네. 왜 이렇게 진지해? 그리고 말 좀 편하게 해.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편하게 하라고 해서 그게 자연스럽게 된다면 고생할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페리윙클은 손끝을 매만지며 '그럼 뭘 부탁할까?'라고 중얼거렸다.

마치 시우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듯이 말이다.

"아! 이게 좋겠네. 앞으로 평생 날 따라다니도록 해."

"네....?"

"여행도 따라다니고, 오늘처럼 드라이브도 같이하고, 가끔 밥도 먹고 어때?"

시우는 가까스로 그 의도를 읽어냈다.

사실 접선소에서 들었던 제안을 듣고 이미 무엇을 부탁할지 예상했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애완동물처럼 옆에 붙어 있어 줄 남총을 원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부탁은 들어주기 곤란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건 힘들 것 같아요.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래? 그럼 하루, 아니 이틀 정도만 나랑 놀자."

손바닥 뒤집듯이 확 낮아지는 허들.

평생에서 하루 이틀이라.

정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말하는 듯하여 어디부터 진심이고 어디부터 농담인지 알 수도 없었다.

"대답은?"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죠."

"그리고 하나 더 애인처럼 자연스럽게 좀 해줘. 난 딱딱하고 재미없는 건 못 견딘단 말이야. 버릇없다고 뭐라 하지 않을게."

"그것도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럼 우선 네 얘기를 들려주련? 남자인데 어떻게 마녀가 되었는지. 당사자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들어보고 싶거든."

잠깐 고민됐지만 때마침 나온 아뮤즈 부쉬와 함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