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40화 (240/917)

#240

1.

사고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이면결계를 펼치고 진행된 엘로아와의 수련 이후.

시우는 쓰라린 몸을 어루만졌다.

수련의 내용은 평소와 다름없이 1대1 대련.

하지만 시우의 요청으로 그 양상에 변화가 생겼다.

'만병지왕의 계약'은 그 이름처럼 무구를 손에 들었을 때 효과가 극대화되는 자성마법이다.

맨손 격투를 바탕으로 '몸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연습과 마력을 활용해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이제는 검과 창 그리고 방패를 활용한 실전 대련을 위주로 훈련하는 것이다.

맨몸으로 대련하는 거랑 무슨 큰 차이가 있나 싶겠지만 우선 격렬함부터 차원이 다르다.

자율방어가 존재하지 않는 시우를 위해 손대중을 했던 티페레트는 시우가 갑옷을 걸치자마자 갑옷을 박살 내고 몸에 멍이 들 정도의 타격을 가해왔다.

지난번보다 훨씬 손대중을 줄이고 진지하게 대련에 응하는 것이다.

"와... 미친...."

대련 이후 샤워를 끝낸 시우는 거울 앞에 섰다.

붓기가 가라앉고 있는 뺨과 울긋불긋 몸에 난 빨간 자국들이 오늘 하루의 격렬함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마저도 엘로아가 가벼운 치유 마술을 걸어준 것으로 원래는 커다랗고 새파란 멍이 상체를 도배하고 있었고 뺨 안쪽도 터져서 피가 줄줄 흘렀었다.

"내가 부탁한 거긴 한데... 빡세네."

12시간 가까이 길었던 수련 시간도 4시간으로 대폭 짧아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짧고 굵어진 것이지만.

사실 이마저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이 되지 않는 운동량이긴 하다.

그림자의 갑옷은 충격량을 늘리기 위해 100kg이 훌쩍 넘어가는 중량이 부여된 상태고 가볍게 붕붕 휘두르는 창, 검, 방패는 제각기 30kg 이상 나간다.

비단 무게 탓이 아니더라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선수도 옥타곤 안에 들어가 풀라운드를 뛰면 녹초가 되니, 4시간 연속 쉬는 시간 없이 대련 가능한 이유는 영체의 내구도와 마법의 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시우는 거울 속 몸을 보았다.

노예 시절에도 노동으로 단련된 잔근육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영체화된 지금은 그때보다 완벽한 몸을 지니고 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새삼 자신이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섰음을 깨닫는다.

여기저기서 픽픽 맞고 돌아다니는 동네북 신세라지만 나쁜 맘을 먹고 깽판을 친다면 평범한 인간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전쟁병기가 될 것이다.

일반적인 총화기는 갑옷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고 전차에서 쏘아지는 주포조차 방패를 들어 막아낼 수 있다.

아마 그림자의 창을 던지면 중장갑도 꿰뚫을 수 있고 항공 전력 따위도 수 킬로미터씩 늘어나는 리본을 활용해 격추할 수 있겠지.

그러다가 위험해지면 좌표이동으로 도망치고... 뭐, 토마호크 미사일 정도면 조금 위기가 될까?

하지만 그마저도 작정하고 막으려면 막을 수 있다는 것이 마녀의 무서운 점이다.

"아이언맨이랑 맞다이 치면 이길 수 있나?"

으레 남자들이 혼자 있으면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거듭하던 시우는 팬티만 입은 채 젖은 머리를 털털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근데 옷을 좀 챙겨 입고 나올 걸 그랬다.

대련이 끝난 뒤 볼일이 있다며 떠났던 엘로아가 벌써 돌아와 거실에 앉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말이다.

"........"

엘로아는 차를 마시던 자세 그대로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우뚝 굳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찻잔을 첫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한다.

부푼 커튼처럼 숱이 많은 연분홍빛 머리칼, 그 사이를 투과한 햇살 한 꼬집이 뺨에 내려앉았기 때문일까?

엘로아의 볼은 그녀의 머리칼처럼 연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던 것처럼 동요를 갈무리한 엘로아는 평소의 엄하고도 인자한, 절제된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좀 어떠한가? 오늘 내가 너무 심했던 건 아닌가 싶어 돌아왔네만."

"보시다시피 쌩쌩합니다. 오늘도 옷자락 한번 못 스쳤던 게 분하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피도 흘렀지 않나?"

"제가 부탁드린 건데요. 치료해주신 덕분에 벌써 다 나았죠."

어깨를 털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엘로아는 시우에게 아주 작은 타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공격은 사전에 차단당하고 가로막힌다.

미세한 빈틈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치고 들어온다.

마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과 싸운 기분이었다.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네. 그러나 하루아침에 과욕을 부리다간 망치기 십상이지.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게나. 수련에 쏟은 시간만 본다면 그대는 남다르게 성장하고 있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엘로아.

수련에서는 얄짤없는 그녀이지만 이렇듯 끝나고 나면 시우가 낙담하지 않게끔 희망찬 덕담과 설교를 해주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시선을 딴 곳을 향하는 것 같았다.

마치 시우를 시선에 담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

시우는 재빨리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았던 옷을 입었다.

그제야 엘로아는 시우 쪽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티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시치미를 뚝 뗀 표정이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그런데... 여쭤도 될까요?"

"그러게."

시우는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오늘 대련해주실 때, 어느 정도로 힘을 조절하시는 건가요?"

"힘조절? 흐음...."

엘로아는 고민에 잠겼다.

"쉽게 답변할 이야기는 아니군.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조절이라고 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대답인지라."

그렇게 조금 더 고민하더니 입을 연다.

"대략 5푼 정도의 힘을 사용하는 것 같네."

5%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그래도 10% 정도는 되지 않을지 사알짝 기대를 해봤는데.

역시 23이라는 위계는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경외심이 느껴져 실망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마법적인 요소까지 포함한 것이니 단순한 체술과 검술을 놓고 봐야겠군. 흐음... 마법을 제외한다면 5할 정도는 되는 것 같네."

"네? 그 정도나요?"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랐다.

단순히 기술만을 놓고 보자면 엘로아의 절반까지는 따라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대에게 내재한 계약의 힘은 강력하다네. 지금 당장 그대가 마법 없이 맨몸으로 무기를 다룬다면 지구상에 대적할 인간이 없을 것이야. 수백 년의 세월과 전투 경험을 농축해 놓은 것이니 말일세."

"그런 거군요..."

"그러니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좋다네."

엘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우의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머뭇머뭇하더니 결심한 듯 손을 위로 쭉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두 사람의 키 차이 때문에 엘로아가 살짝 까치발을 들고 시우가 허리를 조금 숙이는 웃긴 그림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훈훈한 분위기였다.

"가만히 있어 보게나."

사락사락 머리카락을 좌우로 쓸던 엘로아의 눈이 은은한 반사광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한 탓에 안대를 벗고있던 시우의 눈에 복잡한 도형을 그리며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마법식이 들어온다.

마법식은 8자 모양의 고리를 만들어 수백 개씩 엮이더니 사슬의 형태를 취했다.

각 사슬 더미의 끝자락이 시우와 엘로아의 가슴으로 제각기 뻗었다.

"계약한다."

엘로아가 작게 읊조리자 몸이 징징 울리는 감촉과 함께 손등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손등 위를 바라보자 모래시계를 기하학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문양이 생겨있었다.

"이게 뭔가요?"

"그대와 간단한 계약을 맺었네. 그대가 위험에 처하면 일시적으로 방어마법이 작동케끔 해두었어. 또 내게 즉각 위치를 알리는 계약일세."

엘로아의 마법은 언령을 사용한 '계약마법'.

이처럼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한다.

계약을 통해 거짓말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신체를 직접 강화할 수도 있고, 특정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가능케하는 12개의 계약 횟수 중 하나를 시우에게 사용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진짜 든든하네요."

"어떤 위기에 처하던 1분만 버티면 내가 구하러 갈 테니 당분간 걱정하지 말게나."

엘로아는 시우의 머리를 마저 쓰다듬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어디 가시나요?"

"비겁의 마녀를 찾아야지. 이 근방에 있는 것은 확실한 듯하니 찾아내어 대가를 물을 걸세."

굳은 다짐과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엘로아의 말투에 전혀 상관없는 시우가 뜨끔할 정도였다.

솔직히 비겁의 마녀가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도 그녀 옆이라면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따 봅세."

전용엘리베이터로 등을 돌린 엘로아를 시우가 불렀다.

"스승님."

스승님이라고 부르자마자 엘로아는 우뚝 멈춰섰다.

고운 머리카락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귀가 쫑긋 서는 듯 보였다.

스리슬쩍 뒤를 돌아보며 시우를 바라보는 엘로아.

기쁨을 잔뜩 머금은 두 뺨이 미소를 참는 듯 빵빵하게 부풀어있다.

"불렀느냐?"

사실 요즘 티페레트는 스승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런 반응을 보인다.

조금 불경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항상 귀엽다고 생각 중이다.

엄격한 목소리와 절제된 태도와는 다르게 키도 작고 애교 있는 생김새니 저 반응을 보기 위해 공연히 이렇게 불러보기도 했다.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리액션에 감탄하며 원래 용건을 말했다.

"다음에 저랑 옷 사러 가지 않으실래요?"

"옷을... 말인가?"

그녀의 패션 패턴은 두 가지이다.

레깅스처럼 찰싹 달라붙어 배꼽 위까지 올라오는 트레이닝 바지+스포츠 브라+바람막이.

혹은 아무런 장식 없이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

원체 예쁜 엘로아라 그렇게 흉해 보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모처럼 예쁜데 꾸미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근처에 백화점도 있으니 잘됐네요. 시간만 내주시죠. 제가 사드릴게요."

"갑자기 왜 그러는겐가? 혹시 내 옷이 이상한 편인가?"

향수를 선물 받고 '내 몸에서 냄새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난처해하는 엘로아.

"그런 건 아니고요. 쇼핑 좋잖아요? 계절도 바뀌었으니까요."

"음, 우선은 알겠네. 일정을 비워두도록 하지."

엘로아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조금 전보다 훨씬 들뜬 걸음걸이로 총총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궁궐처럼 넓은 펜트하우스에 샤론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침대 근처로 가자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히 잠든 샤론이 보였다.

마치 인형 같다.

아마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거겠지.

여느 때처럼 이마를 한번 쓸어준 뒤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동안 마음도 심란하고 수련에 집중하고 싶어 미뤄두었던 빚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만나봐야겠지.

휴대폰 번호와 이름만 꼴랑 적힌 명함을 보며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수신음이 채 한번 울리기도 전에 곧장 전화를 받은 페리윙클.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너무 늦은 것 아니야?]

뒤이어 여유롭고 나긋한 목소리로 책망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생각할 게 많아서요."

[됐어, 혼내려던 것도 아니고. 오늘 만나자]

"그런데, 제가 들어 들어야 할 부탁이라는 게 뭔가요?"

[만나서 얘기할 게 위치포인트로 가면 되나?]

"네, 부탁드릴게요."

[마침 근처라 바로 갈 테니까 나와]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뭐랄까, 일단 목숨을 구해준 입장인데도 엄청 거들먹거리는 느낌도 없고 뭔가 대단한 걸 요구하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시우의 바람이 반영된 생각일 뿐 실제로는 꽤 까다롭고 거창한 걸 요구할 자격이 있는 페리윙클이다.

일단 목숨을 구원받은 것도 사실이고 마녀 사회에서 은원의 맺고 끊음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듯하니 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영생도 살고 설령 죽더라도 마녀명과 낙인이 계승되기 때문이려나?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시우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채 페리윙클은 맞이하기 위해 빌딩 앞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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