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1.
"말씀으로 전해 들었던 것보다 훨씬 인물이 훤칠하시옵니다."
수아는 그렇게 말하며 시우의 잔에 차를 따랐다.
다도니 뭐니 어려운 예법 같은 건 배운 적도 없지만 대단히 격식을 차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귀족의 예법을 배운 쌍둥이가 가끔 겉치레로 보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까?
고풍스러운 극존대와 한복의 조화가 더해지자 소파에 마주 앉아있어도 되나? 무릎 꿇고 잔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같은 생각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
"저, 그렇게 말씀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수 없지요. 일전의 습격 사건에서 귀공의 용단이 없었더라면 두어 배는 커다란 재앙이 일어났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옵니다. 본래 서울의 평안을 지키는 것이 소녀의 소임인바 어찌 가벼이 대할 수 있겠사옵니까?"
수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 저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조금 만만해 보이기 마련인데.
이 한복 마녀 아가씨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을 의인화한 것 같은 사람이었다.
"허나 귀공께서 불편해하시는 듯하니.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될까요? 예법이란 결국 상대를 배려하기 위함인 것이니까요."
"아, 넵.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아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극존대에서 존대 정도로 말투를 바꿨다.
조심스럽게 차를 홀짝이며 대답하는 시우.
"우선,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과 나누실 대화가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감사를 표하고 싶기도 했고 작금의 상황과 에버그린 양의 상태 역시 듣고 싶으셨으리라 사료되는데요."
그러고 보니 샤론의 치유를 담당하는 것은 수아라고 엘로아에게 전해 들었다.
시우는 엘로아를 믿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또한 믿었지만 담당 의사에게 직접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도 하다.
"그럼 샤론의 상태에 대해서 먼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러시리라고 생각했어요."
예상했다는 듯이 눈을 감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아.
이후에 이것저것 마법적인 지식을 늘어놓으며 설명을 해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우는 회복마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
애초에 정식 견습마녀 코스를 밟은 것이 아닌 야매 마녀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워낙에 꼼꼼히 설명을 해주었던 지라 어떤 상태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몸은 회복되었는데 정신적인 문제가 남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의식을 되찾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이죠. 일종의 자폐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두려움과 공포에 깨어나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으오니."
큰일 난 것 아닌가?
몸에 난 상처는 나으면 그만이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는 평생 간다는 말도 있다.
자폐라는 단어 자체가 지닌 무게감도 상당하고 말이다.
딱딱해지는 시우의 표정을 보며 수아는 달래듯 말했다.
"너무 염려 마세요. 아무리 길어도 이주 안에는 반드시 눈을 뜰 테니까요."
"이주나.... 후유증 같은 것은 없을까요?"
"자율방어가 온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면 심각한 후유증은 없을 거라고 예측됩니다. 결국엔 그녀의 목을 파고든 독도 '마법'의 일환이니 말입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
슬쩍 옆을 보니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누워있는 샤론이 보인다.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 가녀린 등 뒤를 꿰뚫었던 작살의 뾰족한 날 끝이 생각나 목이 탔다.
동시에 붉은 송곳 같은 증오가 심장 한구석에서 툭 삐져나왔다.
당연히 원흉 비겁의 마녀에 대한 증오이다.
시우는 얼굴에 식은땀을 한번 훔쳐내고 차를 마셨다.
그때 퍼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 순간 거래를 제안하며 샤론과 시우를 구해준 마녀.
키벨레 페리윙클.
경황이 없어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던 것이 기억났다.
이 중요한 걸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니 오죽 정신이 없었다는 것을 재지각했다.
"다른 것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혹시 잠시 서울을 떠나 있으실 생각 없으신지요?"
"네?"
"연이은 사건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시피 서울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비겁의 마녀가 일으킨 사고들이 점층적으로 위협의 강도를 높혀가고 있지요. 이곳에 계속 머무르시다간 어젯밤보다 더한 위험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진 수아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이 비겁의 마녀의 소행이라고 한다.
분열하는 호문쿨루스를 만들었던 것도, 코엑스를 습격했던 범인도, 백기사를 만들어낸 자도 모두 한 사람의 소행.
더군다나 어젯밤 네 명의 마녀가 일순간 목숨을 잃었다는 것까지 전해 듣자 심각성이 피부로 와닿았다.
마녀가 어떤 존재인가?
시우가 기억하는 마녀는 어지간한 위험에서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올 수 있는 초월자이다.
그런 마녀가 넷이나 단숨에 죽어버렸다니.
어제 살아남은 것이 정말로 요행에 지나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제머나이 백작님의 요구로 발부된 통행증과 시민권을 재발급해 놓았습니다. 백작께도 연락을 취해두었으니 환난이 지나가실 때까지 게헨나에서 지내시는 것도 상책인 듯 합니다."
위험에서 벗어나 몸을 피해있다라...
지당한 말이었다.
충분히 강하다고 자부했던 자신의 능력은 미숙했고 그에 비해 사건의 스케일은 너무 거대하다.
이대로 피하는 것이, 도망치는 것이 옳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내려졌다.
그러나 시우는 이미 한번 도망친 뒤이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렸다.
강해지겠다 엘로아에게 다짐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도망'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골머리 앓을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 샤론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와 함께 게헨나로 돌아갈 순 없나요?"
"가장 안전한 것은 게헨나로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에버그린 양은 추방자 신분이고 게다가 몇몇 마녀의 원한까지 사고 있어서요. 아마 지금 당장 면책권 및 시민권 심사에 들어간다 해도 기일을 맞추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잠깐 현세의 다른 곳으로 피해있는 건 어떨까요?"
"국외로 빼돌리는 것도 방법의 하나이나 의식이 없는 채로 현세에서 떠도는 것 역시 위험하지요."
게헨나도 안된다.
국외도 안된다.
암울한 대답에 우울해지려는 차에 반가운 답변이 들려왔다.
"따라서 제가 신병을 맡을 예정입니다."
그 대답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수아 아가사라는 마녀가 어느 정도의 위계를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위치포인트의 지부장이다.
어중간한 공적은 아마 상대도 못 하는 대마녀가 아닐까?
"게헨나로 피신해 있는 건은... 죄송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샤론이 여기 있는데 저만 혼자 갈 수는 없어요."
수아는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슬쩍 끄덕일 뿐이다.
"그럼 추가로 더 묻고 싶은 것은 없나요?"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는 일전의 사건 때문이신가요?"
이면결계도 없이 작동된 다곤의 피리가 코엑스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았던 사건.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시우가 재빠르게 피라냐를 처치하고 피리를 파괴하며 민간인 피해가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
"그것도 있지요."
샤론의 설명에 따르면 '공증'은 기본적으로 마녀명을 걸기에 결코 가벼운 약속이 아니라고 한다.
가령 시우의 신분을 공증한다는 것은 시우의 후견인이 됨과 동시에 '이 인물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하던 같은 책임을 떠맡겠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럴 일은 별로 없겠으나 시우가 견습마녀를 죽이거나 하면 모두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고맙다고는 해도 말 한마디도 나눈 적 없는 상대가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시우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녀에게 생명보다 소중한 게 무엇인지... 귀공은 알고 계시는지요?"
수아의 답변은 다소 엉뚱했다.
"낙인...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마녀에게 낙인이란 대를 걸쳐 이어진 유산. 선대와 선대의 선대까지 이르러 모든 생명과 업을 통틀어 빚어진 보물이지요.
마법의 발전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내던지는 것 또한 이 때문이에요.
낙인과 함께 물려받은 마녀명에는 사명과 이루지 못한 소명이 담겨 있으니까요."
그거라면 알고 있다.
마녀라는 족속이 마법을 위해 긴 세월에 걸친 집단자살을 당연시한다는 것을.
"그만큼 낙인 속의 자성마법이 마녀에게 지니는 의미는 깊어요. 그리고 귀공께선 공작님의 제자 라피의 마법을 지니고 있죠."
수아는 비어있는 시우의 빈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날의 비극 이후, 공작께서 다른 이에게 이토록 마음을 붙이는 것을 처음 보아요. 누군가를 가르치시는 것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제게 해주시는 것도, 복수나 후회가 아닌 다른 감정을 느끼시는 것도... 귀공이 처음이에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겪고 괴로워하던 티페레트가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인물.
그것이 시우라는 의미였다.
엘로아가 시우와 라피를 겹쳐보고 있다는 것은 시우도 이미 짐작하던 바이다.
"공작님은 여리신 분이에요. 일당천을 능히 감당하는 강한 분이시지만 마음은... 지쳐 계세요."
수아가 공증을 서 준 이유도 이것이었다.
복수의 굴레에서 원치 않게 튕겨 나간 티페레트가 삶의 목적을 되찾게 하는 것.
그 단초를 시우에게서 발견했으니까.
"주제넘은 부탁일지도 모릅니다만... 부디 공작님을 잘 보필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다고...."
"하실 수 있어요. 이미 하고 계신걸요."
수아는 일전 즐거운 듯이 시우에 대해 이야기하던 엘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 것도, 시우에게 몸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그 성취가 남다르다는 것도.
자랑하듯이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보며 수아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따라서 시우에게도 큰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더불어 공작께서 믿으시는 사람이라면 제가 믿지 못할 것이 없지요. 사람을 보는 눈은 예전부터 누구보다 뛰어나신 분이었으니. 분명 귀공도 호인이시겠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시우는 괜히 머쓱해져 코끝을 매만졌다.
"수아 선생?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인가?"
그때 잠깐 밖으로 외출했던 엘로아가 돌아왔다.
엘로아가 고개를 갸우뚱한 탓에 말총처럼 묶은 분홍머리가 흔들린다.
"에버그린 양의 회복상태를 점검할 겸.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사옵니다."
"그런가? 아직 시우 군의 체력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닐 테니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진 말아 주게나."
"안 그래도 대화가 끝난 참이었사옵니다."
수아의 말을 듣고 엘로아를 보니 새삼 그녀가 다르게 보인다.
무시무시한 무위와 마법, 공작이라는 작위 탓에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던 엘로아였는데.
그저 기댈 곳이 필요했던, 시우와 똑같은 약한 사람이었다.
"스승님, 전 괜찮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시우는 스승님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전까지는 괜히 상처를 후벼 파는 게 아닌가, 주제넘은 참견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주저했던 호칭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행동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몸은 이제 괜찮으니 수련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시우의 부름에 엘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가 자신을 그리 부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혹시 너무 나가버렸나 싶어 조마조마하던 사이 자홍빛 보석을 품은 눈이 예쁜 호를 그리며 휘었다.
"그러세나.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게."
엘로아는 만개한 벚꽃처럼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