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1.
수아 선생의 호의로 위치포인트가 있는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를 빌릴 수 있었다.
본래는 지부장이 거주할 수 있게끔 마련된 곳인데 수아는 어차피 자신의 집무실에서만 시간을 보내니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며 기꺼이 카드키를 내어주었다.
벽면을 통째로 채운 커다란 유리창으로는 평소 같이 기분 좋은 햇살이 쏟아졌다.
숙면 중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좋은 광도는 아닐 텐데.
침대 위에 곤히 누워 있는 시우도 그 옆의 샤론도 새근새근 자고 있다.
엘로아는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자식을 병간호하는 어머니 같기도, 기도하는 성직자 같기도 하다.
"........"
엘로아는 말없이 시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푸석푸석해졌다고 할 정도로 피부 결이 상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핼쑥한 얼굴과 퀭하게 들어간 눈구덩이만 보아도 지난밤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만약 이번에도 잃었더라면.
전과 똑같이, 속수무책으로, 손을 쓸 새도 없이 똑같은 경험을 했다면.
자신은 이렇게 있을 수 있었을까?
이기적인 감정이라도, 다소 철없는 안도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시우가 큰 상처 없이 다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고, 고맙다.
엘로아는 시우의 손을 꽉 쥐고 눈물을 꾹 참았다.
여기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껏 울어버릴 자격 따위 엘로아에겐 없다.
시우의 스승이라도 된 양 멋대로 유대감을 품었으면서, 지켜주겠다고 말해놓고 허술한 대책으로 위기에 빠지게 했다.
샤론은 이미 큰 부상을 입었고, 페리윙클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
무슨 낯짝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겠는가?
"으음...."
그때 엘로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려있던 시우의 손이 움찔 움직인다.
그는 악몽이라도 꾸다 일어난 것처럼 눈을 잔뜩 찌푸리더니 느릿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시선을 옆으로 돌려 엘로아와 눈을 마주쳤다.
"....공작님?"
"정신이 들었는가?"
마냥 편치 못한 미소로 그의 귀환을 반겨주는 엘로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천천히 반추하던 시우의 몸이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덜커덩 격하게 흔들렸다.
쓰러지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
허리까지 차오른 검고 차가운 해수.
샤론의 몸을 관통하는 녹슨 작살.
그리고 천천히 쓰러지는 샤론과 자신의 무력함.
그 모든 것이 역재생한 것처럼 튀어 오른 것이다.
"지금...!"
"진정하게, 진정해.. 이리오렴."
"고, 공작님 지금.. 샤론은 어디에...?"
익사한 마녀.
소치틀이 백년 넘게 우려먹은 강대한 괴물이니 그에 대한 분석은 이미 완료되어 있다.
수많은 공적을 사냥하고 추격해온 엘로아도 그 호문쿨루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익사한 마녀는 적대하는 대상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물리적으로 강한 인간이라 해서 그 속내까지 강인한 것은 아니다.
마땅한 대처 없이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겨 버리는 상대와 싸웠더라면 아마 제정신이 아니겠지.
한계 이상의 스트레스가 머리를 들끓게 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저 팔을 뻗어 시우를 안아주었다.
학질 환자처럼 벌벌 떨던 시우의 몸.
그 진동이 하나하나 전달된다.
"샤론 양은... 우선 괜찮네. 육체적인 상처는 전부 수복되었고 남은 건 파고든 독을 천천히 제독하면 될 일이야. 자, 저기 보게."
공포로 축소된 동공과 거친 숨소리.
테러 현장의 생존자처럼 격하게 반응하던 시우도 조금씩 잠잠해졌다.
엘로아는 시우를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꽉 끌어안은 상태로 등을 토닥였다.
"옳지, 좀 괜찮나?"
"가, 감사합니다. 먼저, 먼저 샤론의 상태를 좀 확인하고 싶어요."
"그러게나."
물론 엘로아가 안아주는 정도로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고 끔찍한 악몽 도중 막 일어난 것처럼 어딘가 붕 뜬 동작을 보였다.
바로 옆에 새근새근 자고 있는 샤론의 모습을 보자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그 얼굴에 내비친 그림자에는 안도, 그리고...엘로아에게도 무척 익숙한 것 또 다른 감정이 섞여 있다.
자기혐오와 죄책감.
질병같이 마음을 좀 먹는 감정을 엘로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파릇한 나무를 좀먹는 병충해처럼 효과적이고 확실하게 인간을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도.
"시우 그대는...."
따라서 엘로아는 서툴게나마 위로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후회가 절절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끼어든다.
"...아무것도 못했어요."
"......."
"왜 그랬을까요."
영화나 만화에서 보면 위기의 순간 주인공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아낌 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다.
현실 세계에서도 수많은 미담이 존재한다.
사실 시우도 지금껏 꽤 많은 횟수를 남을 위해 목숨을 걸어왔다.
작게는 보더 타운의 노예와 마도구 상점의 사기꾼 또 푸른뱀 접선소의 사장이던 라리사.
좀 더 크게는 오딜 오데트와 샤론, 그리고 아멜리아를 위해서.
가진 건 쥐뿔도 없었고 분수의 맞지 않은 행동이었던 적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어린아이 같은 정의감일지라도 그 순간에는 이것저것 계산하려 들지 않았다.
비록 영웅은 될 수 없을지라도.
조금은 용기 있는 인간이 되자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뼈저리게 느껴지던 무력함.
손쓸 새도 없이 잃을 뻔했던 위기 속에 샤론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할 수 있던 것은,
병신마냥 덜덜 떨고 있던 것이 전부다.
"두려움에 떨면서 주저앉아있는 게 고작이었어요. 그렇게 많은 걸 공작님께 배웠는데... 단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어요."
시우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칼날을 돌리고 짓씹듯이 말했다.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용기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전부 만용에 불과했던 것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은 독사처럼 변해 심장을 한 바퀴 휘감는다.
"시우."
엘로아는 그런 시우에게 익사한 마녀의 마법은 어쩌니, 자네의 수준으로는 대적할 수 없었느니 어쩌니...
이런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답변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시우가 지금 품고 있는 의문은 엘로아가 매일 밤 몸부림치며 되새겨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엘로아는 다시 한번 시우를 꼭 안아주었다.
자상한 목소리로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 위해서.
"내가 견습마녀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네."
"그 아이의 이름은 라피였단다.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주 기특한 아이였네."
"........"
"그 아이를 가슴에 묻었을 때. 내가 어땠는지 짐작이 가나?"
라피를 잃은 이래로 남의 앞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시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준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언제나 꿈속에서 보았던 과거의 기억이 선현이 떠오른다.
사철을 삼킨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는 마음과 목소리.
그러나 엘로아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과거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아이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이틀간 울었네. 꼴사납고, 한심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어. 그때 곧장 물병자리의 마녀를 추적했다면 복수라도 이뤘을지 모르지. 허나 나는 그러지 못했네.
이후로는 심장이 도려져 나가는 것 같았지.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네.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찾지 못했네. 오직 육체만이 살아남은 망자가 된 것처럼 괴롭지.
왜냐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 매 순간 깨달아야 했으니."
엘로아는 잠시 시우를 떼어놓고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그토록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야. 그 자리에서 당장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여 너무 자책할 것 없네."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바짝 닿은 그녀의 눈빛은 포근함으로 가득해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진심어린 위로였다.
"게다가... 자네는 나와 다르지 않나? 비록 에버그린 양이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네. 얼마든지 수정하고 바로잡을 기회가 있는 게야.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게 할 능력 또한 존재한다네. 그대에게는 빛나는 재능이 있어."
"공작님..."
꼬리를 내린 개처럼 투지를 잃고 흐리멍덩하게 비어버렸던 시우의 눈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성취의 첫걸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부터라네. 자네는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이야."
대련 중의 시우의 눈은 언제나 빛났다.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원체 학습에 대한 집중력이 높은 성격인 듯하니 당연할 것이다.
그 자체로 계속 엘로아에게 수련을 했다면 꽤 좋은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실제로 수련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괄목상대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엘로아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아쉬운 점 또한 있었다.
시우에게는 명확한 목적, 확실한 동기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절박하고 간절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
목적에 짓눌리는 삶이 얼마나 피로한 것인지 알고 있는 엘로아로서는 열의와는 달리 다소 느슨한 시우의 목적의식을 눈감아 주었다.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주 조금 부족했던 마지막 한 피스가 채워졌음을 느낀다.
"잘 생각했네."
"지금 보다 더, 압도적인, 높은 곳까지 가고 싶습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야."
엘로아는 시우의 머리를 차분하게 쓸어주었다.
2.
엘로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몸은 어떠시온지요?"
시우는 샤론의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쓸어주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제 바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혹시 공적은 아닌지 반사적으로 경계한 것이다.
"놀라지 마시지요. 소녀는 위치포인트 광화문 지부의 지부장 수아 아가사라 하옵니다."
그제야 안도한 시우.
지금껏 많은 마녀를 접해온 시우에게도 수아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양반집 아가씨 같은 인상이라고 해야 하나?
입고 생활하기 편하라고 현대식으로 개량한 한복이 아니었다.
이 펜트하우스를 일순 고즈넉한 한옥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의 정통적인 한복을 차려입고 있다.
총천연색의 머리와 눈을 지닌 마녀 사이에서 다소 수수하다고 볼 수 있는 검은 머리, 그리고 검은 눈.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린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제되고 정제된 동양화 같은 아름다움 속에서 한 떨기 수국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간 말씀만 들어왔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시우라고 합니다."
시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악수를 권했다.
수아는 조금 놀란 듯이 손을 바라보고 있다 정중하게 악수에 응했다.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어 찾아왔사옵니다."
"네, 시간은 넉넉합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고?
막상 할 얘기가 있을까 싶긴 한데 그래도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람이긴 하다.
왜 일면식도 없는 시우의 공증을 서주었는지도 물어보고 싶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