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1.
페리윙클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익사한 마녀의 강력한 정신공격으로 기절한 시우와 폐를 관통당할 정도의 중상을 입고 쓰러진 샤론.
우선 둘을 이면결계가 걷히며 복구된 침대 위에 나란히 눕혀 놓았다.
영체는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쉽게 죽지 않는다.
설령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재생되고 몸이 관통당해도 적절한 조치만 취해주면 회복한다.
그러나 그런 영체의 내구성을 감안해도 샤론의 상처는 중상이었다.
익사한 마녀가 사용하는 작살은 바닷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바닷물이 그냥 마법으로 실체를 지니게 된 해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공포와 절망으로 조합해 낸 극독이다.
신체에는 커다란 부담이 없겠지만 아마 정신적으로 데미지가 누적되지 않았을지...
물론 페리윙클이 손을 써둔 만큼 '최악의 결과'는 피할 것이다.
행운의 마녀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답게 페리윙클의 행동은 대부분 의도한 쪽으로 흘러가고, 페리윙클은 에버그린이 죽는 걸 딱히 바라지 않았으니까.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소파에 앉은 페리윙클이 느릿하게 하품을 하는 사이 전화를 받은 상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울 곳곳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니며 시우를 찾던 엘로아 티페레트였다.
티페레트가 시우의 공증을 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휴대폰에 그녀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기에 곧장 연락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복숭앗빛 머리카락은 질주의 여파로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부릅뜬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처음 뵙네요. 키벨레 페리윙클이라고...어머..?"
인사를 전부 받지도 않고 엘로아는 페리윙클을 지나쳐 침대에 누운 그의 상태를 살폈다.
"시우.... 괜찮나?"
페리윙클을 악수를 위해 건넸던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초면에 인사를 무시하는 것은 다소 무례한 행위였으나 보호자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상참작하지 못할 것도 없다.
엘로아는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한 채 기절해 있는 시우를 보고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급함이 해소된 것도 잠시 다시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옆에 누워있는 샤론은 척 보기에서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괜찮아요. 좀 다치긴 했지만 죽지도 않을 거고요. 뭐, 다 저의 공로지만."
"어떻게 된 일인가?"
티페레트의 질문에 페리윙클은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섹스하는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스토킹했다는 말은 쏙 빼고 자신의 활약상을 위주로.
"한잔하실래요?"
사정 설명을 끝내고 여유롭게 걸어간 페리윙클은 냉장고에 있던 맥주 한 캔을 티페레트에게 건넸다.
티페레트는 맥주캔을 쥐는 대신 덥썩 페리윙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
"고맙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러실 거 없어요. 같은 마녀끼리 돕고 살아야죠. 그래도 공작님께서 정 신경쓰이시다면 약소한 성의 정도는 거절하지 않겠어요."
"내 꼭 충분한 보상을 준비하겠네. 절대 잊지 않겠네."
"별 말씀을."
인계도 끝났겠다.
굳이 이런 꿀꿀한 장소에 있을 필요는 없다.
페리윙클은 제품에서 명함을 꺼내 엘로아에게 건넸다.
"개인적으로 거래가 오간 일이라서요."
"거래?"
"이번에는 잊지 말고 꼭 연락 달라고 당부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만."
"거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시우와 관련된 일인듯하자 집요하게 파고드는 엘로아.
하지만 페리윙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실을 나서며 말했다.
"말씀하시면 적당히 알아들을 거에요~"
2.
혼란으로 가득했던 밤이 끝났다.
또 한 번의 상실을 경험할 뻔했던 엘로아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할 시간도 없었다.
곧장 샤론과 시우를 챙겨 위치포인트 광화문 지부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불행 중 다행이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침상 위에는 윗옷을 벗겨낸 샤론이 누워있다.
그녀의 몸 곳곳에는 은색이 기다란 침이 박혀 있었고 뜸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치유술을 다룰 줄 아는 수아 선생의 치료이니 일단은 안도해도 될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한 까닭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했던 엘로아에게는 아주 작은 위안이 되었다.
수아는 흐트러진 한복을 정리한 채 찻상 앞에 앉은 엘로아에게 다가섰다.
물론 샤론의 치유 건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엘로아가 위치포인트로 직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수아 선생이 엘로아를 직접 호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용건은 지난밤 습격사건에 대한 회의였다.
"고맙네. 덕분에 시우를 볼 면목이 조금이나마 생겼군."
"소녀 또한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옵니다."
겸양의 미덕을 보이는 수아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엘로아, 시우, 샤론, 페리윙클이 습격을 당했던 지난 밤.
비겁의 마녀가 사역하는 대량의 호문쿨루스들이 서울에 머무는 마녀를 동시에 습격.
총 12명의 마녀 중 4명이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수아 역시 습격을 물리치긴 했지만 그 대가로 현재 왼팔이 반쯤 마비된 상태이다.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지...."
엘로아는 침음했다.
다곤의 피리를 습격한 것도 비겁의 마녀의 소행으로 기정사실로 되어가는 가운데 그보다 더한 사건이 터지다니.
기묘하게 연결된 모종의 사건에서는 균열의 소리가 나는 듯했다.
폭풍의 전조처럼 말이다.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소녀의 업이옵니다."
"자책할 것은 없네. 누구도 비겁의 마녀가 이 정도의 소란을 일으키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야."
덤으로 케테르 공작이 이 지경이 되어도 나서지 않으리란 것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그녀는 여전히 연락이 없는가?"
"상아탑에 이미 수차례 전언을 보내보았지만.... 단 한 번도 답신을 받지 못했사옵니다."
모든 문제를 케테르에게 위탁하려는 심보는 아니다.
하지만 마녀 사회의 평화에 굉장히 커다란 부분을 케테르 공작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강력하고, 위험하고, 욕심 많고, 야욕이 넘치는 공적들이 몸을 납짝 엎드리고 욕망과 리스크의 타협점을 찾는 것은 오직 케테르 공작의 존재 때문이니 말이다.
역사적인 선례를 돌이켜 볼 때, 비겁의 마녀는 이미 두 차례의 선을 넘었다.
대량의 민간인을 이면결계도 없이 학살했으며 수많은 마녀를 일시에 공격해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도 케테르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억제력이 사라지거나 약화 된다면...
비겁의 마녀의 사례를 보고 '어? 여기까지는 넘어도 괜찮나 보네?'라는 작은 발상 하나가 얼마나 끔찍한 피해를 안겨줄지 예측하기조차 두렵다.
공적들에게는 간을 보기 위한 소소한 사고이겠지만 무수한 마녀와 민간인이 죽어 나가게 될 것이다.
"정리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벌써 미래의 일을 신경 쓰기에는 여력이 없다.
지금은 비겁의 마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해야 할 때이다.
수아는 지난밤 습격당했던 마녀들의 자료를 촤르륵 찻상에 펼쳐놓았다.
"습격을 당했던 마녀들은 대부분이 위치포인트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마녀였사옵니다."
"호문쿨루스 사냥에 적극적이던 마녀들이 당했군."
습격을 당한 마녀들의 공통점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상 선정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위치포인트에서 결정을 교환해 받아간 현상금의 액수가 꽤나 커다랗다는 것.
그 말은 곧 돈을 위해서든, 개인의 신념에 의해서든 굳이 피하지 않고 호문쿨루스를 토벌하는 마녀임을 뜻한다.
"아무래도 이번 사고를 계기로 서울 내에 머무는 마녀를 덜어낼 심산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마녀들이 떠나겠군."
"예.... 이미...절반 이상의 마녀가 서울을 떴사옵니다."
하룻밤 만에 마녀가 넷이나 죽었다.
게다가 그 일을 벌인 자가 까다롭고 위험하기로 소문난 공적, 비겁의 마녀라면 마녀들로서는 굳이 서울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직접 습격을 당했던 마녀는 물론, 평소 호문쿨루스와의 전투를 피해왔던 마녀도 죄다 사라지겠지.
소치틀이 바라는 것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뭔가 더더욱 커다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뭘 원하는 거지...?"
엘로아는 고민에 잠겼다.
다곤의 피리를 통한 대량의 마력 획득.
사라진 적기사와 새롭게 나타난 열화 카피 백기사.
그리고 이번의 습격 사건을 통해 마녀들을 쫓아내기까지...
가장 의아한 것은 이번 습격 사건으로 소치틀이 보유했던 전력 대부분이 소진되었다는 점이다.
악명 높은 익사한 마녀와 몽마는 물론이오 각종 까다로운 호문쿨루스들이 하룻밤 만에 죽어나갔다.
"광증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면... 이 또한 계획의 일부라 보는 것이 옳겠지."
엘로아는 중얼거렸다.
소치틀은 분명 미친 마녀이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마녀인 것은 아니다.
버려도 되는 패를 버렸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소치틀의 행방은 아직도 찾지 못했나?"
"본디 제 몸을 숨기는 것에 도가 튼 자인지라... 송구하옵니다."
"사과는 됐네. 나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실정에..."
수아라고 방석에 앉아 차나 마시고 있던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광화문 지부장 자리를 자처한 것은 고향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서였고, 상정 이상의 변수는 최대한 빨리 배제하고 싶었기에 소치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전부터 동분서주해왔다.
그러나 공적들은 대부분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에 능하다.
그중에서도 직접 전장에 서지 않고 사역마를 다루는 비겁의 마녀는 작정하고 숨는다면 찾는 것이 불가능할 수준이었기에 큰 소득이 없었을 뿐.
"더불어 레드클리프의 행방이 묘연하옵니다."
"잿불의 마녀?"
"예, 조사해보니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동기이고 과거 비겁의 마녀가 공적이 되기 전 막역한 사이였다 하옵니다. 허나 공교롭게도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몸을 감췄으니... 수상하다 생각해 현재 소재를 파악하고 있사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이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될지...
"게헨나나 다른 위치포인트에 조력을 요청하는 것은 어떤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반쯤은 포기하게 된다.
유유자적 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게헨나의 마녀들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폭주 중인 공적을 막기 위해 현세까지 나올 리가 있을까?
더욱이 다른 위치포인트의 마녀도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논의해 회유에 필요한 금액을 충당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고맙네."
"제가 나고 자란 땅을 지키기 위함일 뿐이옵니다."
그날의 회의는 뾰족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채로 끝났다.
차라리 적이 앞에 보인다면 베어 넘길 텐데...
행방마저 묘연하니 도저히 수가 없다.
엘로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먹으로 칠한 듯한 하늘에선 울적한 가을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