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1.
"스, 스, 스, 스승,니, 니임...."
시우의 윤곽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강산을 뒤집어쓴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피부와 근육.
동시에 방안의 풍경이 만화경으로 비춘 듯 수백 개로 나뉘어 찢어졌다.
엘로아는 끝까지 검을 쥔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풍랑이 이는 호수처럼 일렁이는 장면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우의 아니, 시우였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쿠루루룩...!
그것은 호문쿨루스였다.
번뜩이는 3개의 눈을 보지 않아도 즉시 알 수 있다.
현실에 저렇게 생긴 동물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정체 모를 살덩이에 파묻힌 눈알 세 개가 공중에 둥둥 떠 있다.
그 아래로는 썩은 동물 사체의 동맥 같은 검은 촉수 같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눈깔 아래 살점에서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침 같은 것이 질질 흐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엘로아의 몸도 온통 그 액체로 끈적해져 있었다.
엘로아는 지금까지 세상을 돌며 수없이 많은 호문쿨루스를 사냥해왔다.
무수히 많은 정보를 위치포인트로부터 제공 받아왔던 그녀인 만큼 한눈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눈앞의 이 괴물의 정체는 몽마(夢魔).
-꾸우..! 꾸우...!
엘로아가 정신을 차린 듯하자 황급히 촉수를 흐느적거리는 괴수.
징그럽니 뭐니 감상을 품을 이유는 없다.
어차피 상대가 호문쿨루스라면 취할 행동은 단 하나다.
사냥한다.
전투랄 것도 없었다.
엘로아의 검격을 막기에 몽마는 너무 약한 존재였다.
-후웅!
엘로아는 계약검을 반듯이 쥐고 대각선으로 올려 베었다.
군더더기 없이 극한까지 정제된 검격은 살덩이를 베는 소리도 없이 호문쿨루스의 중추를 비스듬히 양분했다.
-끼에에에엑!
까마귀의 목을 비트는 듯한 괴이한 비명과 함께 몽마의 몸이 잘려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자연스럽게 몽마로부터 뻗었던 이면결계도 서서히 소멸한다.
"........"
엘로아는 자신의 헐벗은 몸과 공기 중에 녹아내리듯 사라져가는 호문쿨루스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전투 자체는 싱겁기 짝이 없었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순간이었다.
일신의 강함과 위험도가 언제나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몽마는 고작 눈알이 3개에 불과한 호문쿨루스이지만 이제까지 2명의 마녀를 암살한 전적이 있는 놈이었다.
물론 통상적으로 15 위계가 넘어가는 마녀를 암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잠을 자고 있어도, 모종의 이유로 의식을 잃고 있어도 자율방어는 언제나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의를 느꼈을 때, 적대하는 대상이 몸에 손을 댈 때, 불시의 공격이 들어올 때.
낙인에 내재된 자율방어 시스템은 그것을 방어하고, 요격하고, 반격한다.
몽마는 그런 자율방어를 파훼하는 것에 특화된 호문쿨루스였다.
자고 있는 마녀의 꿈에 기어들어가 정신세계를 파고들고 마력과 동화되어 자율방어를 무력화한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가 된 마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만약 엘로아가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더라면 아무런 방비도 못 하고 침대 위에서 목이 베였을 가능성이 컸다.
엘로아는 자신의 몸에 찐득거리게 묻어있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마법으로 소멸시켰다.
그리고 퍼득 깨닫는다.
시우가 위험하다.
"시우...!"
엘로아의 몸이 바람처럼 발코니로 향했다.
몽마가 유명한 것은 마녀를 암살할 수 있는 유일한 호문쿨루스라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몽마는 '비겁의 마녀'가 사역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 있었던 사고와 사건들이 주르륵 머릿속에서 나열했다.
수아 선생에게 보고 받았던 복제된 호문쿨루스, 그 안에서 나온 공물로 개조된 인간의 심장.
옥상에서 마주했던 적기사와 정확히 동일한 모양의 백기사.
그리고 코엑스에서 있었던 대량의 학살 사건.
마지막으로 오늘 엘로아를 습격한 '몽마'.
애초에 수아 선생은 이 사건을 비겁의 마녀, 파올라 소치틀과 연관 짓고 있었다.
몸을 감추는 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한 비겁의 마녀의 행방을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잘그락거리는 환청과 함께 모든 단서가 맞물렸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비겁의 마녀'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일을 벌이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소치틀은 천수의 마녀라고 불렸을 정도로 많은 호문쿨루스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많은' 호문쿨루스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다는 것.
즉, 엘로아가 넋 놓고 몽마를 상대하는 동안 시우와 에버그린에게도 흑수가 뻗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시우!"
엘로아는 잠겨있는 거실 창을 깨뜨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시우의 방을 확인해도, 에버그린 양의 방을 확인해도, 혹시 몰라 화장실과 부엌을 꼼꼼하게 뒤졌음에도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안심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호문쿨루스는 이면결계를 펼치고 사냥을 하므로 이미 둘을 처치한 이후 결계를 거둬들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
두 사람이 여기 없다는 것을 확신하자마자 엘로아는 가슴에 납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동시에 구역질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순식간에 몸을 잠식한다.
어두컴컴한 방이, 불길할 정도의 적막이.
언젠가의 기억을 강제로 되살려낸다.
라피를 잃었던 날, 그 괴로운 기억을.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그저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손발이 차갑게 변하며 덜덜 떨렸다.
또다시 잃을 수는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순간의 방심과 실수로 그를 잃을 수는 없다.
엘로아는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몇 년을 사용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휴대용 단말기의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건다.
가장 먼저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흘러도 수신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하지... 마, 맞아... 수아, 수아 선생...!"
이번에는 위치포인트의 지부장 수아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똑같다.
아무리 수신음이 반복되어도 전화를 받지 않고 자동으로 음성메시지 안내음이 나왔다.
갑자기 습격을 가해 온 소치틀의 사역마.
사라진 시우와 에버그린.
연락을 받지 않는 수아 선생.
평범한 일이 아니다.
무언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엘로아는 과호흡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것이야..."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엘로아는 검을 굳게 쥐고 다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는 흉흉할 정도의 살기와 다짐이 맺혀 있었다.
다시금 떠오르는 트라우마도, 우려와 걱정도 모두 억지로 밀어 넣는다.
찾는다.
반드시 찾아내어 지켜낸다.
이번만큼은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계약한다."
계약검 측면에 음각된 12개의 문자가 모조리 빛나기 시작했다.
마력의 폭풍이 일어나며 주변 일대를 헤집으며 난동을 부렸다.
23 위계의 마녀가 전력으로 일으킨 마력은 심약한 마녀라면 극도로 농축된 마기에 짓눌려 졸도할 정도의 파동이었다.
엘로아는 일신의 마법을 모두 '전투'를 위해 개조한 케이스다.
따라서 정밀한 추적 마법도 탐색 마법도 다룰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일대를 모조리 들쑤셔보면 될 일.
엘로아의 몸이 창밖으로 쏘아졌다.
그녀는 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서울 시내 곳곳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2.
오늘 호문쿨루스 수색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2시간 동안의 수색을 끝낸 이후 호텔로 체크인.
질펀하고 뜨거웠던, 샤론의 입을 빌리자면, 치료 행위가 끝난 이후 두 사람은 호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다.
숙박비를 샤론이 제공하는 만큼 그렇게 좋은 호텔은 아니다.
홍대 외곽에 모텔보다는 좋지만 정식 호텔이라 칭하기엔 모호한 그런 숙소였다.
그 전에 눈만 맞으면 몸을 섞었던 때와는 달리 사흘에 하루로 집중된 섹스 타임.
그만큼 질펀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거의 동이 틀 때까지 함께 뒹굴어버렸다.
"하아... 오늘도 좋았다."
가볍게 샤워를 끝낸 샤론은 알몸으로 찰싹 시우의 가슴팍에 매달려있었다.
조금 전까지 시우가 자지를 박으며 쭙쭙 빨던 젖가슴이 부드럽게 맨살에 맞닿는다.
샤론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시우의 뺨에 가볍게 뽀뽀를 퍼부었다.
"매번 그 소리 하더라?"
"매번 기분이 좋으니까? 특히 너 요즘엔 더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아."
"그래? 수련을 해서 그런가?"
"그런 가봐."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더욱 파고드는 샤론.
이미 거의 전신이 밀착된 상태라 달라붙을 구석도 없는데도 더더욱 가까이 붙었다.
가끔 이럴 때면 참 복에 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꿔봤을 미모를 지닌 샤론과 동거도 하고, 돈 걱정도 없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딱히 없다.
이 모든 것이 게헨나 노예 생활에서 굴러온 스노우 볼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참 묘하다.
호문쿨루스에 의해 공격당할 수도 있고, 공적들 역시 눈독을 들일 위험도 있다고 경고는 들었지만...
솔직히 체감이 되어야지.
주의를 기울이고는 있어도 매일매일 이어지는 평화로움 속에서는 도저히 그런 위기가 다가오리라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한국인이 분단국가에 산다고 해서 매일 전쟁의 위험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공작님 오신 뒤로 좀 아쉬워. 그전에는 매일매일 너랑 하고 싶을 때마다 하면 됐는데. 이젠 눈치 보느라 맘껏 못하잖아. 넌 안 그래?"
"나도 아쉽긴 한데. 그래도 좀 강해져 놔야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건 나도 아는데... 아쉽다는 거지."
샤론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삐쭉 내민 상태로 시우를 빤히 바라본다.
"왜?"
짐짓 모른척하자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우움...우우움....빨리이..."
예상대로 키스해달라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아직도 부족하다 이거지.
사실 시우도 '오늘은 좀 짧네?' 싶었다.
원래 이렇게 한번 호텔에 머무를 때는 시우의 기둥까지 뽑을 기세로 자꾸만 덮쳐오는 샤론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시 키스 이후 새벽을 뜨겁게 불태우려 할 때.
주위에 마력이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뭐야?"
시우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살폈다.
피부에 맞닿는 이 감각과 눈에 보이는 특유의 마력패턴.
지금까지 숱하게 접해온 까닭에 결계가 전부 퍼지기도 전에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면결계가 호텔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다.
"뭐, 뭔데? 어?"
"호문쿨루스야. 아마도."
한껏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시우의 모습에 당황하던 샤론도 결계가 전부 완성되자 이상을 알아차렸다.
시우의 몸에서 꾸물꾸물 그림자가 피어오르더니 전신을 감싼다.
흐물거리던 물체는 곧장 갑주와 방패, 그리고 기다란 창이 되었다.
요 몇주간 티페레트에게 특훈을 받았다고 해도 맨몸으로 호문쿨루스 사냥에 도전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샤론도 알몸을 마녀복으로 감싸고 전투를 준비했다.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힌 완드를 비스듬하게 든 채 주변을 살핀다.
갑자기 전장에 내던져진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오랜만에 사냥이네."
"찾으려 할 때는 그렇게도 안 나오더니..."
샤론은 뜨밤을 방해받은 것이 맘에 들지 않은지 완드를 꾹 움켜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찰팍!
"응?"
사주경계를 계속하며 바깥은 어떤가 확인 차 창가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때.
발밑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샤론도 시우도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호텔방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수영장처럼 물이 흥건하다.
고작 발바닥을 적실 정도의 높이로 쌓인 물이 심연에서 퍼올린 것처럼 굉장히 어두운 색깔이었다.
원래 바닥이 어떤 색이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이번에 수련 열심히 했으니까. 성과 좀 봐볼까? 안 되면 도망치고."
시우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도 아니고 고작 물인데, 그냥 적당히 물을 뿜는 호문쿨루스가 근방에 있나보지 싶었다.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벼운 말을 던지는 시우의 어깨에 샤론의 손이 올라간다.
샤론은 위치포인트의 호문쿨루스 DB를 수시로 열람해왔다.
따라서 이런 전조를 보이는 호문쿨루스의 정체를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우야... 그러지 말고... 우리, 도망가야 할 것 같아."
'익사한 마녀'.
비겁의 마녀의 사역마이자 여태 세 명의 마녀를 수장시킨 강력한 호문쿨루스.
아무리 생각해도 시우와 샤론이 상대할 레벨이 아니었다.
"뭐? 무슨 일인데?"
-찰팍 찰팍 찰팍
시우가 어찌 된 일인지를 물음과 동시에 문밖에서 빠르게 걷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 발소리는 대리석 위의 피웅덩이를 즈려밟는 것처럼 진득한 물소리를 겸하고 있었다.
-삐걱
그리고.
잠금장치가 있는 호텔문이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