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31화 (231/917)

#231

1.

옥상 문을 닫고 나온 엘로아는 잰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천식 발작이 일어난 환자가 약을 찾는 것처럼 허겁지겁 찬장에서 술병을 꺼내 든다.

꿀꺽꿀꺽 소리와 함께 52도의 독한 술이 물처럼 술술 넘어갔다.

"푸후....."

그걸로도 뭔가 진정이 되질 않아 화장실에서 찬물로 어푸어푸 세수를 했다.

앞머리가 흠뻑 젖을 정도로 열심히 세안했건만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당혹감으로 머리가 어질거렸다.

다른 이유는 아니다.

마지막 대련에서 있었던 불상사 때문이다.

매일 12시간씩이나 진행되는 수련 겸 대련은 상당히 단조로운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1)시우가 무엇인가를 시도한다.

2)엘로아가 그것을 막아낸다.

3)문제점과 개선점을 첨삭해준다.

4)지적한 부분이 개선될 때까지 2)로 돌아간다.

실력 향상에 있어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역시 대련이었다.

실전처럼 격렬하진 않을지라도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익힌다'라는 측면에서는 변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시우는 한 가지 방법에서 안주하지 않고 매 수업마다 여러가지 공략법을 준비해 왔기에 효율이 좋았다.

그런 시우가 어제는 또 뭘 보고 왔는지 오늘 대련에서 거듭 테이크 다운을 시도했다.

노력과 도전정신은 가상하지만 엘로아에겐 일부로 당해주기도 힘들 만큼 어설픈 공격들이었으며, 또한 의도적으로 당해주어서도 안 됐다.

그런 미숙한 공격이 통했던 경험을 심어주는 것 자체가 훗날 악영향을 끼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왔다면.

마지막 대련에서 준비해 온 것을 선보이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나가떨어지면서도 굴하지 않는기특한 모습을 보며, 조금은 어리광을 부리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에는 마력으로 강화가 진행된 영체에 서브미션을 거는 것은 나쁜 선택지라는 것도 알려주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등을 내주고 시우가 찰싹 달라붙었던 순간.

다시 생각해보면 그닥 길지 않았던 그 순간을 회상했다.

우연찮게도 백허그와 같은 자세였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기에 시우가 엘로아의 머리 위에 턱을 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때 등에서 느껴졌던 딱딱하고 단단한, 옷 위로도 열기가 느껴지던 그의 신체부위는....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남성의 성기였다.

그것도 샤론과 성교를 나눌 때처럼 피가 잔뜩 몰려서 단단해져 있던 남성기.

게다가 귓가를 간질이던 숨소리는, 단순히 대련으로 인해 거칠어졌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원초적이고, 조금 더 본능적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됐건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숨소리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엘로아는 괜스레 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털었다.

아무리 엘로아가 남녀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한들 '언제 남성이 발기하는가?'는 알고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서 빠지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수업이지 않은가?

바로 성적인 흥분을 느꼈을 때이다.

물론 발기라는 것이 때때로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소변이 마려울 때도 뜬금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시우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런 정밀한 지식은 엘로아의 머릿속에 없었다.

"안 되겠다."

엘로아는 벌떡 일어나 옷을 벗었다.

이대로는 혼란스러운 머리가 진정되지 않는다.

목욕이라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아 술을 챙겨 들어갔다.

머리가 젖지 않게 수건을 튼 채로 따뜻한 물속에서 고민을 거듭한다.

"....하아..."

뜨거운 술기운을 머금은 한숨이 수면 위로 잔물결을 일으킨다.

요 며칠 그와 함께한 시간은 엘로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여전히 악몽에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나고, 가끔은 라피의 생각을 떠올리며 가슴을 움켜쥐고 주저앉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후회와 탄식으로만 얼룩졌던 일상이 시나브로 변해갔다.

겨우 내 얼어붙었던 땅이 따스한 봄볕에 녹아들고 고함 없는 녹색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처럼.

혼자 눈물을 흘리는 일이 줄었다.

대신 미소를 짓는 일이 많아졌다.

라피가 떠난 이후 한 번도 서지 않았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식사를 즐기는 나날이 생겼다.

고통을 잊기 위해 알코올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술의 풍미와 향을 느끼며 음미할 여유가 생겨났다.

왜인지는 알고 있다.

티페레트는 시우에게 라피를 투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나날을, 그를 통해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수련을 할 때, 함께 식사를 할 때, 술잔을 기울일 때.

엘로아는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시우에게 무척 커다란 감사를 느꼈다.

아직 정식으로 사제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여운 제자라고만 생각했다.

반대로 시우 역시 엘로아를 스승이라고 여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날,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겐가...?"

그것은 깜짝 놀랄 만큼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엘로아는 남성들과의 접점이 없다.

당연하게도 남녀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도, 다른 경험이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시우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에 기쁨, 불쾌함 혹은 경멸 이전에 당혹스러움만을 느낄 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신기하게 생긴 황금 풍뎅이가 옷에 달라붙어 떨쳐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잡을 수도 없는 느낌?

아니다.

비유하면 할수록 모르게 되어간다.

엘로아는 술을 홀짝이고 나머지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시우가 성실하고, 다정할뿐더러 상냥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따라서 시우를 무척 아끼긴 하지만, 단 한 번도 제자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만약 시우가 자신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면... 마음은 고맙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 그러고보니..."

어떻게 그가 상처받지 않게끔 거절할지.

오늘 그랬던 것처럼 눈치채지 못한 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던 엘로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사실.

그렇다.

시우는 이미 샤론과도 몸을 섞는 연인 관계인 것이다!

'연애'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도 갖춰지지 않은 엘로아 앞에 툭하고 떨어진 심화 문제.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엘로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정리해 보았다.

이미 샤론과 교제를 나누는 상태에서 엘로아에게 그렇고 그런 감정을 품는다?

그건 단순히 엘로아가 난감하다는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견습마녀 시절 수아 선생에게 수업을 들을 적, 올바른 남성과 여성의 몸가짐에 대해서도 배운 적이 있다.

수아 선생의 가르침이 살짝 시대의 흐름에 뒤처졌다는 것을 고려해도 소위 '양다리'라 불리는 것은 도의적,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거기까지라면 그저 엄하게 꾸짖고 넘어갈 일이지만...

시우의 평소 품행을 생각해보면 이 여자 저 여자를 찌르고 다닐 정도로 경박한 남자는 아니기에 더욱 혼란스럽다.

"안 되겠구나."

도저히 혼자서는 생각을 정리할 수 없다.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도 아니다.

그리하여 내려진 결론: 그냥 덮어두자.

엘로아를 보고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이던 시우.

그는 그 자신조차 이런 상황이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발적인 충동...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

일부로 문제 삼을 것도 없다.

원래 남자들은 종종 그런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하지 않던가?

고작 이 정도의 해프닝으로 시우를 멀리하기에 엘로아는 이미 그를 너무나도 아꼈다.

엘로아는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았고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먼지를 뒤집어썼을 것이 분명한 머리는 마법으로 깔끔하게 한다.

한가득 채운 술잔을 들고 거실로 나오자 평소 무심코 지나가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혼자 힘들어할 엘로아를 걱정했기 때문이겠지.

시우는 수련이 끝나고, 혹은 종종 생각날 때마다 엘로아의 집을 들렀다.

항상 두 손에 뭔가를 들고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집안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기 시작했다.

살풍경했던 방도 조금은 사람 사는 곳 같이 변했다.

냉장고는 시우에게 요리해주기 위한 이런저런 식재료로 채워졌다.

술만 가득하던 찬장에도 간장, 식초, 올리브유가 담긴 병이 자리 잡았다.

침실에는 푹신해 보이는 쿠션과 분위기 있는 스탠드 무드등이 생겼다.

심지어 그녀가 입고 있는 파자마도 시우가 사다 준 것이다.

이렇게 알뜰살뜰 보살핌과 걱정을 받는 주제에 작은 허물을 책 잡아 미워할 생각은 없었다.

"잘 흘러가겠지."

엘로아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아무 일도 없던 척하자.

내일도 여느 때처럼 수련을 하고 시우를 초대해 요리를 대접하자.

이후에는 근사한 술을 마시며 그간 수련의 성과에 관해 토론하는 거다.

라는 생각이 딱 정립되자 어지러웠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이 됐다.

"하아암...."

침대에 누운 엘로아는 작게 하품했다.

의무적으로 부여되는 하루 4시간의 수면시간.

목욕 이후에 노곤함과 술기운, 거기에 시우가 사다 준 푹신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자 잠이 솔솔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덜어냈다 한들 이 시간은 그녀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이다.

티페레트의 과오가 기록된 회고록을 억제로 들춰보아야만 하는 순간이니.

유사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암전된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다.

엘로아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오늘은 어떤 과거를 돌아보게 될지 두려움에 떨며.

"......?"

엘로아는 눈을 끔뻑끔뻑 떴다.

장소는 엘로아의 방 안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은 라피와의 추억이 깃든 곳이 아니다.

따라서 꿈에 나올 장소도 아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을 뿐인데 어느새 창밖으로 푸르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엘로아를 괴롭게 하던, 밤이 오는 순간을 겁내게 하던 악몽이 나타나지 않았다.

엘로아는 몸을 일으킨 채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찰칵!

그때 방문이 열렸다.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한다.

시우다.

"자네? 어쩐 일인가?"

시우가 엘로아를 찾아오는 것은 항상 점심 무렵이다.

지금은 해조차 뜨지 않은 꼭두새벽이고 말이다.

엘로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며 잠결에 흐트러진 파자마 옷깃을 여몄다.

"스승님이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스승...님?"

시우는 한 번도 엘로아를 스승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공작님이라고 불렀지.

엘로아가 지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마 라피를 잃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호칭 변경은 아닌 밤중에 찾아온 그의 의중과 더불어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잘왔네, 잠도 전부 잤으니 오지 못할 것도 없지. 술이나 한잔 하겠는가?"

"그것도 좋죠."

시우는 빤히 엘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당히 울림이 풍성한,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주춤한 엘로아, 그녀가 앉아있는 침대로 시우가 천천히 다가온다.

"이렇게 뵈니 또 느낌이 다르네요. 항상 운동하는 복장만 입으시더니."

"그대가 사준 물건이 아닌가? 퍽 편해 애용하고 있네. 잠시 나가서 기다려주겠나? 옷을 갈아입고 싶네."

아무리 그래도 잠옷 차림으로 손님을 맞을 수는 없다.

복장을 정갈히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엘로아의 움직임이 다음 시우의 대사에 우뚝 멎는다.

"아름다우십니다."

"뭐, 뭣?"

"아름다우셔요. 제가 살면서 만나왔던 그 어떤 마녀님보다 더요."

엘로아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