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30화 (230/917)

#230

1.

"오늘까지 배워왔던 것을 정리하자꾸나.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덤비게나."

오늘도 장장 12시간에 달하는 대련이었다.

맨몸으로 영체의 내구도만 믿고 대련하던 때와 달리 신체 강화로 지구력이 훨씬 늘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 해도 쉬지 않고 진행된 혹독한 수련은 시우의 진을 쏙 빼놓았다.

지금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온몸을 축축하게 적신 땀, 그리고 근육통이 몸을 괴롭힌다.

이제 마지막이다.

사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이 고생을 하는데 적어도 공작님이 당황하는 표정 정도는 보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시우는 숨을 푸후 내뱉었다.

달아올랐던 호흡이 뜨겁게 뿜어지며 머릿속의 열기가 함께 사라졌다.

쓸데없이 힘이 들어갔던 몸은 이완되었으나,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튀어 나갈 채비를 끝냈다.

-탓!

시우는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린다.

쏘아진 활처럼, 바람처럼 거리를 좁히는 자신의 심상.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는 심상 속의 풍경과 완벽한 싱크로를 보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시야 속에 마주 선 엘로아가 보인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집중력은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트레이닝 바지, 움직이기 편하게끔 걸친 바람막이는 지퍼가 열려있어 하얀 스포츠 브라를 고스란히 내비치는 것까지.

하지만 시우가 주목한 것은 그녀의 전체적인 움직임이었다.

아무리 엘로아라도 어떤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사전 동작이 필요하다.

뒷발을 슬쩍 뒤로 당긴다, 팔을 앞으로 뻗는다 등등.

이런 소소한 단서들을 조합해 그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다.

"합!"

기합과 함께 뻗어지는 주먹.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궤도로 뻗어진 시우의 주먹에는 이미 발경의 묘리가 스며들어있다.

아무리 엘로아라도 배에 맞는다면 커다란 부상을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보다 위험한 공격도 몇 번이고 해왔다.

엘로아가 반드시 막아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엘로아는 자신의 작은 체구를 밀어 넣듯 시우의 품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엘로아의 손이 스트레이트를 내지른 시우의 팔을 뱀처럼 휘감는다.

연이어 품안에서 작게 회전하더니, 땅을 내디디며 달려오던 다리는 어느샌가 엘로아의 발에 걷어채 중심을 잃었고 무게 중심이 순식간에 앞으로 쏠린다.

"흐읍!"

평상시였더라면 이대로 바닥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덥썩 엘로아의 어깨를 잡고 무게중심을 뒤로 빼는 것으로 업어치기에 대처했다.

역동작이나 다름없는 무리한 버티기에 허리에 막대한 하중이 실렸다.

그러나 가까스로 내던져지는 것만큼은 막았다.

"오호?"

엘로아의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소리.

하루 종일 매쳐지며 날아다니던 시우가 이 정도까지 저항해 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무작정 힘을 써서 기술에 저항하는 것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이런 저항도 엘로아의 반격을 염두에 두어야만 가능한 것이니.

결국 업어치려던 엘로아와 그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는 듯한 모양새가 된 시우.

그 자세 그대로 두 사람의 힘 싸움이 이어졌다.

사실 엘로아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교착상태가 된 것은 처음인바, 시우가 오늘 내내 시도하던 기술이 무엇인지 봐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떻게 할 건가?"

낑낑거리며 어떻게든 엘로아를 넘어뜨리는 데만 열중하던 시우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장 알아차린다.

지금 두 사람이 굉장히 가까이 밀착해 있다는 것을.

엘로아는 여전히 시우의 팔을 감싸 잡고 있었기에 떨쳐낼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저... 공작님?"

"아직 대련은 끝나지 않았네. 움직일 공간이 없더라도 그대가 배워왔던 것을 잘 떠올려보면 분명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게야. 엄밀히 말하면 그대가 처음으로 내 뒤를 잡은 것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요...라는 말이 혀끝까지 차오른다.

이건 일급 위기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분홍빛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엘로아의 정수리가 턱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경험상 시우는 마녀의 체취를 맡게 되면 발기한다.

그중에서도 정수리는 체취가 강한 곳인 만큼 특히나 위험한 부분이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엘로아의 등허리 부근에는 시우의 사타구니가 바짝 밀착되어있는 상태.

커진다면 곧장 들킨다.

'여유롭게 상대의 백을 잡았을 때는 어떤 공격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데....

뭐라도 말하고 벗어나야 하는데,

더 이상 붙어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미 숨을 씩씩거리며 엘로아의 체취를 한껏 들이킨 시우의 이성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간다.

살짝 땀이 맺혀있는 엘로아의 목덜미.

허벅지에 맞닿아 느껴지는 둥글고 탄력 넘치는 엉덩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느끼며 코앞에서 사락사락 비벼지는 머리카락의 향기를 듬뿍 맡다 보니 머리가 흐릿해진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그녀를 뒤에서 안아가려 하고 있었다.

"응....?"

엘로아의 고개가 갸웃 움직였다.

뒤에서 발버둥 치던 시우의 힘이 빠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귓가에 바람을 부는 것처럼 들려오는 호흡은 '원래 이렇게 거칠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잠시 뒤 등을 뭉근하게 누르는 단단한 물체를 느낀 엘로아.

그는 엘로아와 마찬가지로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또한 시우의 한 손은 엘로아가 붙잡고 있고 나머지 한 손은 시우 자신이 백초크를 걸려는 것처럼 엘로아의 목덜미를 감싼 채이다.

불현듯 언젠가 보았던 시우의 정사(情事) 장면, 그 짐승의 열기로 가득했던 방 안의 풍경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다리 사이에서 뻗어 여성의 은밀한 비원을 침투하던 굵직한 고기의 창도.

엘로아는 직감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이 단단한 물건의 정체는....

"읏...!"

엘로아의 머리카락이 뜨거운 물에 던져진 고양이처럼 쭈뼛 서더니 시우의 팔을 내려놓고 몸을 옆으로 비틀어 빼 도망쳤다.

그 어떤 강적이라도 단 한 번도 먼저 도망쳐 본 적 없는 엘로아지만 이 경우는 예외다.

"아...."

엘로아가 멀리 떨어지자 그녀의 체취도 멀어졌다.

자연히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욕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분해진다.

좆됐다.

신성한 대련 중에 몸이 맞닿자 흥분하고 발기한 자지를 비벼대는 제자가 있다?

고지식하고 엄격한 엘로아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볼지 벌써부터 무서웠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변명한다 한들 그녀를 납득시킬 자신 또한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엘로아는 곧장 시우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지 않았다는 것.

대신 두 눈을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뜬 채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자네...."

경악에 찬 그 반응은 그녀가 모든 것을 알아차렸음을 의미했다.

시우는 잠자코 처벌을 기다렸다.

엘로아가 당황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는게 이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아니다.

늦었지만 일단 대가리라도 박자.

시우가 오체투지를 하며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 사과를 하려 할 때 엘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지친 모양이구나.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을 보면."

뜻밖에 엘로아는 시우를 질책하지 않았다.

심지어 방금 있던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무리를 시킨 것 같네. 오늘 대련은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야, 그대는 최선을 다했음을 나도 알고 있어. 음... 그러니... 너무 염려 말고 내일을 위해 휴식을 취해두게나."

아주 잠깐이지만 엘로아의 말을 듣고 '혹시 안 들켰나?' 같은 부질없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시우의 강철고추가 등을 꾹 누르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의 반응이다.

마치 어머니께 딸치는 걸 걸렸을 때 '뭐 하고 있었니? 게임 그만하고 나오렴'이라고 어색하게 말한 뒤 나가는 것 같은 분위기니까.

당혹감으로 은은히 떨리는 목소리.

정처 없이 떠도는 눈동자.

한시라도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듯한 몸짓이 그 증거다.

"그럼, 오늘도 고생 많았네. 내일 보세."

엘로아는 후딱 이면결계를 거둬드리고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삐걱삐걱 거리는 걸음으로 옥상을 내려갔다.

말릴 틈도, 뭔가 말을 덧붙일 새도 없었다.

시우는 망연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

"다녀왔어? 미안 집중하고 있어서 오는 줄도 몰랐네."

방문을 열자 한 쪽에는 컴퓨터, 한 쪽에는 공책을 펴놓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는 샤론의 모습이 보였다.

요새 샤론은 시드머니를 열심히 불리기 위해 각종 주식과 부동산 공부를 병행 중이다.

듣자 하니 의외로 재능이 있어 쏠쏠하게 돈을 불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하긴 마녀들은 죄다 천재나 다름없는 족속들이니 그 머리를 돈 버는 쪽으로 굴린다면 천금을 얻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샤론이 가난에 허덕이던 이유는 버는 돈을 어디에 투자할 새도 없이 족족 빼앗겼기 때문이니까.

"이리 와, 12시간 만에 한 번 안아보게."

여느 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고된 수련을 마치고 온 시우를 껴안아 주려던 샤론은 반쯤 죽어있는 시우의 표정에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뭔데?"

시우는 물끄러미 샤론의 얼굴을 보았다.

저번에 샤론이 반쯤 헐벗은 채 티페레트 공작님을 맞았을 때 쪽팔려 하던 그녀를 은근히 귀엽다는 식으로 봤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행동을 진심으로 후회하게 된다.

"샤론 기억나?"

"뭐가?"

"전에 여러가지 들켰었잖아. 그때 진심으로 너한테 공감해주지 못해 미안해."

"가, 갑자기 그 얘기를 왜 꺼내! 공작님이 뭐라 하셔?"

샤론은 경기에 가까운 반응을 일으키며 펄쩍 뛰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의 상처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지금 이 마음에 남은 상처도, 이렇게 오랫동안 낫지 않겠지.

명치 부근이 쓰라리다.

샤론이 예전에 말했던 위가 꼬이는 것 같다라는 기분이 뭔지 알겠다.

"아니,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내일 엘로아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정을 설명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도 고역일 것 같고.

그냥 이참에 며칠 수련을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갑자기가 어딨어! 뭔데? 뭔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반쯤 울상이 된 샤론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냐, 공작님은 그날 이후로 아무것도 안 물어보셨어. 딱히 신경 쓰시는 것 같지도 않고."

"정말이지? 진짜지? 맹세해?"

"엄숙히 맹세할게. 근데 내가 맹세한다고 뭐라도 되나?"

"믿어야지 뭐. 너가 거짓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다행이다... 십년 감수했네! 진짜."

샤론은 시우에게 폭 안겨서 가슴에 뺨을 비볐다.

예전부터 더러우니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줘도 당최 듣지를 않는다.

아무튼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고된 수련 일정은 적응이 됐는데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 커다란 관계로 요양이 필요할 지경이다.

"아, 맞아. 시우야 그럼 오늘은 쉬어?"

"쉬냐니?"

"우리 그...오늘 사냥가는 날이잖아. 나 어플로 예약도 해놨는데..."

샤론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오늘은 사흘에 한 번 있는 호문쿨루스 수색 날이었다.

'다곤의 피리'가 불러온 참사 이후로 잠시 뜸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홍대와 신촌 인근을 돌며 호문쿨루스를 수색했다.

두 사람 모두 호문쿨루스에 의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샤론의 돈벌이가 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어미개를 사냥한 것을 마지막으로 한 마리의 호문쿨루스도 마주치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덤으로 샤론이 말하는 예약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사냥이 끝나고 함께 숙박할 호텔을 잡아두었다는 의미다.

엘로아가 아랫집에 머물게 됐고, 오르골로는 마력의 파장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그렇게 된 이상 이전처럼 집에서 섹스를 하는 건 티페레트에게 '우리 섹스했어요! 방금 쌌어요!'라고 알림문자를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인근 호텔에서 적당히 오붓한 하룻밤을 보내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다.

"음...."

솔직히 오늘은 좀 쉬고 싶었다.

그러나 기대감에 잔뜩 들뜬 채 휴대폰을 흔드는 샤론의 모습을 보자 그런 마음도 쏙 들어갔다.

"준비해. 나도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

"응! 나 이미 다 준비했어!"

이것저것 채비를 끝낸 시우와 샤론은 오랜만에 밤거리를 나섰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