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29화 (229/917)

#229

1.

여러 행정적 뒷공작과 마법적 장치 덕에 이제는 존재마저 잊힌 어둠.

서울의 지하, 폐기된 배수 터널에서 델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꼴이 된 걸 알면... 좋아할 사람들이 넘쳐나겠네요..."

분명 그럴 것이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왔으니 앙심이라면 얻은 물건만큼이나 넘쳐나겠지.

이 비참한 몰골을 보면 박장대소를 할 것이다.

그 탐욕스럽던 잿불의 마녀 델라가 벌레처럼 목숨만 연명한 채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면서 말이다.

델라의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언제나 생생한 윤기를 자랑하던 적발은 눌러붙은 피와 먼지로 잿더미를 뒤집어쓴 것 같다.

팔다리에는 빼곡하게 하얀 창이 박혀 마치 박제당한 곤충처럼 벽면에 매달려있다.

몇 번이고 토혈을 계속한 탓에 입 주변과 드레스의 가슴께 부근에서는 악취와 더불어 짙은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고통?

이제 와서 그런 건 느껴지지도 않을 지경이다.

델라는 분명 20 위계의 대마녀였다.

전투 경험도 풍부했기에 어지간한 놈들을 상대로는 힘들이지 않고 꺾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꼴을 보면 알겠지만 델라는 파올라가 복제해낸 서른두 기의 백기사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적기사를 모태로 복제해낸 백기사는 4개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정도의 능력치라면 32기라도, 100기라도, 설령 그 이상이더라도 델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기사는 일반적인 호문쿨루스와 달랐다.

움직임은 훨씬 체계적이고 세련됐으며 높은 지성을 가진 것처럼 델라를 몰이 사냥했다.

델라의 열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백기사들의 손에 들린 백색창.

백기사가 지닌 백색창은 '붉은가지'의 왜곡 능력과 링크되어 고유의 능력마저 복제해 왔다.

그 덕분에 델라는 한기 한기를 상대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힘을 사용해야 했으며 결국 20기의 백기사를 불사른 뒤 사로잡혔다.

-또각 또각 또각

넓은 공동을 울리며 한 사람이 걸어온다.

델라를 감시하듯 그녀를 향한 채 서 있던 3기의 백기사가 길을 트고 '비겁의 마녀' 파올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올라의 손에는 주둥이가 길쭉한 물병이 들려 있었다.

"마셔."

"........"

"안 마시면 하루도 가지 않아 죽을 거야."

델라는 파올라를 날이 선 눈빛으로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입가에 들이 밀어진 물병의 부리를 물자 더럽게 맛없는 액체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이 안에는 영체를 회복하는 여러 가지 약품이 섞여 있다.

온몸을 창에 빼곡하게 꿰뚫린 델라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살아있을 수 있는 것도 파올라가 하루마다 챙겨주는 이 약 덕분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델라는 파올라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얌전히 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파올라."

약을 전부 먹인 뒤 뒤돌아서는 파올라를 멈춰 세웠다.

파올라는 무심한 눈동자로 뒤를 돌아본다.

일그러지지 않은 한쪽 얼굴은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델라는 24시간 공동의 벽면에 매달려 파올라가 무슨 짓을 하는지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파올라는 복제한 '다곤의 피리'를 이용해 이면결계도 펼치지 않은 채 인간을 학살했고, 거기서 대량의 마력을 수집했다.

델라 역시 고위계의 마녀다.

공동 전체에 새겨지고 있는 마법진과 그 중앙에 박힌 붉은가지가 무엇을 위한 사전작업인지는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충고한다.

"지금이라도, 멈춰요."

"의미 없는 말이네. 예상대로."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등을 돌리는 파올라.

"파올라!"

델라는 잔뜩 지쳐 갈라지는 목소리로 파올라를 다시금 부른다.

그녀의 필사적인 부름에 파올라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다시금 델라와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 당신이 지금 뭐 하려는 건지 알고 있죠?"

"대량의 마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지."

"대량 학살이겠죠."

서울은 어마어마한 인구 밀집도를 자랑한다.

파올라가 기사단을 완성하고 그들을 날뛰게 풀어둔다면 어떻게 될까?

서울에 있는 마녀들이 그것들을 막을 수 있을까?

엉덩이가 무거운 케테르 공작이 움직이기 전까지 사상 초유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지극히 마녀답고 선민의식을 품고 있는 델라조차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안다.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그 끔찍한 일이 친구인 파올라의 손에 의해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파올라의 목숨을 끊어주려던 것이 아니었는가?

"그게 뭐?"

하지만 파올라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았다.

이미 망가져 있다.

일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설령 당신 말대로 왜곡의 효과를 이용해 죽은 자를 소생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은 케테르의 손에 죽을 거예요. 당신의 제자도요! 쿨럭! 쿨럭!"

파올라를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델라는 전신이 부서질 것처럼 기침했다.

그녀의 입가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파올라는 그런 델라의 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옷 소매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델라, 델라, 어리석은 델라."

파올라는 노래하듯 말한다.

그것이 빈정거림으로 느껴져 델라는 휙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

"케테르 공작은 움직이지 않아."

"그걸 당신이 어떻게...."

"'속삭임의 마녀'가 일러줬거든."

델라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다.

"당신 그 사기꾼을 정말 믿는 건가요?"

"믿어, 친구 행세를 하다가 등에 칼을 찍으려는 델라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그녀는 거짓말쟁이예요. 당신이 어떻게 되든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요!"

"너무 시끄럽게 말하지 마. 소리가 울리면 머리가 아프단 말이야."

파올라는 우울한 낯빛으로 델라의 입을 슬쩍 틀어막았다.

델라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음 깊이 체념했다.

그 암컷 뱀과 말을 섞었다면 이미 늦었다.

'속삭임의 마녀'가 주입하는 독은 해독제가 없는 극독이다.

파올라의 부서진 마음에 아주 교묘하게 구석구석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한번 파올라를 배신하고 적대했던 델라의 설득이 먹혀들 리 없다.

"그래서... 난 왜 이렇게 두는 건가요? 믿지도 못한다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잖아요."

반쯤 체념한 마음은 평소 하지 않던 말까지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어느 정도는 본심이다.

비록 죽고 싶지 않을지라도 창에 꿰뚫려 온종일 벽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해가 들지 않은 지하는 며칠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조차 없었기에 조금씩 정신이 갈려나가는 기분이다.

"아무리 징징거려도 풀어줄 수 없어. 넌 내 계획을 모두 알고 있으니까. 분명 방해하겠지."

"...적어도 몸이라도 깨끗하게 해주세요. 불쾌해 죽을 것 같으니까."

파올라는 손가락을 튕겨주었다.

그와 동시에 델라의 몸에 있던 모든 더러운 것들이 벗겨져 나간다.

"진작 부탁하지 그랬어. 마음에 드는 줄 알고 그대로 뒀잖아."

"...그걸 말이라고."

파올라는 델라의 불평을 더 듣지 않고 백기사 사이로 사라져갔다.

문득 멈춰선 파올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널 죽이지 않아."

커다란 공동 안으로 파올라의 마지막 말이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난 여전히 널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2.

'훗날 만병지왕의 계약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될 걸세. 그러나 검과 창을 쓰며 적과 겨루다 보면 필연적으로 애매한 간극에서 대치하는 때가 생기지.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권각의 기술이네.'

라는 설명을 끝으로 엘로아는 시우에게 무기를 들리지 않았다.

항상 사용하던 검은 갑옷조차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오로지 마력으로 신체 강화를 한 상태에서 맨손으로 하는 대련.

그러면서도 발경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최근 수련의 목표였다.

엘로아가 그렇듯이 언제 어떤 자세로든 자유자재로 발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합!"

두어 차례 공격을 주고받던 시우는 엘로아의 빈틈을 찾아냈다.

그대로 몸을 무릎 높이까지 낮춰 덮치듯 달려들었다.

상대의 하반신을 땅에서 뽑아버리는 목적의 기술, 태클이다.

말이 태클이지 시우는 이미 능숙하게 마력을 통한 신체 강화를 다룬다.

게다가 힘이 극점에 달하는 순간순간에 발경을 활용하며 강세를 조절하기도 했다.

일반인의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고 코끼리도 넘어뜨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우의 태클이 엘로아를 그라운딩으로 끌고 가는 일은 없었다.

"크윽!"

투우사처럼 슬쩍 비켜선 엘로아의 다리가 시우의 다리 사이를 옆으로 파고들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든 발 걸기에 전혀 중심을 잡을 수 없게 된 시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넘어지려는 시우의 뒷덜미를 쥔 티페레트는 그를 가뿐하게 바닥에 매다 꽂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이 등에 닿으려는 순간 살짝 들어 올려 충격을 경감시켰지만...

-쾅!

그것만으로도 시멘트에 쩍 금이 가버렸다.

이것으로 50번째 다운이다.

엘로아는 혀를 쯧쯧 찼다.

"그렇게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어서야 쓰겠나? 동작이 너무 크고 군더더기가 많네."

"하아, 하아, 멧돼지는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시우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앞만 보고, 우당탕탕 달려오고, 제풀에 나가떨어지니. 딱 멧돼지지. 그렇지 않은가?"

엘로아의 놀림이 돌아오자 시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수련과 대련을 거듭하며 그만큼 가까워진 것일까?

엘로아는 종종 시우를 놀리듯 말하게 되었다.

그녀의 편안한 태도 덕분에 시우도 가끔은 볼멘소리를 하며 투덜거리게 되었고 말이다.

"조금 전에는 소심하게 위축되지 말고 크고 힘있게 움직이라 하셨잖습니까."

"그게 허점투성이의 돌진을 뜻하던 건 아니지. 동작을 크게 해야만 힘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이거 참.... 어렵네요."

"세상에 쉬운 일은 수련 중에 누워있는 것뿐이라네. 여기, 일어나게."

엘로아는 손을 뻗었고 시우는 그 손을 잡고 쭉 일어났다.

수련 시작 한 달이 지나고 완연한 가을이 왔다.

엘로아의 한 수 한 수에 휙휙 나가떨어지던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녀는 숱하게 많은 실전을 거쳐 온 역전의 용사니 요 며칠의 수련으로는 따라잡으려 드는 것이 양심이 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아직 더 할 셈이겠지?"

"네, 이대로 끝내기는 뭔가 아쉽네요."

시우는 엘로아에게 커다란 벽을 느꼈다.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벽을.

하지만 그것이 절망이나 포기로 곧장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

높다란 벽을 오르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생겨난다.

절망할 시간을 노력과 집중으로 치환한다면 적어도 허송세월하진 않는다는 것을 시우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배움에 대한 목적이 생겨났을 때 시우의 집중력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련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UFC경기 따위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하니 말이다.

엘로아가 멧돼지 태클이라 말했던 기술도 실은 어제 경기에서 봤던 것을 응용한 것이었다.

"향상심은 언제나 좋은 거지.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정진한다면 필히 결과를 얻을 걸세."

엘로아는 거의 티를 내지 않았지만 대견하다는 듯 시우를 바라보았다.

이전까지도 예사롭지 않은 인내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하루 10시간이 넘게 얻어맞으면서도 계속 달려들 정도로 오기와 끈기가 넘치는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극히 편견이지만 시우의 외모는 백면서생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일전의 공격에 대해 일러줄 것이 있네."

"아, 넵."

엘로아는 조금 흐트러진 바람막이를 여미고 뒷짐을 지었다.

"전투에 있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인지 아나?"

"마법전투에 관한 건가요? 아니면 육체적으로 저희가 하는 전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둘 모두를 포함하는 말일세."

시우가 한참 대답이 없자 엘로아가 입을 열었다.

"공격을 하는 순간일세."

"공격이요?"

"시야는 좁아지고, 머릿속은 한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게 되지. 오직 공세만을 생각한다면 빈틈이 생겨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엘로아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척하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전투 중에는 항상 명심하게. 넓게 보고, 깊게 보게나."

사실 티페레트 공작과의 수련은 살짝 선문답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가르쳐 주는 것은 몸을 사용하는 공식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정신론에 가까웠다.

"조금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이런 자세를 취하라던가. 아니면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면 빈틈이 줄어든다던가."

"틀을 만들어 거기에 욱여넣는 것은 좋지 않아.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은 것이지. 흐르는 물처럼 말이야. 내가 해 줄 것은 그대가 오르막길로 물길을 틀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전부일세 나머지는 그대의 몫이지."

"알겠습니다. 우선해 보겠습니다."

역시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다.

하지만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붙어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시우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니 말이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오게."

다시금 투지를 불태우는 시우를 보며 엘로아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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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HN님이 그려주신 엘로아 티페레트 입니다

바람막이와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모습과 색감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색역필로 칠한 듯한 색감을 무척 좋아하는데 제 취향에도 쏙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 피폐한 듯한 눈초리가 정말 예술입니다....

좋은 팬아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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