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28화 (228/917)

#228

1.

엘로아의 집에는 테이블이 없었으므로 대화는 부엌의 테이블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은 위스키 한 병과 잔 두 개.

아무래도 이편이 대화가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겹쳐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었다.

워낙 서로 민망한 상황이기도 하니 맨정신보다야 이게 낫겠지.

"커흠...."

"큼큼...."

시우도 엘로아도 일절 대화 없이 연거푸 술을 두 잔씩 비웠다.

딸치는 것만 들켜도 겸연쩍은 판국에 거나하게 질내사정한 순간을 과시하고 말았으니 아무리 시우라도 좀 뻘쭘했다.

특히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초청하지 않았던 방청객을 독대하는 마당에서야...

"미안... 하네."

엘로아는 괜스레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으며 말한다.

언제나 쭉 펴고 있는 어깨가 지금은 말려 들어간 것처럼 패기가 없다.

항상 시우를 똑바로 바라보던 눈빛도 어쩐지 술잔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공작님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러시신 않았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그건...."

"습격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오신 것 아닌가요? 그래서 예장도 들고 계셨던 거고. 제가 위험에 빠진 줄 알고 도와주시려던 거잖아요."

"아...."

시우의 말을 들은 순간 엘로아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마력의 파동을 느낀 순간.

엘로아는 습격자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올린 것은 오직 시우에 대한 의심뿐이다.

겉으로는 그를 믿겠다고 말을 해놓고서 정작 이상 현상이 발생하자 가장 먼저 시우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를 엿볼 일도 없었겠지.

"어... 아니었나요?"

기껏 해명하기 편한 창구를 만들어줬는데도 망설이는 엘로아.

그녀를 보며 시우는 짐작이 조금 빗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닐세."

엘로아는 더욱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엘로아는 간신히 시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뜨거운 홍차 위의 찻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시우도 대충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하나의 어렴풋한 추측이 사실이 되어 떠올랐다.

"절 믿지 못하시던 거군요."

"미안하네."

하긴, 이제껏 엘로아에게 어떠한 제대로 된 해명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신분을 공증해 주었고 또한 나름 무술까지 배우고 있는 입장에서 조금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대의 말대로, 그대를 의심하고 있었네."

"합당하다고는 생각합니다. 사실 아랫집으로 오신 것도 감시를 겸한다고 이미 말씀하셨으니까요. ...이해는 가지만 입맛이 쓰긴 하네요."

이성적으로 볼때 시우는 엘로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일한 복수의 대상이 죽고(혹은 행방이 묘연하고), 유일하게 남은 연결고리가 시우라면 당연히 예의주시하며 감시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조금 다르다.

불과 반나절 전에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던 티페레트가 여전히 색안경 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솔직히 좀 충격이긴 하다.

"미안하네... 나 역시 그대를 믿어, 아니 믿고 싶다고 생각하네."

"쉬운 일은 아니죠. 언젠가 오해를 풀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아니야. 그래도 이번 일은 나의 잘못이네."

엘로아는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술잔을 쥐지 않고 있던 시우의 손등을 살짝 어루만진다.

꽉 붙잡는 것이 아닌, 살짝 얹는 정도의 접촉.

"순간 이성을 잃었네. 나 역시 내가 왜 그런 치우친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대에게 몹쓸 짓을 했네. 변명할 생각은 없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티페레트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이건 조금 자의식과잉일지 모르겠지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공작님의 마음도 감히 충분히 이해한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우는 다정한 목소리로 답하며 불안해 하는 엘로아의 손등을 살짝 덮어주었다.

충격인건 충격인거고, 그렇다고 엘로아에게 야박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굳이 불편한 티를 내서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괴로워하는 사람이니까.

"술이나 더 얻어 마셔도 될까요? 아무래도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시우의 부드러운 말씨에 우는 상이 되어가던 엘로아의 표정도 살짝은 여유가 생겼다.

"대신 여기서의 대화는 꼭 비밀을 엄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 티페레트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지."

시우가 전달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교를 통해 마력을 흡수 및 증폭해 반환할 수 있다.

샤론은 불완전계승으로 위계가 낮아진 상태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료의 일환으로 시우와 주기적인 성교를 나누고 있다.

참 말해놓고도 꽤 낯뜨겁다는 생각이 계속되는 대화의 연속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엘로아는 예상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그리고는 머리가 복잡해 진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남성이 사정 시에 미약한 마력이 발생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은폐장을 뚫을 정도의 파동이라면, 이게 당최 어찌 된 일인지..."

시우가 답변해 줄 수 있는 것은 지난번 해명과 비슷했다.

그냥 '신기하죠? 저도 신기해요. 왜 그런지는 모릅니다' 수준의 답변이란 의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정작 시우 본인도 모르니 말이다.

"이해했네. 그런 연고가 있었구먼.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는겐가?"

"네, 말씀드렸다시피요."

"음.... 우선 알겠네."

엘로아는 이해가 갈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술을 조금 홀짝이더니 눈치를 보는 시선으로 시우를 바라보는 엘로아.

"그럼, 이제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네만..."

"네, 하시죠."

어느새 완전히 떠오른 해.

부엌까지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 아침햇살에 엘로아의 뺨을 붉게 물들였다.

조금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자 교미하는 뱀처럼 끈끈하게 얽혔던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다시 말해 그대와 에버그린 양의 치유 행위...를 목격하게 된 건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네."

말을 하던 중 부끄럽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는 엘로아.

"어쩐 연유인지 그대에게는 사과할 일만 잔뜩 생겨나는군."

"저는 신경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근데 샤론은 좀, 음, 많이 속상해하긴 하네요."

"그녀에게도 찾아가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지."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은데요.... 사과라면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런가?"

엘로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게 상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막상 엘로아가 샤론을 찾아가서 사과한다면 아마 샤론은 기겁하며 엘로아를 더 미워하게 되겠지.

아무리 돌려 포장한다 한들 '그대의 섹스 장면을 봐서 미안하네'같은 사과가 될 것 아닌가?

아무튼 대충 어떻게 된 사정인지 설명이 끝났으니 이제는 샤론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쓸 시간이다.

"저도 샤론 양의 명예를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공작님께서 들으신 마지막 대사 말입니다. 샤론이 했던."

"정말로 사고였다네.... 이미 잊었으니 괘념치 말게나..."

겨우겨우 미소를 짓고 있던 엘로아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내심 샤론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반응을 봤더라면 당장 눈물을 흘리며 창문을 와장창 깨고 뛰어내렸겠지.

정확히 어떤 말인지 언급도 하지 않았는게 곧바로 즉답한다는 건 그만큼 뇌리에 깊숙이 박혔고, 남사스러웠다는 증거니까.

"그건 제가 시킨 겁니다."

따라서 시우는 당당히 선언했다.

샤론에게 향할 수치의 화살을 어느 정도는 대신 받아주기로 한 것이다.

띠용? 하고 커다랗게 치켜떠진 엘로아의 두 눈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 그... 천박한 대사, 아니 실언이네... 그 민망한 대사를 그대가 직접 지시했다는 말인가?"

"네."

개꼴리거든요, 라는 말까지 붙일까 말까 고민하다 관뒀다.

수치사를 막기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장면, 샤론이 이 광경을 본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근데 상상 이상으로 쪽팔린다.

이제 엘로아가 보기에 시우는 여자와 섹스하면서 음란한 대사를 시키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게 될 테니.

잠깐 놀랐다는 기색을 보이던 엘로아는 미소를 지었다.

이 대목에 미소를 지을 타이밍이 있던가?

경멸 어린이나 최소한 어색한 거리감을 예상하던 시우로선 퍽 당혹스러웠다.

"그대는 거짓말이 능숙지 못하구나."

"네? 거짓말 아닙니다."

"알겠네."

단박에 거짓을 간파하고 씩 웃은 엘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달래주게나. 그대 말대로 내가 가봐야 공연히 서로 멋쩍은 일이 생길 것 같으니. 대신 이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함구하도록 약조하겠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함께 전해주게."

"넵,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앞으로 집을 방문해주실 때는 발코니로 넘어오시지 말고... 초인종을 눌러주실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리하겠네."

엘로아는 시우에게 새끼손가락을 쓱 내밀었다.

시우는 멍하니 그 손가락을 보았다.

티페레트 대공이 지금까지 보이던 행동과는 달리 꽤 유치한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시우의 반응을 살피던 엘로아도 퍼득 정신을 차렸는지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미안하네, 라피와 약속을 할 때는 항상 이렇게 했었어서..."

"아닙니다. 약속하죠."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단단히 얽혔다.

2.

시우가 돌아간 직후에도 엘로아는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마녀 세계에는 온갖 신통방통하고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특이한 존재였다.

설마 성교로 마력을 복사할 수 있고, 그렇게 증폭된 순수한 마력이 불완전 계승된 낙인을 되살리는 단초로서 작용하다니.

"그나저나...."

엘로아는 모든 삶을 마법을 갈고 닦는 데 바쳐왔다.

라피가 죽게 된 이후로는 그녀의 소원과 복수를 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 이외에는 어느 곳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따라서 남녀의 교합 장면을 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물론 남자와 직접 그렇고 그런 짓을 한 적도 없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고지식한 마녀들의 인생 테크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

"흐음...."

다소 낯뜨거운 광경이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상식과 눈앞에서 직접 본 장면의 차이는 꽤 커다란 충격을 선사해주었다.

술이 들어간 탓일까?

원래 이런 추잡한 회상 따위는 곧장 쳐냈을 텐데.

오늘따라 그것이 쉽지 않다.

엘로아는 침대에서 합체하던 샤론과 시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엎드린 샤론과 그 위를 반쯤 찍어누르던 시우.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던 굵고 커다란 그의 물건이 유독 선명히 떠오른다.

딱히 성욕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엘로아는 남성 혹은 여성을 대상으로 욕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느끼는 것은 일말의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큰 물건이 이렇게 작은 구멍에 들어온다는 것이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놀라울 뿐이다.

거기에 세상에서 마치 마약을 한 것처럼 달콤한 환락에 절여있던 샤론의 표정.

청순한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미모가 짐승처럼 흐트러지는 것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떤 쾌락이길래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있었을까?

한 번도 궁금해한 적 없던 사실에 대해 엘로아는 새삼 고민하게 되었다.

"그만두자."

엘로아는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에버그린 양에게도 신시우에게도 실례다.

오늘의 기억은 잊기로 하자.

엘로아는 그렇게 다짐했다.

"흐으음...."

다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엘로아.

아무래도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 일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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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궁뎅님이 그려주신 마녀도시의 남주인공 신시우 입니다!

설마 시우의 팬아트가 들어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은하철도 999를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드네요!!

저도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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