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24화 (224/917)

#224

1.

코코뱅(Coq au vin).

와인 속의 수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닭고기를 포도주에 오랫동안 끊인 스튜.

프랑스 요리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요리이다.

버터를 넣고 채소를 볶던 웍에 마리네이드가 끝난 닭고기를 투하했다.

손등에 튀는 기름을 무시한 채 센 불에서 껍질과 지방을 중심으로 익힌다.

닭고기의 표면이 보기 좋은 캐러멜 빛을 띠면 냄비에 옮겨 담고 예열한다.

오늘 마지막으로 부르고뉴 산 와인 두 병을 통째로 넣고 위에 허브를 뿌려주면 밑준비가 끝난다.

포도주 냄새가 잔잔히 퍼져나가며 보글보글 기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아 선생이 선물로 준 것이니 아마 좋은 와인이겠지.

그래서인지 냄비뚜껑 사이로 퍼지는 향기가 퍽 좋았다.

오랫동안 끊여야 하는 음식인 만큼 살이 질기고 단단한 수탉을 넣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마트에 있는 닭고기는 죄다 사이즈가 작았다.

결국 토종닭으로 타협을 본 엘로아는 냄비 뚜껑을 덮어 놓고 두 번째 요리인 부야베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쪽은 말하자면 프랑스의 해물탕이다.

갖은 고급 해산물에 토마토, 고추, 마늘, 양파 등을 넣고 월계수 잎과 타임 등으로 향을 더한다.

원래는 생선 뼈를 고아 육수를 만들어야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해물 스톡으로 대체했다.

이 두 요리는 엘로아가 가장 자신 있어 했고, 라피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요리를 한 것은 100년도 지났건만, 손과 몸은 두 가지 요리법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고, 또 조금 더 지났더라면.

그때는 요리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을까?

보글보글 끓어가는 냄비 앞에서 엘로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시우와의 대화 중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본 까닭이다.

'레노먼드 타운에서 기거하는 정통파 마녀들은 특히나 사고방식이 과거에 머물고 있으니 말일세.'

사고방식이 과거에 머물고 있다.

과거에 갇혀있다.

즉, 변함이 없다.

심해 깊이 가라앉은 바닷물처럼 그저 체류하고 고여있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이 다시금 곱씹자 마치 자신을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매일 밤 라피를 잃던 순간의 꿈을 꾸고.

다시는 되찾지 못할 과거에 괴로워하는 엘로아 티페레트에게.

"읏!"

"괜찮으세요?"

아주 잠깐 상념에 빠진 것 같았는데.

눈앞의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 하고 있었다.

엘로아는 황급히 불을 줄였다.

원래 코코뱅은 와인의 알코올을 날려야 하기에 느긋한 약불에서 오랫동안 끓여야 하는데, 이런저런 잡념에 깜빡하고 있던 것이다.

"...괘, 괜찮네."

"옮기는 건 도와드리겠습니다."

부엌 선반을 뒤적이며 그릇을 찾는 시우의 모습을 엘로아는 그저 바라보았다.

2.

먼저 부야베스가 완성되었고 뒤이어 코코뱅도 준비가 끝났다.

닭고기가 넉넉히 잠기던 포도주는 자작할 정도로 줄어들어 닭고기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다.

엘로아와 시우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 준비를 끝냈다.

"조금 더 이것저것 준비해주고 싶었는데. 오랜만이다 보니 깜빡한 것이 많군."

"아닙니다, 누가 해준 요리를 먹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요."

"차린 건 없지만 편히 들게나."

시우는 엘로아의 앞접시에 요리를 덜어주고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란히 식사를 시작하는 두 사람.

부야베스도 코코뱅도, 시우로선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는데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포도주와 토마토 양념이 안쪽까지 스며든 닭고기는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린다.

짭조름한 담백함이 가시면 향긋함과 쌉싸름한 뒷맛이 올라오는데 이게 또 별미였다.

외국 사람이 삼계탕을 처음 먹으면 대충 이런 감상이 아닐까 싶다.

부야베스도 겉보기에는 칼칼한 해물탕처럼 생겼는데 전혀 맛이 다르다.

바다를 한가득 담아 놓은 맛이랄까?

스프를 한입 뜨는 순간 버터내음과 퍼지는 각종 해산물의 짙은 풍미가 코와 혀를 즐겁게 했다.

"와, 처음 먹어보는데 굉장히 맛있네요. 둘 다 여태 이름만 들어봤는데."

"양은 넉넉하니 천천히 들게나. 술도 한잔하겠나?"

"좋습니다."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이긴 하네만... 코코뱅을 만들면서 다 써버렸네. 진과 위스키, 어느 쪽이 더 좋은가?"

"위스키로 부탁드립니다."

엘로아는 부엌으로 걸어가더니 위스키에 물을 1대1로 섞어내놨다.

식사와 함께하기에는 도수가 세므로 적당히 조절한 것이다.

엘로아 본인은 커다란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콸콸 부어 거의 끝까지 채웠다.

이걸 건배하고 마셔야 하나 그냥 마셔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엘로아가 먼저 잔을 들어 올렸다.

-짠

두 사람의 잔이 가볍게 맞부딪친다.

"술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네. 허나 취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감사할 따름이지. 자네는 어떤가?"

"좋아합니다. 기분도 좋아지고 숙취도 없으니까요."

술과 맛있는 음식이 들어갔기 때문일까?

두 사람의 대화는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매끄럽게 맞물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엄격한 목소리로 '다시'를 외치던 티페레트 교관님도 한결 느슨한 표정이 되었다.

그덕에 시우도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반주를 즐길 수 있었고 말이다.

"진짜 맛있네요. 술안주로도 좋은 것 같고... 이대로 가게라도 열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 근방에 팔면 잘 될 것 같은데."

"낯 간지러우니 그만하시게나."

"진심입니다. 속도 편하고 오랜만에 즐겁게 먹은 것 같아요."

먹는 내내 연이어진 시우의 칭찬에 엘로아는 점잖은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칭찬이 썩 기분 나쁜 것은 아닌지 입꼬리가 느슨하다.

"오늘은 최선을 다한 요리가 아니었네. 이것저것 대체로 넣은 것이 많으니 말일세. 다음에도 온다면 더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도록하지."

"이야, 벌써 기대가 되네요. 아, 잔은 제가 채워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시우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세 번이나 비어버린 엘로아의 잔에 술을 절반가량 따랐다.

마시는 속도가 정말 빠르다.

아무리 영체라도 술을 마시면 취하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면 대단한 술꾼인 모양이다.

이모저모 겉모습과 반전이 있는 공작님이다.

"라피와도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는데..."

느슨해진 마음을 틈타 넋두리처럼 흐르는 말.

그 말을 들은 시우가 흠칫하는 것을 본 엘로아는 아차 싶었는지 금방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공연한 말이지."

".........."

시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버린다.

덧없이 추억을 더듬고,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슬픔의 끝을 찾아 헤매며 방황한다.

"미안하네, 모처럼 흥겨운 자리였는데 분위기나 망쳤군. 주책이 없었네."

언뜻 강인해 보이는 티페레트 공작도 결국엔 한 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자를 잃어버린 슬픔을 잊지 못하고, 복수를 이루지 못한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한 사람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드릴까요?"

시우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취기가 오른 것인지, 아니면 그 취기가 불러일으킨 향수에 젖은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는 아지랑이가 뒤편에 놓인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네..."

사실 엘로아와 시우의 관계는 꽤 기묘하다.

시우는 라피의 그릇을 지닌 사람이고, 동시에 형식적으로나마 엘로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런 그를 가르치며 무의식적으로 라피의 뒷모습을 겹쳐보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외면하고 입에 담지조차 않았던, 행복한 나날들의 기억을 그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그저 아주 오랜만에 식탁 위에 오른 요리의 향기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가 그녀의 시계를 잠시 되돌려 놓았을지도 모른다.

시우가 말을 잇지 못하는 엘로아를 보며 경솔한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망설이던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라피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네."

그 목소리는 아주 먼 과거를 더듬는 듯이 아련하다.

"작은 새보다도 말이 많았어. 어찌나 쉴새 없이 재잘대는지 내가 평생할 말을 1년만에 다 하더군.... 그래도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 착한 심정을 지닌 아이였네."

엘로아는 술로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 아이를 사랑했네. 모자란 내가 견습마녀로 삼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아이였으니까.

게헨나의 그 누구도 라피를 미워하지 않았을 걸세. 짐승들도 예외는 아니었어. 길들이기 힘들다고 소문이 났던 준마도 라피가 앞에서면 손바닥을 핥아댔으니."

"........."

"그뿐이겠는가? 무도에 관해서도, 마법에 관해서도 천재였지. 나처럼 천재를 흉내를 내는 팔푼이와 다르게 말일세."

엘로아의 흐려진 눈동자에 추억이 고인다.

그녀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새겨졌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듯이 떠올랐던 미소는...

이어진 회상과 함께 침몰한다.

"하지만, 자네도 알겠지만... 잃고 말았네. 하늘이 내게 주신 과분한 축복을 나의 안일함으로 놓치고 만게야."

"...그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더.... 세상의 가혹함을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허망하게 떠나보내지 않아도 됐었을 텐데..."

엘로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울먹이는 목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목소리를 떨지 않고 울었다.

"가장 끔찍한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내겐 그 아이를 애도할 자격조차 없다는 거야. 참 얄궂은 일이지."

부서지고 황폐해진 인간이 어떤 식으로 슬픔을 보이는지.

시우는 처음 알았다.

"죄송, 합니다. 제가 괜한 걸 물어서...."

차마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시우가 아는 티페레트 공작은 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굳은 모습만을 보아왔으니까.

복수심에 불탈지언정 저렇게까지 위태롭게 속이 곪아갔으리라고는 미처 상상 못 했다.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려던 것이 도리어 그녀의 가슴에 내려앉은 피딱지를 긁어낸 것은 아닐까, 그런 미안한 마음에 잠겼다.

엘로아는 빈 술잔을 보더니 위스키가 절반 넘게 남은 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조금 천천히 드시는 게..."

"그대가 라피의 그릇을 지니고 있다 하여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건 아닐세. 걱정말게나."

"그걸 걱정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공작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걸요."

".....그런가."

수천 수백 수만 번을 반복했던 넋두리의 추체험일 뿐이다.

평정을 되찾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로아는 흐트러졌던 몸을 바르게 하고 턱밑으로 조금 흘렀던 위스키를 닦아냈다.

"술이 조금 과했군. 추태를 보였네,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가 괜히 말을 꺼내 괴롭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할 따름이네요...."

엘로아는 말 없이 손을 뻗었다.

술기운에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손이 시우의 안대를 걷는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새겨진 낙인에는 분명 라피의 그릇이 담겨있다.

"그대는 라피의 그릇을 품고 있지."

마녀에게 낙인이란 생명 이상의 무엇인가다.

"다시 이렇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못했었는데...."

100년이 지나고서야 엘로아는 사랑하는 견습마녀의 유품을 마주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세게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시우의 한쪽 뺨을 쓰다듬던 엘로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어느새 다가온 수면시간에 술기운이 더해져 더는 견디지 못했다.

시우는 테이블 위에 엎어지듯이 쓰러진 엘로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라피....라피...."

그녀는 잠이 든 순간조차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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