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23화 (223/917)

#223

1.

뜻밖의 해프닝 이후 샤론은 연구를 해야 한다며 방에 틀어박혔다.

하긴 그런 옷차림으로, 그런 멘트를 하며 문밖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정통으로 걸려버렸으니 부끄러움에 폭사할 만하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샤론을 확인했을 때는 공부는 고사하고 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퍽퍽 때리고 있었으니.

"다녀올게, 진짜 안 가?"

"아씨! 저리 가라고! 안 갈 거라고!"

시우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묻자 여태 풀 파운딩을 당하던 베개가 휘리릭 날아왔다.

멋들어지게 잡아챘다.

"별 생각 없으실 거야."

"제...제발... 그냥 이대로 있게 해줘..."

반쯤 죽어가는 샤론의 목소리에 단념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옷차림은 깔끔한 반바지 슬랙스에 반팔티.

이제 슬슬 밤이 되면 공기가 선선해지니 이렇게 입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티페레트 공작이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왕이면 사람이 많은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샤론도 불러오려고 했는데... 할 일이 많다고 하네요."

"그런가? 아쉽게 됐군."

엘로아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녀가 남의 일에 기웃거릴 정도로 경솔한 성격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상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말로는 아쉽다 말해도 그닥 아쉬워 보이지도 않고, 또 아까의 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잘 닦인 검처럼 언제나의 정숙한 예기를 은은히 품고 있을 뿐.

"어디로 모실까요?"

따라서 예상하지 못했다.

"집들이라 했으니... 내가 손수 대접하는 것이 도리겠지."

"네?"

"우선 장을 좀 봐야겠군. 집에 식자재가 하나도 없으니 말일세. 근처 상점으로 안내해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설마 그녀가 직접 요리를 해서 접대해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시우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엘로아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신촌 로터리에서 나와 가도를 따라 걷다 왼쪽으로 꺾으면 백화점이 나오는데 지하 1층이 푸드코트와 식료품 매장이다.

대형마트처럼 가짓수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고 가장 가까운지라 시우도 애용하던 장소였다.

그나저나 걸어서 15분 거리를 동행하는데 서로 말 한마디가 오가지 않는다.

대련이 아닌 일상에서의 엘로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시우는 힐끗거리며 엘로아의 아리따운 옆태를 감상했다.

이게 딱히 흑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마치 아름다운 예술품에 자꾸 시선이 끌리는 듯한 감상에 가깝다.

그래서 감상평을 말하자면....

'만약 현실에 마법소녀가 있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꽤 귀엽다.

발칙하고 황송한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길고 짙은 쌍꺼풀과 긴 속눈썹을 얹은 커다란 눈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꽤 작고 아기자기했다.

키도 그렇게 큰 편이 아니고, 머리도 무용하는 사람처럼 작다.

그 작은 얼굴에 다 들어가야 하는 코입귀도 죄다 작았다.

평소에는 분위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외양만 보아선 연장자라기보다는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쌍둥이가 띠동갑 막내 동생이라면 엘로아는 제법 의젓한 첫째 여동생 정도?

그렇게 겉모습만 관찰하며 경외심이랄까 두려움이랄게 없어지려던 찰나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역시 분위기가 다르다.

곧은 눈썹과 시선은 무심한 듯 가라앉아 있다.

선이 여린 흐릿한 입술 역시 꾹 다물린 채 아주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진지하다.

걸음걸이가 경박하지 않고 자로 잰 듯이 일정하다.

그런 면모를 살필 때마다 생각하게 되었다.

겉보기로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말이다.

"아, 제가 끌겠습니다."

"고맙네."

아무튼 시우는 백화점에 도착해 카트를 뽑을 때가 되고서야 겨우 말을 붙여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녀를 관찰하기 바쁘기도 했고 원래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엘로아는 육류 코너로 향하더니 백숙용 닭 두 마리를 카트에 담았다.

이어 채소 코너에서 당근, 양파, 감자, 양배추, 버섯 따위의 것들도 집어넣는다.

그 손놀림에 거침이 없는 것을 보면 이미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정해놓은 듯했다.

착각일 수 있지만 그 모습이 평소보다 어쩐지 들뜬 듯했기에 물었다.

"요리 좋아하시나요?"

엘로아는 시우가 말을 건 것이 퍽 의외였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앞으로 접점이 많을 것 같은데 친해지면 좋을 것 같고,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대화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이 했었지."

"아하."

하지만 시우도 말주변이 있는 편이 아니다.

더군다나 담당교수와 대학원생보다 아득히 신분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는 무슨 주제로 대화를 이어갈지 감이  오지 않았다.

뜻밖에 엘로아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네. 그러니 기대는 너무 말도록."

겸연쩍은 듯한 말투로 말한 뒤 몸을 돌린 엘로아는 이번에는 해산물 코너로 이동해 이것저것을 담아 들었다.

도대체 뭘 만들어주려고 이 정도로 사들이는지 모를 정도 많이 담는다.

가시가 발라진 대구 필레, 새우, 랍스터, 키조개를 비롯한 조개 등등을 사들인 그녀는 마지막으로 팩에 포장된 믹스허브와 월계수 잎을 구입하고 현금으로 계산했다.

돌아오는 길.

시우의 양손에는 식재료가 한가득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엘로아가 들겠다고 나서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고 직접 든 것이다.

"신기하군."

"네?"

"처음 이곳에 위치포인트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서울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이네. 좀 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였지. 건물보다는 산이, 사람보다는 나무가 많았어. 많은 나라를 둘러보았지만 이토록 짧은 기간에 뒤바뀐 곳은 서울 정도일 것이야."

"언제 세우셨나요?"

"1920년.... 그쯤이었던가?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서방국가로 진출하는 교두보 같은 곳이었으니 특히 공을 들였지."

말을 보고 짐작은 했지만 너무 까마득한 옛일이라 공감이 가질 않는다.

시우의 반응을 보고 엘로아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그대는 아직 30년도 살지 않았다 했던가? 공연한 말을 늘어놓았군."

"아닙니다. 뭔가 신기했어요. 살아있는 역사를 보는 기분이네요."

"수아 선생을 보면 더 신기해할 걸세."

그렇게 그닥 의미 없는 잡담을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시우의 아랫집 주민, 엘로아의 새집에 입성했다.

2.

처음 그녀의 집에 발을 들였을 때 시우는 조금 아연했다.

같은 건물의 바로 아래층이니 집 구조는 완전히 똑같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달랐다.

이사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음을 고려해도 소파와 테이블 정도의 기본적인 가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개인용품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압수수색 해온 자료처럼 거실 한 쪽에 쌓여있는 파란 박스 3개?

그마저도 삐죽 튀어나온 종이를 보니 호문쿨루스나 공적에 관한 것이니...

집이라기보다는 도망자의 은신처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무런 생활감이 없다.

그녀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 목적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부엌 식탁에 놓아주게."

"네, 네..."

어쩐지 숙연해진 시우는 짐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부엌에 오고 나니 그나마 티페레트의 개인용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보인다.

선반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술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텐데 괜찮겠나?"

"저는 상관없습니다. 거들어 드릴까요?"

"그럼 고맙겠네."

엘로아는 바람막이를 벗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먼저 빠른 손놀림으로 재료를 분배하기 시작한다.

채소는 채소대로, 손질이 필요한 고기와 해산물들도 따로따로, 세척이 필요한 것들은 죄다 싱크대 안에 넣어두었다.

"먼저 채소의 손질을 맡아주게나. 특별한 건 없고 흙을 털어 깨끗이 씻어주기만 하면 되네."

"이쪽은요?"

"하는 김에 할 수 있다면 해산물 세척도 부탁하지. 물 때가 없어지도록 이쪽 솔로 문질러주게나."

"넵."

시우는 물을 틀고 열심히 감자와 양파, 그리고 해산물을 씻기 시작했다.

엘로아는 이미 손질이 완료되어있는 생닭을 가볍게 물에 헹구더니 물기를 제거하고 후추와 소금, 그리고 올리브유로 마리네이드를 했다.

어째 퍽 익숙한 모습이었다.

"먼저 당근과 양파를 주게. 아, 그리고 마늘도."

"여기 있습니다."

도마를 펼치고 식칼을 꺼내든 엘로아.

그녀의 손이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자 하나의 껍질을 모두 제거하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탕탕탕탕탕

"오...."

껍질을 벗긴 채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내는 것을 보며 시우는 입술을 모았다.

빠르고 정확하다.

도마 위에 칼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낼 때마다 정확한 크기로 예쁘게 썰려나가는 갖은 채소들.

오랜만에 한다는 것치고 너무나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해산물도 주겠나?"

"네, 이것만 마저 씻고 드리겠습니다. 아직 덜 닦여서요."

그렇게 답한 시우는 열심히 솔질해 달라붙었던 물때를 제거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엘로아가 말했다.

"그대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군."

"아, 노예 경력 때문이 아닐까요?"

갑작스러운 칭찬해 당황한 시우는 머쓱해 하며 답했다.

"그러고 보니 게헨나 노예 생활을 했다지. 어디 출신이었는가?"

"레노먼드 타운의 트리니티 아카데미 소속 공노예였습니다."

"레노먼드 타운이라.... 고지식한 마녀들 사이에서 고생이 많았겠군."

"그런가요?"

엘로아는 시우가 건넨 살아 움직이는 랍스터를 받아 들었다.

잠깐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세 마리의 랍스터의 숨통을 끊었다.

"레노먼드 타운에서 기거하는 정통파 마녀들은 특히나 사고방식이 과거에 머물고 있으니 말일세. 그대가 노예로서 겪어야 했던 고통도 짐작이 가."

"제가 많은 분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외부의 마녀님들이 좀 더 자유로운 느낌은 강한 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뭐, 게헨나에도 좋은 분은 많았습니다."

"마녀들이 밉지 않은겐가?"

"새옹지마라지만 결국 게헨나로 잡혀 온 덕에 죽을 운명에서도 벗어나고 마법도 배웠는걸요. 좋은 인연도 만들었고요."

엘로아는 그리답하는 시우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관상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삶의 자세와 태도는 얼굴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시우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은 선한 인상이었다.

"어...."

영문을 알 수 없어 조금 당황한 시우가 쭈뼛거리자 옅은 웃음을 흘리는 엘로아.

"그대도 아까 날 힐끗힐끗 훔쳐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도 보았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 있겠나?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은 신기해하는 머리카락 색이긴 하지. 구태여 훔쳐볼 것 없이 부탁했다면 보여주었을 것이야."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은 단순히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이 특이해서가 아니었지만...

구태여 진실을 알리지는 않았다.

어느덧 부엌에서는 향긋한 버터 내음과 채소가 볶아지는 향기로 가득했다.

재료 준비가 다 끝난 시우는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거실에서 기다리게나.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

"더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마음만 받겠네, 이 이상 손님을 주방에 세우는 것도 호스트로서 못 할 짓이야."

그렇게 거실로 돌아와 멀뚱히 기다리게 된 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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