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1.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동작으로 발현되어 육안으로 관측할 수 없는 암경(暗勁).
적과 밀착한 상태나 극히 짧은 거리에서 발현되는 촌경(寸勁)
원거리에서 기를 쏘아 보내는 탄경(彈勁).
방어를 무시한 채 적의 내부만을 박살 내는 침투경(侵透勁).
중국발 무협지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발경은 더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는 다채로운 기술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편리한 설정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엘로아가 새로이 정립한 발경은 매우 단순했다.
물리법칙에 의해 생겨나는 작용과 반작용.
본래 필요하지 않은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생겨나는 낭비.
필요 이상의 긴장에서 발생하는 억지힘 즉, 졸력.
이렇듯 인간이 어떤 동작을 할 때는 필연적인 힘의 분산이 발생한다.
그 분산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하나의 점, 극점에 모아 제련한다면?
주먹을 단순히 팔의 힘으로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뻗는다면?
인간은 능히 손가락 하나를 뻗을 힘으로 벽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즉, 발경이란 극도로 정제되고 집약된 힘으로 행해지는 동작인 것이다.
엘로아는 숨 쉬듯 이것을 행할 수 있었고 모든 검술에 응용했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요?"
"거의 비슷했네. 다시 해보게나."
마력을 사용하게 된 시우는 단 한 번의 시도로 거의 비슷하게 엘로아의 발경을 흉내 냈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의 발치에 생긴 필요 이상으로 커다란 크레이터가 이를 증명한다.
진각을 뻗는 단계에서 미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힘이 디딘 땅을 부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크기라면 올곧게 뻗어 나갈 힘이 주위로 분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음은 틀림없다.
"후웁....!"
시우는 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너무 크게 쉬지 말게나. 몸이 무거워지네. 일수에 불과한 동작일지라도 몸을 가볍고 영활하게 하게나."
"네."
시우는 긴장을 풀고 다시 머릿속에서 엘로아의 움직임을 본뜬다.
그녀가 어느 타이밍에 어느 부위에서 마력을 가속했는지를 끊임없이 반추했다.
그리고 머릿속의 박자에 맞춰 주먹을 내민다.
-퉁!
"아..."
이번에는 시우 쪽에서 먼저 실책을 깨달았다.
맥아리 없이 흩어지는 소리.
자연스럽게 주먹을 뻗던 도중 방지턱에 걸리는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주먹을 뻗을 때는 하체에서 몸의 중심을 거쳐 다시 상체로 통해야 하네. 배분이 잘못되거나 힘의 전달이 끊어지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네. 다시."
"네!"
"다시 해보게,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네. 그대의 머릿속에 있는 심상을 그대로 현실에 베껴 적는다고 생각하게."
"네!"
"그렇다고 너무 심상에 매몰되지 말게나.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몸이 늦어지네. 중도가 중요하네."
"네!"
몇 번의 실패와 몇 번의 조언이 오갔다.
시행착오를 거친 시우의 몸은 천천히 특유의 타이밍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중요한 건 자세가 아니다.
올바른 타이밍에 몸을 떠미는 마력의 가속이다.
-삐걱!
시우의 발바닥이 바스러진 시멘트 조각을 비튼다.
땅을 밀어내는 힘은 몸을 위로 띄우지 않고 도리어 아래로 잡아끌었다.
기둥처럼 굳건한 다리를 파고든 경(勁)은 골반의 회전을 통해 등 배근으로 향하고 장전되듯 상체로 전달된다.
이제 남은 것은.
어깨와 팔, 주먹을 이르러 절도 있게 끊어칠 뿐.
-쾅!
시우의 주먹이 허공을 내지르자 티페레트가 했던 것과 똑같은 소리가 났다.
고작 주먹을 질렀을 뿐인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전신말단이 동원되어 합일(合一)하는 듯한 일체감.
손끝에 저릿저릿 진동이 남았다.
미처 발출되지 못한 힘의 잔재가 몸을 징처럼 웅웅 울린다.
"와우...."
시우는 경탄성을 뱉었다.
방금 것이 성공하는 순간 '아 나는 몸을 존나 막 쓰고 있었구나!'를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뭔가 격투게임에서 처음으로 복잡한 커멘드가 많이 섞인 콤보를 성공한 기분이었다.
실상은 고작 주먹을 멋지게 내지른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성공한 거 맞나요?"
"........"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시우를 보면서도 엘로아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기술이지만 발경은 꽤 까다로운 기술이다.
엘로아는 발경의 필요한 요소를 3가지로 간략화했다.
완벽한 몸의 움직임을 심상에 그리는 심.
그 움직임을 따라가며 마력으로 보조하는 기.
실제로 움직임을 실현하는 운동능력을 뜻하는 체.
이 모든 것이 기준치를 달성하고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뤘을 때 묘리에 다가서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우는 '체' 항목에서 미달이었다.
그의 체는 심을 완전히 담아내기에 부족했다.
그런데도 발경을 선보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기'에 있다.
수족 이상으로 자유롭게 다루는 마력이 전신에 뻗은 회로를 타고 흐르며 부족한 체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것이다.
경로는 달랐으나 목적지는 같았다.
어찌 됐건 그는 훌륭히 발경을 선보였다.
엘로아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재능'이라 칭하기에 아쉬움이 없었다.
"느낌을 알겠으면 반복해서 수행해보게."
"넵!"
시우는 곧장 아까의 느낌을 떠올리며 붕권을 반복 연습했다.
원래 운동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한번 감을 잡은 동작은 몇 번을 반복해도 그럴싸하게 나오는 법이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되는 실수를 거듭했던 시우지만 이미 그 몸 전체의 떨림과 손끝의 진동, 그리고 타이밍을 기억하기에 어렵지 않게 연달아 성공했다.
-퉁! 퉁!
연거푸 내질러진 주먹이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월척을 낚은 듯한 그 손맛에 시우는 가슴의 전율을 느꼈다.
요 며칠간 제자리걸음만 한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눈에 딱 보이는 성취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공작님! 성공했습니다! 와, 이거 진짜 엄청난데요? 뭔가 힘이 새어나가는 느낌이 하나도 없어요!"
기뻐하는 시우의 모습 위로 과거의 회상이 덧씌워진다.
관리를 잘못한 유채화처럼 흐릿하게 번진 추억은 엘로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심장을 들쑤셨다.
'스승님 어때요? 드디어 성공했어요! 이름도 붙여주기로 했는데 들어보실래요? 보세요... 오의! 천룡파천역발산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라피의 허상이다.
떨리는 눈꺼풀을 깜빡이자 현실처럼 선연했던 환각은 사라지고 멍하니 서 있는 엘로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우만이 남는다.
그러나 죄과, 업, 자책은 허상처럼 흩어지지 않고 달궈진 인두처럼 가슴을 지져댔다.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시우는 선뜻 걱정 가득한 시선을 보냈고 엘로아는 뜨거워진 눈시울을 질끈 감았다.
"괜찮네, 아무것도 아닐세.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네."
"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티페레트는 이면 결계를 거둬들였다.
박살 났던 옥상은 역재생되는 것처럼 수복되고 도시 특유의 소음이 시끌벅적하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모처럼 붕권을 성공해 기분이 좋아졌던 시우는 굉장히 우울해 보이는 엘로아의 표정에 당황했다.
혹시 뭔 잘못을 했나 괜히 눈치를 보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은 엘로아의 의중을 헤아리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아, 그대에게 깜빡하고 전하지 않은 말이 있군. 오늘부터 그대의 아랫집에 머물게 되었네."
엘로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지만 꽤 둔한 편인 시우가 보기에도 어딘가 울적함이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서울 대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스모그 같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의식적으로 전환한 가벼운 목소리로는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오늘부터 말입니까?"
"그래, 너무 신경 쓸 것은 없어. 내 달리 그대에게 간섭하거나 하는 것도 없을 테니.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네."
보통 수련이 끝나면 엘로아가 먼저 자리를 비우고, 시우는 옥상에 남아 담배를 태운다.
하지만...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가려는 엘로아의 축 처진 어깨.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우도 대충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있었으니 말이다.
아주 어렴풋이 하는 추측이다.
또한 주제넘은 억측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엘로아는 이 수업에서 잃어버린 견습마녀를 떠올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뿌듯하다는 듯 시우를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얼이 빠져버린 표정도 이해가 간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특별히 일정이 있으신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엘로아를 붙잡고 있었다.
솔직히 시우에게 티페레트 공작은 꽤 어려운 상대였다.
일단 서로의 직위 차이가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수업에서 그녀가 보였던 모습 때문이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시우에게 쓴소리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엄했고 교관처럼 무서웠다.
뿐만 아니라 마력도 무엇도 사용하지 않은 대련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엘로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시우를 죽이는 것은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인지 꽤 마음의 거리를 두고 대했었는데...
엘로아는 느릿하게 시우를 돌아보았다.
"특별히 없네."
"그럼 벌써 이사는 끝나신 건가요?"
"들고 다니는 물건도 없으니 수아 선생이 알아서 해주었겠지."
그렇다면 저렇게 우울한 감정을 느끼고 혼자 방에 틀어박힌다는 것 아닌가?
괜한 오지랖일까 싶어 걱정되기는 하다.
그래도 그간 가르침을 받은 정이 있다.
또 시우는 티페레트라는 마녀가 아닌, 엘로아라는 인간 자체에 호의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건 그녀가 인간을 위하는 몇 안 되는 마녀이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은 시우에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집들이 기념으로 식사나 같이하실래요?"
"식사...를 말인가?"
"네, 이 근처에 맛있는 곳도 많고. 어차피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해서요."
그렇다면 혼자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함께 식사하는 편이 즐겁지 않을까?
같은 생각으로 한 제안이었다.
뭐, 무려 신분을 공증해준 공작님이기도 하니 조금 더 가까이 지내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기도 했고.
하지만 엘로아는 몇 초 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역시 좀 너무 갔나?
"아, 그냥 한번 말씀드려봤습니다. 불편하시다면 다음으로 미루죠."
"...아닐세. 좋네."
고개를 끄덕이는 엘로아의 얼굴에 조금은 그림자가 걷혔다고 여겨진다면 착각일까?
두 사람은 사이좋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럼, 옷만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려주세요."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치는데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시우야 오늘 평소보다 일찍 왔네? 많이 힘들지? 또 내가 씻....."
오늘 오전 알몸에 와이셔츠 차림에서 야릇한 팬티만을 추가로 입은 샤론이 준비만만의 상태로 뛰쳐나왔다.
무엇을 위한 준비였는가 하면 구태여 말하기도 입 아프다.
아마 현관의 비밀번호가 입력되는 소리를 듣자마자 공부 중에 튀어나온 것 같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시우와 뜨거운 시간을 보낼 예정이던 샤론의 표정이 쩡 굳었다.
아직 열려있는 현관문 너머로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는 티페레트가 보인 까닭이다.
-쾅!
문이 부서질듯 닫혔다.
"......."
"......."
티페레트와 시우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가운데.
잠시 뒤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삶은 문어처럼 얼굴이 빨개진 샤론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방금 입고 왔는지 옷도 제대로 걸치고 있다.
"어, 어서...오세요.... 공작님...."
"딱히 들어가려던 아니네만..."
"아, 그, 그러시구나..."
"저도 금방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알겠네."
시우가 문을 닫자마자 샤론은 눈물이 글썽이는 눈빛으로 시우의 팔뚝을 팍팍 때렸다.
"말을 해야지...! 말을 했어야지...!"
"악! 악! 아니! 니가 뛰쳐나와 놓고는 무슨 소리야!"
"난 몰라, 난몰라아!!!"
숨죽인 샤론의 절규에 시우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이게 웃겨? 웃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