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1.
농후한 마력은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폭풍이 된다.
낮은 소리와 함께 대기를 울리며 사방에 금빛을 흩뿌리는 찬연한 마력 반사광을 보며 엘로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사냥하는 티페레트 공작.
많은 공적을 적으로 두었지만 그만큼 그녀를 선망하고 동경하는 마녀 또한 적지 않다.
그런 이유로 현세를 떠돌다 보면 그런 그녀에게 가르침을 요청하는 마녀가 많았다.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안전을 위해서, 더욱더 높은 마법의 성취를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제각기 그럴듯한 이유와 포부를 지닌 채 찾아오면 그녀는 선뜻 갈고 닦은 무예를 전수해주곤 했다.
'이건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생각과는 다르네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보통 2주도 지나지 않아 포기한다.
마녀들이 인내심이 부족하거나 끈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마녀는 통상적으로 그 어떤 인간보다 집요하고 근면하다, 어떤 면에서는 광기라 해도 좋을 만큼 말이다.
그런 마녀들이 빠른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그 정도의 시간이면 계산이 서기 때문이다.
'이걸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앞으로 득 볼 것이 없다'라는 계산이.
티페레트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마녀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무언가 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엘로아는 수련이 시작된 지 3일 이후.
즉, 시우가 체술에 관해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그를 다른 마녀와 동일 선상에 두었다.
'이제 곧 그만두겠구나'라며 짧은 낙담과 함께 받아들였다.
따라서 제대로 확인해 볼 생각조차 못 했다.
그가 어떤 재능을 지녔으며, 어떤 부분에서 강점을 보이는지.
어떻게 평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가 숱한 전장에서 살아남았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더 부족한가요? 이제 슬슬 힘든데."
이제 슬슬 힘들다고?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도 맺혀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마 그가 작정한다면 이것의 두 배 네 배가 되는 마력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모두 신체 강화에 사용했다간 영체가 터져버릴 걸세."
"그렇겠죠...? 사실 이만한 양을 전부 다룰 수도 없습니다."
시우가 가볍게 손짓하자 마력 중 절반 정도가 빠르게 소멸했다.
자유자재로 마력을 다루는 그의 모습에 티페레트는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력의 통제에 관해 얼마나 깊은 성취를 지녔는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줄여보겠나?"
"네, 이 정도면 될까요?"
그렇게 몇 번의 마력을 줄이고 티페레트가 생각하기에 마력 회로를 통해 강화를 진행해도 무리가 없겠다 싶은 정도만 남겼다.
"좋네, 처음 활용하기에는 적당하겠군."
엘로아는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가 기대감으로 가벼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방법을 알려주겠네."
"네, 부탁드립니다."
"잠시 앉아보게."
"넵."
시우가 가부좌를 틀고 앉자 엘로아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본디 신체 강화는 낙인에서 시작되어 마력회로를 타고 말단까지 일주천하며 이루어지네. 허나 그대는 낙인의 위치가 다르니 조금 수정을 가해야겠어.
지금부터 내가 그대의 마력을 유도할 걸세. 순서를 잘 기억해두게나.
물론 그대에게 위해를 끼치거나 함부로 무엇인가를 염탐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괜찮겠나?"
엘로아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언제나 신중하고 진중한 말투를 구사하는 엘로아지만 지금은 특히나 더했다.
자신의 마력 제어권을 넘겨주는 것, 혹은 타인의 마력을 자신의 체내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는 모두 극도로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주 조그마한 악의나 실수가 섞여든다면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내상을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마녀들에게 신체 강화를 가르칠 때도 이 부분에서 고개를 내저은 마녀들이 많았다.
"에이,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우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엘로아를 기다렸다.
고작 보름, 게다가 그렇게 열의에 찬 수업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는 선뜻 자신의 무장을 해제해 보인 것이다.
시우는 그런 위험성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나선 것이지만 엘로아에게는 그것이 막대한 신뢰의 증표로 여겨졌다.
"공작님?"
"아, 알겠네."
엘로아는 주춤주춤 하얀 손을 뻗어 시우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가능한 움직이지 않는 게 좋네."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마력이 아주 조금 시우의 몸 안으로 스며든다.
마치 마중물처럼 회로 안을 파고든 엘로아의 마력은 천천히 시우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엘로아는 시우의 마력 회로를 고스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좌안의 낙인을 중심으로 신체 곳곳에 뻗어있는 회로.
양백혈을 거쳐 백회혈로 마력을 유도한 엘로아는 서서히 그것을 전신으로 퍼트리기 시작한다.
"........"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어느 한쪽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가는 못 볼 꼴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됐네, 기억했나?"
신체를 강화하는 것은 보기보다 까다롭다.
정확한 순서로 마력을 부여하지 않으면 마력의 꼬임이 발생한다.
또한 관절의 움직임과 근육량을 고려해 정확하게 차등분배 하지 않으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가령 주먹을 뻗는 동작을 취할 때 주먹에 10의 마력이 부여되었는데 어깨에 2 정도 밖에 부여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탈구 등의 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 그 과정은 복잡하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한 번에 기억하긴 쉽지 않겠지. 다시 한번 해주겠네."
"아, 기억 자체는 한 것 같습니다. 잠시 되새겨보고 있었어요."
"그런가?"
조금 전 시우에 대한 기대감이었더라면 허튼소리 말고 다시 잘 살펴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마력의 증폭을 보고 난 직후에는 그것이 마냥 허황한 만용으로 보이지 않았다.
"보여주시게."
자리에서 일어난 시우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더니 마력을 몸 곳곳으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엘로아가 시범차 선보였던 마력 양보다 훨씬 많은 힘이 알맞고 올바르게 몸에 분배된다.
"와.... 진짜 되는군요."
"조심히 움직여보겠나?"
"이런 식으로요?"
"조심하게...!"
-붕!
엘로아는 가볍게 걷는 정도를 제안한 것이지만 시우는 가볍게 잽을 하듯 허공에 주먹을 날려보았다.
갑옷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초인이 된 듯한 전능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휘둘러진 주먹이 허공을 찢는다.
연이어 몸을 휙휙 움직여 보았다.
빠르게 좌우로 번갈아 뛰거나,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몸을 날린다.
정말 가볍게 발로 땅을 찼을 뿐인데 거의 20M 가까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착지했다.
엘로아와 대련을 하며 어느 정도 몸에 익은 체술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
엘로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걸음마를 가르쳐주었던 아기가 '흠, 좀 알 것 같은데?'하고 곧장 윈드밀하는 것을 보면 대충 이런 기분일까.
아무튼 간에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용력이다.
"훅! 훅! 훅!"
시우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승룡권이나 나뭇잎선풍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공작이 지켜보고 있는 관계로 어설픈 쉐도우복싱으로 대체했다.
몸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갑옷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1)몸의 움직임을 미리 생각한다.
(2)그에 맞춰 갑옷을 움직인다.
(3)그 안의 몸이 움직인다.
라는 과정에서 (1), (2)이 생략되니 아주 작은 딜레이나 오차 없이 생각대로 몸이 움직인다.
굳이 비유하자면 모니터 상의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하느냐, 아니면 직접 손으로 터치를 하느냐 정도의 체감 차이가 났다.
엘로아는 혼란스러웠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던 시우의 움직임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뭐랄까, 그동안 숱하게 만나온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 그 자체였다.
하지만 되려 마력으로 영체를 강화하자마자 오히려 모래주머니를 벗은 듯이 움직임이 자유롭다.
번번이 타이밍이 어긋나던 손과 발도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엘로아는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는 꽤나 정확히 가르쳐주었던 것을 심상에 품고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할 정도의 운동신경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실현해내지 못했다.
속력이 떨어진 자전거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몸이 따라오지 못하던 동작이 마력의 보조를 받자 고스란히 실현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는 몸이 아닌 마력을 다루는 천재였던 것이다.
경악도 잠시 불쑥 호기심이 생겼다.
"시우 군."
"네, 공작님. 덕분에 좋은 거 알아갑니다."
"이것도 따라 해 보겠나?"
엘로아는 한 번 호흡을 들이쉬었다.
앞발을 끌어 뒷발에 바짝 붙이고 마력을 실어 진각을 내디딘다.
양다리를 기마자세처럼 구부리되 뻗는 앞발은 디딤발과 직각이 되도록.
땅을 밀고, 그 힘을 낭비없이 다리로 집약한 뒤 허리를 회전시키며 가속한다.
등까지 끌어올린 힘을 축으로 삼은 채 회전함, 동시에 마력으로 가속.
마지막으로 어깨, 팔꿈치, 손목, 주먹까지 이르는 모든 힘을 극점(極點)에 모아 정면으로 발출하면...
-쾅!
세로로 쥔 엘로아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철판을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에도 맞닿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어느새 그녀를 지탱하던 옥상 시멘트가 쩍 금이 가며 갈라지는 모습이 보인다.
엘로아가 검술을 쓸 때 본능적으로 응용하는 기본 중의 기본.
발생하는 모든 힘을 누수 없이 일 점에 모으는 극의, 발경(發勁)이었다.
"오쉣... 붕권...."
시우는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과거 저걸로 두들겨 맞은 기억이 있어 내장이 좀 쫄깃해지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멋있다.
일순 나풀거리던 연분홍의 머리카락이 정돈되며 엘로아는 후우 호흡을 뱉어 잔심했다.
"자, 해보게."
"이걸 따라하라는 말씀이셨나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팔다리를 휘적이는 것이라면 시늉이라도 냈겠는데 무슨 무술의 달인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태연하게 따라해 보라고 하면 '이걸 내가 어떻게 해!'라는 생각이 자연 드는 것이다.
"간단하네. 몸을 최대한 이완시키고, 필요한 근육만을 사용하는 걸세."
그게 말이 쉽지...
"하지만 자네는 여기서 차별점을 두지. 몸을 움직이려 들지 말게."
"몸을 움직이지 말라고요?"
"그래, 몸은 힘을 뺄 수 있는데까지 빼고 마력 회로 안의 마력만을 집중시킨다는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해보게나."
"....몇 번 더 보여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지."
엘로아는 조금 전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가 참고할 수 있게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마력으로, 똑같은 힘으로, 똑같은 타이밍에 손을 내지른다.
얼핏 보기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나 아주 대단한 경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몸은 1mm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으니 말이다.
그것은 멀리 뛰기를 하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거리에 같은 자세로 착지하는 것과 같았다.
엘로아의 신체 통제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후우... 어떤가?"
시우는 엘로아의 시범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자세나 동작 따위가 아니었다.
마력의 흐름을 시각화할 수 있는 좌안으로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마력이 분배되는지, 어떻게 가속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지켜보았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러게나."
무심한 듯 기대가 넘쳐나는 엘로아의 시선을 받으며 시우는 머릿속에 떠올린 그녀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쿠우웅!
그리고.
옥상 위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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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피폐조아 님이 제공해주신 커미션 작품!!!
어린 시절 아멜리아와 선대 메리골드의 행복한 순간들입니다...!!!
정말 화목해보이지 않을 수 없네요.... 귀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