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18화 (218/917)

#218

1.

수련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일방적인 대련이 끝난 뒤.

엘로아는 그녀가 머무는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 오후에 수아 지부장과 약속이 잡혀있으나 일정보다 수련이 빨리 끝나게 되어 시간이 남았다.

라운지에 앉아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골똘히, 오늘 있던 일을 되뇌었다.

애초에 '만병지왕의 계약'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가르침을 제안했던 것은 엘로아 자신이 먼저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미리 밝혔던 대로 그를 주변에서 보호 및 감시하며 만에 하나 있을 에아의 간섭을 기다리기 위하여.

나머지 하나는...

혹시 그를 보며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라피의 아름다운 검무, 그 검무를 한 조각이나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제 라피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

그러나 엘로아의 기대는 보기 좋게 허망한 방향으로 흘렀다.

만병지왕의 계약은 분명 근접 전투에 있어 더 없이 유용한 자성마법 중 하나이다.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이면 좋을지, 어떤 식으로 병기를 다루면 좋을지를 자연스럽게 알려주니까.

그러나 똑같은 고성능 이륜차에 오른다 해도 일반인과 선수의 아웃풋이 전혀 다른 것이다.

시우의 움직임은 라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볼 수 없겠지.

"아쉬울 따름이지."

이 일이 시우를 책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실제로 딱히 책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멋대로 기대감을 품고 있던 자신에게 씁쓸한 조소를 날릴 뿐.

"무엇이 말이옵니까?"

커피를 홀짝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엘로아의 맞은 편에 수아 지부장이 앉았다.

며칠간 일전의 사고 수습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 보이는, 언제나 단정하고 기품있는 수아 지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현대식으로 개량한 것도 아닌 오색빛깔로 화려하게 치장된 한복.

그녀가 맞은 편에 앉는 것만으로 화려한 호텔 라운지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만 같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군."

"소녀가 귀주를 기다리게 할 리 없지 않사옵니까."

수아는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런 애교 있는 말조차 평소에는 거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니, 지금 수아 지부장은 기분이 좋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새로운 제자를 들이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제자랄 것도 없네. 하잘것없는 가르침을 줄 뿐이니."

"신분을 공증하시고 뒷배경까지 봐주시는데 무(武)의 전수까지 이루신다면 제자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사옵니까?"

"선생, 오늘따라 농이 과하군."

겸연쩍어하는 티페레트를 보며 수아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티페레트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제자를 잃게 된 이후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던 티페레트를 보았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현실을 부정하며 공허함과 허무함에 망가져 가던 티페레트도 보았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복수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었으니 오랜 벗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싱글벙글 웃는 수아 지부장 앞에 티페레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헌데 실망하셨다 하옴은 어인 말씀이옵니까?"

"실은...."

티페레트는 오늘 오전 시우와 가볍게 대련했던 일을 전했다.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기개는 가상하나... 그것도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지. 사실 그 끈기가 그에게 이로울지도 확신이 서질 않네."

"흐음...."

수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엘로아는 지나가듯이 말했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제자에 이어 복수대상까지 잃어버린 엘로아가 제자를 그리워하는 공허한 마음을 신시우라는 남자에게 투영하고 있음을.

본인은 감시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굳이 스승을 자처하며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에게서 라피의 모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를 위해 그만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네. 어중간하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간 두 마리 모두 놓치기 십상이니."

"귀주."

수아는 아름다운 옥음으로 엘로아를 타일렀다.

"모든 이가 귀주만큼 넘치는 무의 축복을 가지고 태어나진 못하옵니다."

"허나...."

"귀주께서 그에게 무술을 전수하시려던 목적은, 외람된 말씀이오나, 조금은 쉴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수아는 라피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아주 완곡히 돌려 말했다.

엘로아는 수아가 아는 누구보다 강한 인물이지만, 또 누구보다 약한 사람이다.

새로이 견습마녀를 들이지도 않고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한 채 칼부림을 부리던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잔금이 잔뜩 간 도자기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상태라는 것을.

"내게는 휴식을 취할 자격이 없네."

조심스러운 간언에도 엘로아는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수아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엄격함이었다.

"한낱 짐승에게도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귀주께서 바라시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수아 선생, 내게는 바라는 것조차 없네."

지친 목소리였다.

단언컨대 수아는 지금껏 엘로아가 겉으로 약한 소리를 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등골이 저렸다.

불현듯 오한마저 느껴졌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엘로아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

즉, 자살.

당장 그녀가 제 목숨을 끊지 않은 이유는 고작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에아 사달멜리크의 생사여부에 관해 100%의 확신이 없으니까.

적기사를 사냥하는 도중이니까.

"귀주, 그렇다 한들 조금만 더...두고보심이 어떠하옵니까?"

"무엇을 말인가?"

"고작 하루, 한 번의 대련으로 그릇을 재기에는 부족했을지도 모르옵니다. 인재 중엔 대기만성하는 자들도 있지 않사옵니까? 물론 귀주의 안목을 탓함이 아니라...."

언제나 청산유수로 말을 하던 수아 지부장의 말이 턱 막혔다.

끼어들거나 방해받은 것도 아닌데.

절친한 친구가 금방이라도 떠나갈 것 같은 실감은 숨을 절로 멎게 할 정도의 공포였다.

"...그대의 말도 일리 있군."

엘로아의 표정은 그다지 납득가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수아의 표정을 보고 둘러대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적기사 건은 어찌 되었나?"

"귀주께서 발견하신 '백기사'와 주변 정황을 고려했을 때 공적과 결탁한 것이 유력하옵니다. 아마 '비겁의 마녀'의 소행으로 사료되옵니다만...."

"그렇군, 진전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시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엘로아를 보며 수아는 뒤늦게 그녀를 불렀다.

"티페레트."

잠시 멈칫했던 엘로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저 얼굴에서 마지막 웃음꽃이 피어나는 것이 언제였는지 돌이켜 봐도 까마득한 과거일 뿐이다.

"무슨 일인가?"

문득 혹여 늦어지기 전에 이 말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소녀의 친우로 있어 주셔서 감사드리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수아 선생도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군."

엘로아는 쓴웃음을 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객실로 향했다.

2.

샤론은 밤새 시우가 압도적인 마력으로 뚫어준 낙인을 살피고 있었다.

오랜만에 4원소의 관을 만들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샤론은 눈을 감고 아인을 살피었다.

무의식으로 빨려 들어간 의식은 끝없이 낙인의 상태를 관조하고 관찰한다.

놀라웠다.

불완전계승으로 완전히 불능상태이던 3개의 획에 가느다란 마력의 가닥이 흐르고 있다.

물론 샤론이 의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은 아니었지만 여태 무슨 짓을 해도 묵묵부답이던 낙인이 되살아 난 것만으로 기적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모세혈관까지 모조리 괴사해 떨어질 날만 남았던 발가락이 재생되는 느낌일까?

눈으로 보면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후우....."

최선을 다해 낙인 안의 지식을 들여오고 분석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쉬워할 건 없다.

접근조차 못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 자체만으로 크나큰 진보다.

그렇게 샤론이 눈을 뜨고 거실로 나왔을 땐 녹초가 된 시우가 소파 위에 뻗어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한... 30분...전에...."

두 세 시간 동안 구르고 구르기를 반복한 시우는 거의 파김치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옥상에서 소파까지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많이 맞았어?"

"아프게 맞지는 않았는데... 그냥 힘드네."

사람을 포대기처럼 날리고 떨치고 두들겨대는데 어찌 멀쩡하겠는가?

그래도 먼저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으니 포기는 않았지만 돈가스 다짐육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때?"

"뭐가?"

"티페레트 공작님."

"졸라 쎄. 손가락 하나도 못 대겠어."

"그야 그렇겠지.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겠어."

격투게임 고인물에게 농락당한 기분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응~ 프레임표 외워오던가~'라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해주었다는 것 정도?

그런데 그녀의 조언은 죄다 말이 쉬운 것들이다.

막상 따라 하려고 하면 단 하나도 실천으로 옮기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어휴, 우리 시우 힘들어서 어쩌나. 내가 힘내게 해줘야겠네."

"으악! 붙지 마 땀났어."

"뭐 어때?"

샤론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시우를 꽉 끌어안았다.

머리카락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이 나서 찝찝해 할 법도 한데.

꺼리는 내색하나 없다.

문제는 너무 꽉 안아서 애초에 비명을 지르고 있던 팔다리에서 격통이 느껴진다는 것.

어마어마한 근육통이었다.

하긴 프로 격투기 선수들도 스파링 이후에는 녹초가 되는 법인데, 시우는 오직 영체의 내구도만을 믿고 대련을 거듭한 것이니 말이다.

"씻겨줘야겠네."

"그냥 마법으로 부탁하면 안 될까...?"

"싫어, 직접 씻길 거야."

샤론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마법으로 시우의 몸을 두둥실 떠올렸다.

반중력 상태로 이송된 시우를 욕조에 눕히더니 옷을 벗겼다.

"만세 해. 만세."

"옷은 내가 벗을 수 있어."

"아냐아냐, 힘들잖아. 가만히 있어."

시우는 투덜거리면서도 잠자코 손을 올렸다.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상의가 벗겨지고 근육이 두드러진 상체가 드러난다.

샤론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무작정 운동으로 키운 근육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실전에서 단련된 것 같은 몸.

신체를 가장 최적의 상태로 유지해주는 영체와 남성의 몸이 만나자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몸매가 나온다.

거기에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땀이라니.

원래 땀은 더러운 건데.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왜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리는지 모르겠다.

페로몬 때문이려나.

거기에 시우가 공작과 대련하기 전 냉장고에서 벽치기를 당했던 것이 생각난다.

몸을 옭아매는 것처럼 꼼짝 못 하게 만들던 거친 목소리와 언행.

그 기억이 더해지자 어쩐지 몸이 욕망의 화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바, 바지도 벗겨야지."

"아니, 내가 한다니까..."

"안 된다구! 힘들잖아!"

"이게 마음이 더 힘들어."

한동안 투덕거리던 시우와 샤론의 항쟁은 결국 샤론의 승리로 들어갔다.

의기양양하게, 그러나 어쩐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시우의 바지와 팬티를 벗겨냈으니 말이다.

뭔가 노예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 시우는 뻘쭘하게 샤론을 올려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분위기로 짐작할 수 있다.

"샤론, 미안한데 내가 진짜 체력이 바닥나서..."

샤론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제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새하얀 허벅지를 드러내던 돌핀팬츠와 비소를 가리던 속옷도 후다닥 벗는다.

두 사람이 편히 누울 수 있는 널찍한 욕조로 넘어 들어온 샤론.

진짜 힘들어서 졸도하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알몸을 보게 되자 저절로 피가 쏠리는 하반신.

"나한테 맡기면 돼... 내가 힘내게 해준다고 했잖아..."

"야, 야, 야..."

샤론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시우의 땀투성이인 몸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지금은 섹스를 통한 낙인의 회복도 무엇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욕망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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