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1.
그림자로 만든 플레이트 갑옷.
시우가 처음 착안할 때 RPG게임의 갑옷을 형상화했기 때문인지 일견 실전성이 없어 보인다.
쓸데없이 달려있는 장식은 제외하고서라도 충격을 거의 분산시킬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착 달라붙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구조이기에 시우는 검은 갑옷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거추장스러움 없이 한몸처럼 움직일 뿐더러 완력을 보조하는 파워드 슈트 역할을 겸해준다.
충격의 흡수라는 갑옷 본연의 역할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소재인 그림자의 법칙이 대신해준다.
지금까지 시우를 몇 번이고 사지에서 구하고 활약하게 해준 일등 공신인 것이다.
시우는 자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갑옷을 입고 시간만 준다면 맨몸으로 커다란 건물을 철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갑옷을 입은 채 휘두르는 검은 화물트럭을 반쪽 낼 정도로 흉맹하다는 것도.
따라서 여리여리하게 생긴 티페레트를 상대로 이 무기를 휘둘러도 괜찮은가? 라는 의문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몸만큼 기다란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티페레트가 실은 23 위계의 공작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가녀려 보였으니.
그러나.
티페레트가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 순간.
모든 걱정이 코웃음 나오는 기우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흐트러지지 않은 몸의 중심.
느슨하게 이완되었지만 언제든지 반응할 정도의 긴장이 끝난 전신의 근육.
흔들림 없이 이쪽의 움직임을 간파하려 드는 곧은 눈동자.
"오게."
나지막이 말하는 티페레트의 선언을 듣고도 시우는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천방지축으로 무기를 휘둘러오며 어느 정도 '검술'이 몸에 익었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빈틈을 반사적으로 포착하는 능력도, 수족처럼 자유롭게 검과 방패를 휘두르는 능력도.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빈틈.
언뜻 한 손으로 검을 들고 비스듬히 내려놓고 있을 뿐인데도 전혀 공략할 여지가 없었다.
시우가 우두커니 서 있자 엘로아가 재촉했다.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걸세. 그대가 보일 수 있는 모든 수를 펼쳐보도록."
"...알겠습니다."
간격을 시험할 겸 가볍게 앞발을 내밀며 검을 휘두른다.
그에 대한 엘로아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다.
시우가 검을 완전히 휘두르기 전.
궤도에 끼어들듯 내밀어진 검날이 휘두르는 기세를 완전히 죽인다.
"읏...!"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지되었다.
힘의 차이가 아니었다.
시우가 관측하는바 티페레트는 그다지 막대한 마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역산하자면 시우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반의반.
고작 4분의 1 정도의 힘에 기교를 더해 간단하게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다시."
-챙!
티페레트가 검을 휘두르자 맞붙었던 날이 떨어지고 시우는 다시 신중히 거리를 잰다.
어쭙잖은 겉멋은 버리고 이번에는 방패를 만들어 내었다.
반신을 가린 채 신중하게 다시 빈틈을 탐색.
"후우...후우...."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땀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두꺼움 솜에 짓눌리는 듯한 압력.
실제로 다칠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압감이 티페레트의 덩치를 부풀린다.
"합!"
소리보다 빠르게 시우의 몸이 바닥을 찼다.
이번엔 중간에 얼렁뚱땅 막히는 것을 막기 위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곳은 중단.
허리를 양단해 베어낸다는 생각으로 힘껏 검을 휘두른다.
-퉁!
이어져 들려오는 소리에 시우는 당황했다.
분명 힘껏 휘둘렀고 티페레트는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다.
보통 이 정도로 힘을 준 상태에서 격돌하면 '쿠앙!' 내지는 '쾅!' 같은 폭발음이 나야 하는데.
정작 들려오는 것은 현악기의 줄을 튕긴 정도의 작은 소리.
그뿐만 아니라 손에 전해져오는 반발력도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당혹스러운 결과 속에서도 시우의 몸과 머리는 이미 정답을 찾아 헤맨다.
베어낸 자세 그대로 이번에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해지는 올려 베기.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무리한 움직임이지만 검은 갑주의 보조는 그것을 쉽게 가능케 한다.
이번에는 아예 헛방이었다.
티페레트는 검을 들어 올리지도 않고 고개만을 까딱 움직여 검 끝을 피했다.
-부웅!
그것은 시우가 노리던 것이다.
시우가 휘두르는 것은 그림자의 검.
그 길이도, 두께도, 무게도 원하는 대로 즉각 변형할 수 있다.
칼자루를 고쳐 잡는 번거로운 방식 없이도 간격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조금 길어진 칼날이 엘로아를 다시금 내려찍는다.
이번에도 대충 몸을 움직여 막으려 든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상태.
-텅!
같은 현상이었다.
느릿느릿하게 위로 올라온 엘로아의 검은 아무런 반발력도 내지 않은 채 참격을 빗겨낸다.
"하압!"
여기까지 예상했다.
시우는 검이 막혔다고 판단한 순간 즉시 그림자의 검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곧장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엘로아의 시야를 가린다.
방패가 만들어준 사각지대에서 그림자를 창을 변환한 뒤 세 번의 연속적인 찌르기.
간격이 변했을 뿐만이 아니라 무기 자체가 뒤바뀌었다.
지금까지 베기만을 사용했던 것도 이 찌르기를 위한 포석.
백기사와 싸우며 눈으로 익혀 두었던 기술.
창을 내미는 순간 손목의 스냅과 허리의 회전을 이용한다.
그렇게 회전이 독특한 움직임이 가미된 창은 마치 끝이 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게 된다.
-챙! 챙! 챙!
그리고 티페레트의 대응은 시우를 아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족히 세 가지의 포석과 눈속임을 사용해 만들어진 필살의 삼격이 더해졌다.
더군다가 끝이 휘어지는 창은 시우를 몇 번이고 곤란하게 만들었던 까다로운 공격이다.
그런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엘로아는 그 세 번의 찌르기를 정확하게 막아내었다.
그것도 정확히 검의 끝으로 창날의 끝을 맞대어 공중에서 멈춰 세웠다.
마지막 찌르기가 끝났을 때 두 사람의 무기는 날 끝을 부딪힌 채로 공중에 멈춰 있었다.
한 사람이 양손에 젓가락 두 개를 두고 끝을 맞추기도 어려운 판국에 하물며 남이 휘두르는 무기에 같은 행동을 하다니.
서커스를 직관하기라도 한 기분이다.
정작 그런 곡예를 보인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내렸지만 말이다.
티페레트는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번 대련은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일련의 경합이 끝났을 때 티페레트는 느낄 수 있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실망을.
라피는 천재였다.
마법뿐 아니라 무예에도 정통해 고작 만병지왕의 계약 하나를 물려받고도 능히 호문쿨루스를 사냥할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조금은 기대했었다.
천재였던 라피의 그릇을 이어받게 된 남자라면 그럴듯한 솜씨를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댓값이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형편없었다.
그는 몸의 움직임이 무장에 휘둘리고 있다.
계약의 힘을 빌려 언뜻 그럴듯한 겉보기를 연출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법칙도, 묘리도, 깨달음도 없었다.
하다못해 라피의 화려한 검무를, 그 파편이나마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거늘...
엘로아는 짙은 실망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알겠네. 조금 더 수련이 필요하겠군."
"역시 그런가요? 사실 이렇게 의식하면서 사용하게 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옷을 벗어보게."
엘로아는 계약검을 역소환시켰다.
시우 역시 그림자의 갑주를 해제한다.
그 안에서 땀에 흠뻑 젖은 시우가 걸어 나왔다.
짧은 공방이지만 그가 이 맛보기 수련 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먼저 몸을 다루는 법을 연습해야겠네. 본디 무장이란 어찌 되었건 수족의 연장이니 말일세."
"맨손으로 대련을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네."
만약 조그마한 재능의 싹이라도 보였더라면.
그가 '계약'을 조금이라도 능수능란하게 다뤘더라면.
티페레트도 구태여 기본기부터 가르쳐줄 생각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많은 무도가를 접해온 티페레트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술에 한해 그의 재능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비록 그가 계약을 계승 받았다 한들, 그리고 티페레트의 가르침을 받는다 한들 그다지 효용이 없을 것이다.
재능의 벽이란 그토록 무겁고 두터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마법적으로는 재능이 탁월하다 하니 차라리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차라리 강해지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기존에 약속했던 '오해에서 기인한 사고에 대한 보상'은 다른 것으로 지급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미 약조했던 바가 있다.
비록 중도에 포기할지라도 가다듬을 수 있는 수준은 최대한 가다듬을 것이다.
"나는 하나하나 친절히 가르쳐주는 방법 따윈 모르네. 모름지기 몸을 사용하는 방법이란 몸으로 배워야 하는 법이지."
엘로아는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취했다.
시우도 어설프게나마 그녀를 따라한다.
"어중간한 각오라면 아마 따라오지 못할 걸세."
"각오는 되어있습니다."
"그건 보면 알겠지."
바닥을 부드럽게 떠미는 진각.
두 사람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시우의 품 한쪽으로 파고든 엘로아.
비록 무기를 들지 않았더라도 '계약'은 반응한다.
시우는 두 사람의 리치를 활용하기 위해 안쪽으로 쇄도하는 엘로아에게 엉겁결에 주먹을 뻗었다.
엘로아가 팔꿈치로 일격을 흘리며 시우의 팔목을 붙잡은 순간...
"억!"
시우의 몸이 반전했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몸이 등부터 노면에 거칠게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간할 새도 없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냉엄한 자홍색의 눈빛으로 내려보는 티페레트가 보였다.
"의지대로, 바람대로 몸을 사용하는 것.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현묘한 기술이나 수 싸움도 무의미하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대의 공격에는 빈틈이 너무 많아."
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력을 통한 영체 강화가 불가능한 시우는 그저 건강한 남성 정도의 힘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갑옷의 보조가 없어지자 내동댕이쳐지는 것만으로 큰 충격이 왔다.
하지만 이 정도로 뻗어 있을 것이라면 애초에 수련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시우 쪽에서 먼저 달려들었다.
뻗은 주먹은 공중에서 손날에 가로막히고 배에 가볍게 엘로아의 손바닥이 닿았다.
복부를 떠미는 듯한 반격.
"컥!"
달려오는 힘을 그대로 역이용한 덕에 시우의 몸이 공중에 펄쩍 뜬다.
이따금 겪었던 끔찍한 고통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스트레스와 긴장을 끌어낼 정도의 통증이다.
"공격이 막혔을 경우를 대비하게. 다음 수도 생각해두게."
"으으, 네. 조금 아프네요."
"고통은 훌륭한 촉매지. 몸으로 기억해야 다음엔 같은 실수를 피하려 들지 않겠나?"
이후로도 시우는 몇 번이고 엘로아에게 덤벼들었다.
"발을 뻗는 시간이 일정하면 간격을 읽히기 쉽다네."
"공격하려는 곳을 너무 지그시 바라보지 말게."
"무작정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습관은 버리게. 자네보다 힘이 좋은 사람은 어찌 상대할 생각인가?"
"몸의 중심을 항상 가운데에 두게. 중심이 흔들리니 발만 걸어도 넘어지는 걸세."
일 합 일 합마다 조언을 건네는 티페레트.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경과했을 때 시우의 몸에 멀쩡한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티페레트는 쉼없이 시우의 몸을 내던지고, 밀치고, 가볍게 두드리며 격퇴했으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엘로아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시우는 옥상 바닥에 대자로 뻗어 숨을 헉헉 내쉬었다.
흥건하게 흐른 땀은 이미 상의는 물론 팬티까지 흠뻑 적셨을 정도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새삼 실망을 느낄 것도 없이 티페레트는 수련의 종료를 알렸다.
힘 조절은 했다.
커다란 부상을 입힐 생각도 없다.
하지만 부족한 재능에 부족한 오기와 끈기라면 시우 쪽에서 먼저 떨어져 나가겠지.
어쩌면 그것이 그를 위해 더 좋은 길일지도 모른다.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려던 시우는 털썩 뒤통수를 바닥에 눕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