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1.
야시장의 묘미를 꼽아보자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있다.
바로 먹거리다.
놀랍게도 접선소의 한구석에서도 밀수꾼들이 몇몇 음식을 요리해 팔고 있었다.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이라기보다는 시장한 구석탱이에 있는 분식집 같다.
의자와 테이블도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허름한 목재이고, 근사한 은식기나 도자기 접시 대신 플라스틱 식기에 음식이 담긴다.
마녀는 고급지향형이라는 생각이 뿌리깊어 이런 허름한 길거리 식당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녀가 8명씩 몰려있었다.
“이게 장사가 되나? 별건 없는 것 같은데.”
시우는 샤론에게 속닥거렸다.
“맛으로 먹으려는 게 아니니까.”
“그건 뭔 소리래.”
샤론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눈으로 훑어봐도 그다지 특별한 메뉴들은 없었다.
클로브와 마늘로 간을 하고 올리브유에 병아리콩을 볶아낸, 풋콩 프리터.
닭고기 육수에 향신료와 리크(서양 파), 각종 버섯을 넣고 끓여낸 스프, 펑거스.
살을 발라낸 연어에 생강과 세이지를 넣고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연어 파이.
화이트 와인과 대구를 넣고 바짝 졸여낸 뒤 씨 겨자와 곁들이는 코드.
어떤 음식을 보아도 차라리 현세 호텔에서 먹는 것이 근사할 정도로 그냥저냥인 음식이었다.
“아하.”
하지만 시우는 이내 알아차렸다.
게헨나의 음식에 사용되는 식재료는 현세의 것과 꽤 다르다.
아무래도 중세부터 쭉 이어진 식문화 탓인지 그 당시 사용했던 클로브, 비네거 등의 식재료로 음식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에 주목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현세에서는 맛보기 힘든 맛이다.
“일종의 추억을 파는 거지. 처음부터 추방자였던 마녀도 있지만 나처럼 중간에 쫓겨난 마녀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원래부터 추방자라고 해도 말로만 듣던 게헨나의 음식이 어떤지 궁금하잖아?”
“중동에 있는 김치찌개 집 같은 느낌인가?”
“오, 그거 비유 좋다.”
하긴 시우도 게헨나에 있을 때 간절히 치킨과 콜라를 그리워했었지.
몇몇 마녀들에게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음식을 파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
시우와 샤론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
아까부터 느꼈는데 주위 마녀의 시선이 엄청 쏠린다.
그래도 돌아다닐 때는 힐끗힐끗 바라보는 정도였다면 자리에 앉은 지금은 대놓고 유심히 바라보는 수준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우선 영체가 된 뒤 시우의 얼굴은 몇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되었다.
가끔 세수하다가 거울 보고 만족스럽게 웃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가죽 안대라는 보기 드문 코디까지 하고 있으니 이목이 쏠리는 것이 첫 번째.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미 시우의 정체를 다들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 사회는 좁은만큼 소문이 빠르다.
아예 험지에 있는 마녀라면 몰라도 위치포인트 근처에서 생활하는 마녀는 진작에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 최초로 낙인을 지닌 남성이 나타났다.
그 신분을 제머나이, 아가사, 티페레트가 공증했다.
라는 사실이 하룻밤 만에 도시에 있는 마녀 대부분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 시점에서 접선소에서 마녀와 함께 어슬렁거리는 남자가 나타났으니 자명한 결과이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여기까지 오는 마녀라면 괜히 해코지하지는 않을 테니까.”
시우도 딱히 신상 문제로 걱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근데 한 명으로도 부담스러운 미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쏠리니 조금 체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풋콩 프리터를 입에 넣고 있을 때 누군가 털썩 시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동행인 줄 알았다.
“잠깐 실례.”
어두컴컴한 군청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몸에 찰싹 달라붙어 고스란히 몸매를 과시하는 드레스.
색기 넘치는 눈빛과 눈가의 눈물점.
뇌쇄적이라는 표현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마녀였다.
“그쪽이 요즘 유명한 남자 마녀지? 이름이 뭐야? 나는 키벨레 페리윙클이라고 하는데.”
갑작스러운 합석 자신을 소개한 마녀는 속이 뻔히 보일 정도로 대담한 태도를 보였다.
샤론의 버금가는 가슴을 슬쩍 시우의 팔뚝에 비비며 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인 것이다.
“시간 한가해?”
그녀는 동석자의 존재를 개의치 않는 직진을 선보이며 시우에 대한 흥미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샤론이 아니다.
병아리콩을 뒤적이던 포크를 달그락 떨어뜨리며 노발대발하는 샤론.
“넌 또 뭐야!”
“아아,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 그냥 이야기 좀 해보고 싶어서 그래.”
그런 것치고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손이 벌써 자연스럽게 시우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다.
몹시도 은밀하고 노골적인 손길이었다.
“사실 소문을 듣고 꽤 관심이 생겼었어. 영체인 남자를 보는 건 처음이니까.”
밀땅 따위는 개나 줘버린 섹스 어필에 얼떨떨하게 굳어있던 시우.
바짝 붙어있던 탓에 코끝에 살랑이는 마녀 특유의 좋은 향기가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즉시 시우의 하반신이 반응했다.
페리윙클의 머리카락에서 물씬 풍기는 향기는 마치 독하디독한 페로몬처럼 의지나 사고에 상관없이 성욕을 일으켰다.
“당장 떨어져! 당장!”
“왜 그렇게 성을 내고 그래? 그냥 옆에 붙어 있는 것뿐인데. 어라?”
당황한 시우가 잽싸게 다리를 꼬아서 풀발기를 감추기 직전.
페리윙클은 빵빵하게 텐트를 치고 있는 시우의 가랑이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너희 무슨 사이야? 많이 친해? 배꼽도 맞췄어?”
“죄송한데, 조금 떨어져 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그렇다기에는 벌써 이렇게 커졌는데?”
“뭐…?”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얼어붙은 샤론.
페리윙클이 말한 ‘커졌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시우는 애써 변명했다.
물론 페리윙클은 마녀답게 아름답지만 시우가 예쁜 여자만 보고 들이대는 발정 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신체 반응과 짚더미에 붙은 불처럼 확 끓어오른 성욕에 당황하고 있을 정도.
샤론에게도 페리윙클에게도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원래 남자는 가끔 아무런 생각 없이도 커지거든요.”
“그렇게 빼지 말고 오늘 내 호텔로 올래? 나 이것저것 잘하는데. 저기에 풋내기 마녀님보다 훨씬 잘해줄 자신 있어.”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마법을 사용한 것도 묘약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강렬한 충동이 마음에 번진다.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시우가 필사적인 인내를 발휘해 극구 사절하고 나서야 페리윙클은 김이 샜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충격을 받고 아무 말도 못하는 샤론에게 말한다.
“치사하게 꼭 그렇게 독차지해야겠어? 셋이서 같이 놀면 좋잖아. 너도 같이 와.”
“절대 싫어.”
아마도 시우가 거절하는 것이 샤론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녀에게 남자란 무조건 자신의 발밑에 있는 존재라는 상식이 만연하니 당연했다.
실상은 조금 다르지만 샤론이 입을 엄하게 다무는 것을 보고 완전히 포기한 듯하고 대신 명함을 건넸다.
델라처럼 무지막지한 마녀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랄까.
“중요한 사람에게만 주는 명함이야. 생각나면 언제든지 연락 줘.”
페리윙클이 떠나고 난 이후 급격하게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샤론이 딱딱한 목소리로 테이블에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아직 식사를 절반도 끝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돌아가자.”
시우도 할 말이 없어져 조용히 샤론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시발, 분위기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풀발기나 되어가지고는…
다시 생각해도 이상했다.
조금 전 신체 반응은 뭔가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열심히 자지를 손으로 훑어줬던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있던 성욕 없던 성욕이 죄다 일어나면서 강렬한 성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샤론을 볼 면목이 없어진 시우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샤론을 따라 일어났다.
참고로 택시를 타고 서울까지 돌아오는 길에 샤론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
“난 마법 연구할게. 들어가서 쉬어.”
“샤론 그게 아니라…”
샤론은 시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방문을 쾅 닫고 잠갔다.
그러자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시우와 뜨거운 밤을 보냈던 침대가 보인다.
그게 괜히 마음에 걸려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고 침대에 웅크려 앉았다.
“하아….”
화난다.
속상하다.
우울하고 슬프고 야속하다.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시우와 샤론은 정식 연인관계가 아니었다.
그리고 샤론 자신도 시우를 독점할 권리도 구속할 권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시우에게 해준 것도,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은가?
설령 아주 조그마한 것이 있다 한들 그에게 받아왔던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친구 흉내를 내는 것은 도리어 파렴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받아들이면서도 내심 시우를 독차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우 옆에 다른 마녀가 유혹한 것만으로 발끈했고, 유혹에 넘어간 듯 보이던 시우의 모습에 아직까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겠지.
심지어 그냥 헬렐레 팔렐레 했다면 모르겠다.
그렇게 당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고추가 커졌다니…
“나랑 어제 했으면서…”
샤론은 심통스레 중얼거렸다.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고작 몸을 섞는다고 연인관계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의 일은 샤론의 일방적인 대시로 벌어진 결과물이다.
심지어 샤론은 그 상황에서도 불완전계승된 낙인의 활성화라는 어마무시한 선물을 받지 않았는가?
‘나랑 했으니까 평생 책임져줘!’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니 이건 그냥 마음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샤론은 자연스럽게 ‘친구’라는 명목하에 그의 옆에 있었다.
샤론이 초조함을 느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불쑥 그가 떠나게 될 거라는 생각 따위도 해 본적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바뀌었다.
시우가 낙인을 지닌 최초의 남성이라는 건 이제 샤론뿐 아니라 많은 마녀가 알게 되었다.
심지어 그의 신분을 공증하는 대마녀가 셋이나 있는 실정이다.
잘생긴 외모, 남자 마녀라는 희소성에 든든한 뒷배경 삼박자.
추가로 늙어 죽지 않는다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마녀의 일등 신랑감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마녀가 남성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는 언젠가 늙어 죽는다는 사실 때문이니 말이다.
당장 오늘은 페리윙클이 접근했을 뿐이지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마녀가 호기심과 흥미를 지니고 시우에게 접근할 것이 뻔했다.
그런 와중에 샤론이 시우를 지켜낼 방법이 있을까?
그를 독점할 수 있는 샤론만의 강점이라고는 고작 시우를 조금 일찍 알았다는 정도이다.
왜냐하면 샤론은 17 위계의 중상위 마녀인 데다가 일개 빚쟁이 추방자에 불과하니까.
반면 아까 시우에게 추파를 던진 페리윙클은 세계 곳곳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20 위계의 대마녀이다.
심지어 추방자도 아니라 자발적으로 현세를 떠도는 게헨나의 시민이다.
샤론의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망상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시우야! 시우야아!’
샤론이 달려가고 있었다.
장소는 우주정거장.
엔진은 점화 중인 로켓 안에는 시우와 페리윙클이 타 있었다.
‘시우야….. 아, 아악!’
발이 꼬여 우당탕 세차게 넘어지자 빚문서들이 와르르 엎어졌다.
‘시우야! 가지 마! 시우야아….!’
‘하하, 샤론! 지금까지는 너랑 생활해서 정말 즐거웠어! 하지만 난 고귀하신 페리윙클 님의 남편이 됐거든! 앞으로 마법도 알려주신 데! 신혼여행은 국제우주정거장으로 가기로 했어! 왕복 요금만 600억인데 나한테 빈대 붙던 누구랑은 다르게 전부 내주신다더라!’
‘미안해, 에버그린 양. 하지만 빚도 못 갚아서 얹혀사는 밥벌레와 공유하기엔 아까운 남자인 것 같아! 그러니 앞으로 시우 옆에는 얼씬도 말기를 바랄게! 오호호호!’
‘아하하하!’
‘오호호호!’
높게 울려 퍼지는 두 남녀의 웃음소리를 끝으로 망상이 끝났다.
갑자기 생겨나는 자격지심.
시우를 이대로 빼앗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지금까지 시우에게 받아오기만 한 주제에 그런 감정을 느껴버리는 자신에 대한 자조.
샤론은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