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1.
땅거미가 뉘엿뉘엿지는 시각.
문을 열고 들어선 접선소.
시우는 깜짝 놀랐다.
워낙에 비밀스럽게 들어온 탓이었을까? 아니면 외진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일까.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푸른뱀 접선소처럼 암시장 같은 분위기나 규모를 생각했는데.
이건 오히려 울산이나 부산의 야시장 풍경과 비슷했다.
내부 공간이 생각보다 훨씬 넓고 쾌적했기 때문이다.
“와, 이거 도대체 얼마나 넓은거야?”
“2000평이래.”
축구장이 대략 2200평 정도이니 시우의 예상보다 두어 배 넓다고 할 수 있겠다.
임시로 개설되는 가게라 그런지 기본적으로 상품을 진열한 천막이 오와 열을 맞춰 줄지어 있는 구조였다.
더러는 컨테이너 하우스 하나를 통째로 가게처럼 만들어 사용하는 가게도 보인다.
10M 정도 되는 천장에는 호이스트 대신 주르륵 수은등이 매달려 있는 데다가 천장도 있었기에 어딘가 아케이드 상점가를 연상시켰다.
한 마디로 보더타운보다 훨씬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는 말이다.
“생각보다 엄청 넓은데? 사람도 은근히 많고. 들어올 땐 한 명도 못 봤는데.”
“아무래도 접선소가 열리는 텀이 띄엄띄엄이다 보니까... 한번 열리면 주변의 마녀들이 멀리서도 찾아오고 그러더라고.”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접선소 구석구석에 돌아다니는 마녀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현세의 옷차림을 했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비현실적으로 좋은 비율, 비주얼로 유명한 월드 클라스 배우급의 여자가 돌아다니네? 싶으면 무조건 마녀다.
당장 시우 옆에 있는 샤론만 해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다고 쳐도 언뜻 보이는 마녀의 숫자는 대략 10여 명 남짓.
뒤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전부 고려한다 해도 채 50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오늘 사야할 목록들 천천히 둘러볼 거야. 두리번거리다가 잃어버리지 말고 잘 따라와.”
“걱정 말아,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도, 다른 마녀가 시우한테 갑자기 좋은 거 준다고 해서 따라가면 어떡해.”
“내가 애냐?”
쿡쿡 웃으며 시우를 놀리는 샤론.
둘은 본격적으로 늘어선 매대 사이를 누비며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온갖 신기한 물품들이 총 집합해 있었다.
타로타운에서 종종 들렀던 조그마한 마도구 상점과는 물품의 양도 종류도 비교할 수 없었다.
아마 질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앞설 것이다.
샤론이 멈춰선 천막은 보석류를 다루는 천막이었다.
호객 행위 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상인은 샤론과 시우가 다가서고 나서야 여유로운 목소리로 인사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아리따우신 마녀님! 멋진 신사분도 어서 오시지요.”
멋들어진 외눈 안경이 잘 어울리는 백발의 노인에게선 이 일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는 짬이 느껴졌다.
그냥 어중간한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천막의 재질과 진열대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눈을 번쩍거리게 하는 보석들이 보란 듯이 조명 아래 전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상품 원하시나요?”
“원소 마법에 사용되는 보석을 찾아보고 있어요.”
“오호! 제물을 찾으시는군요! 그렇다면 아주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루비 아뜰리에는 고객을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으니까요. 전 세계 각종 희귀한 귀금속 및 보석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게헨나 안에서 마녀들을 상대하던 상인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원숙한 바텐더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녀를 대하는데도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졌다.
뜬금없이 마녀 옆에 있는 시우를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인사했으니 말이다.
샤론의 원소마법은 원소 계통에 따라 각기 다른 ‘제물’을 요구한다.
당연히 제물이 상등품일수록 마법의 위력 또한 강화되며, 여기서 말하는 상등품의 제물은 대체로 보석류를 뜻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짝이는 돌이란 그 안에 축적된 유구한 환상과 상징을 내포하니 말이다.
“따로 살피시는 게 있으신가요?”
“임페리얼 토파즈 먼저 볼 수 있을까요?”
고대 이집트부터 태양의 돌이라 칭송받았던 토파즈.
토파즈는 종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색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다른 색상의 토파즈보다 월등히 비싼 값에 거래되는 주홍색 토파즈를 ‘임페리얼 토파즈’라고 부르며 불의 의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제물 중 하나였다.
“카탈로그를 먼저 보여드릴까요? 아니면...”
“실물로 보고 고르고 싶어요.”
샤론은 엄격하고 차가운 말투로 완전히 표정을 지운 채 대화했다.
언뜻 보기에는 인간을 천시하는 오만한 마녀의 모습이지만 그간 샤론은 겪어온 시우는 알 수 있었다.
샤론이 능숙해보이는 상인에게 호구 잡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자들이 환불하러 갈 때 풀메이크업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겠다.
시우도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할 것 같아 웃음을 꾹 참았다.
“오, 마침 여럿 들어와 있습니다.”
상인은 천막 뒤쪽으로 가더니 고급스러운 붉은 천으로 내부가 감싸인 목함을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임페리얼 토파즈가 고정된 채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보란 듯이 돋보기 앞에 선보인다.
“보이시나요? 잘 숙성된 위스키처럼 아리따운 오렌지빛, 그 안에서 은은하게 섞여나오는 석류빛. 브라질의 광산에서 채굴한 것이죠. 산출부터 세공까지, 틀림없이 최상의 품질입니다.”
샤론도 보석을 여럿보고 다뤄왔기에 알 수 있다.
상품들의 상태가 모두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가격은 어떻게 되죠?”
“네, 왼쪽의 4캐럿 이하의 스톤은 캐럿에 80만 원, 오른쪽의 10캐럿 이상의 것들은 캐럿에 160만 원이 책정되고 있습니다.”
“네?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샤론은 눈을 부릅뜨고 따졌다.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엄숙한 척하던 말투도 간데없다.
게헨나에는 따로 광산이 없으므로 이곳에서 파는 보석은 현세에서 게헨나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게헨나의 귀금속점에서 살 때와 가격 차이가 거의 없다니!
“이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아보신다면 결코 비싸게 매겨진 값은 아니죠. 요즘 토파즈의 채광량이 줄고 수요가 늘어 시세가 높습니다. 특히 임페리얼 토파즈는 원체 생산이 적기도 하고요.”
샤론이 따지는데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능글능글하게 받아치는 상인.
어느새 준비한 수평 저울과 분동을 가지고 오더니 물었다.
“무게를 달아 드릴까요?”
“....네, 여기 작은 것들요. 그리고 이것도요.”
백화점 명품관에 처음 들어간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버린 샤론은 자잘한 스톤 몇 개와 그나마 조금 큰 토파즈 하나를 골랐다.
3캐럿 이하의 토파즈 다섯 개, 1160만 원.
15.5캐럿의 토파즈 한 개, 2480만 원.
도합 3640만 원.
이제 돈도 많이 벌었겠다, 재투자라는 명목으로 호기롭게 플렉스를 할 예정이었는데.
워낙 큰돈을 써본 지가 오래돼서 그런지 보석을 사는데도 손이 벌벌 떨렸다.
문제는 이것 말고도 사야 할 것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시우는 한눈에 봐도 곤란해 보이는 샤론을 위해 사주겠다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관두었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애초에 샤론이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서는 것은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따로 포장해주시고 다음에는 진주랑 남옥, 산호 보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불의 제단에 바칠 제물을 골랐으면 다음은 물의 제단, 바람의 제단, 흙의 제단에 바칠 제물들까지 모두 사야 한다.
혼을 쏙 빼놓는 상인의 화술에도 꿋꿋이 원래 목표했던 양만큼을 구매하는 데 성공한 샤론.
“모두 합하여 1억 1130만 원 입니다. 금화로 하시겠습니까?”
“위, 위치뱅크 카드로 할게요....”
곱게 포장된 보석을 보석함째(유료) 받아든 샤론은 카드를 건넸다.
진열대에 할로겐 전등까지 들여놓은 주제에 결제 방식은 굉장히 아날로그 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에나 쓰이던 방식인데 카드를 전표 아래 두고 먹지를 긁어 카드번호를 압인한다.
카드 번호가 찍힌 전표를 은행으로 보내 해당 계좌로부터 대금을 받는 식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녀명으로 서명을 한 샤론은 1억 1130만 원의 대가라기에는 너무나도 가벼운 상자를 들고 터덜터덜 나왔다.
“괜찮아, 시우야. 나 하나도 안 아까워.”
“그, 그러냐....”
“당연하지! 이 정도는 준비해야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묻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합리화를 시전하던 샤론은 곧장 담뱃가게로 향했다.
일반적인 담배를 사려면 편의점에 가면 그만이니 굳이 여기서 구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샤론이 구매하려는 것은 마법 예식용 파이프.
저번에 델라와 싸우며 부러진 파이프를 사기 위해서이다.
“어서오십쇼!”
이번에는 조금 얌챙이처럼 생긴 점원이 손을 쓱쓱 비비며 샤론을 맞았다.
게헨나의 마녀에게 담배는 최고의 기호품 중 하나이기에 자연스럽게 파이프 역시 고급품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대충 만든 기성품을 사용한다면 제물로서의 효과가 떨어진다.
샤론이 몇 번이고 느끼는 건데 그녀의 자성마법은 돈 먹는 하마였다.
그만큼 돈이 없었기에 마법이 계속 정체되었던 점도 있다.
“이 파이프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마녀님들이 굉장히 애용하는 모델입니다. 파이프는 일각고래의 상아로 만들었죠. 물부리는 호박(琥珀)으로 장식해 기품을 더했습니다. 없어서 못구하는 물품입니다. 게헨나의 파이프 장인으로 유명하신 론드 옹께서 직접 세공하신 세상에 10개 밖에 없는 놈이니까요.”
사실 파이프라기에는 길이가 30cm 가까이 되고 연소통이 조그매서 장죽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참고로 가격은 1500 만 원.
아무리 사치품이라지만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가격이었다.
“이건 내가 사줄까?”
기웃거리던 시우도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샤론을 보고 더 참지 못했다.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물었다.
샤론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 내 돈도 사실상 너가 준 거잖아. 이미 너무 많이 받아서 더 받는 건 싫어.”
“그럼 내 것 하나 사는 김에 네 것도 사자. 그럼 되잖아.”
“아냐, 사더라도 내가 사줄 거야.”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까지 접대용 미소를 짓던 상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긴 마녀에게 말을 놓는 남자, 마녀에게 이거 사줄까? 하는 남자를 처음 봤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둘의 관계가 거의 아웅다웅거리는 커플의 모습이라면 말이다.
“고집이 아니라니까! 내가 알아서 할 게 기다려. 담뱃잎은 있나요? 의식용으로요.”
샤론은 기어이 시우를 떨쳐내고 상인에게 물었다.
상인은 생경한 광경에 당황하기도 잠시 곧 평정심을 되찾고 물었다.
“아, 네네. 여기 있습니다. 담뱃잎에 각종 향을 입힌 것을 원하시나요? 요즘 유행하는 것은 커피 또는 체리향인데...”
“아니요, 기본으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연기를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고 ‘불을 삼킨다’라는 행위를 위한 것이기에 향 따위는 딱히 필요 없었다.
솔직히 샤론은 담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상인은 기름종이에 감싸여있는 담뱃잎을 펼쳐 보여주었다.
“한 번 만져보시죠. 라티푼디움의 응달에서 상급 마력수를 먹으며 자란 담뱃잎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분도 적당하게 남아있고 마력 보충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죠.”
대략 50g 정도 되는데 또 100만 원이 넘는 가격이 나왔다.
담배 파이프와 담뱃잎을 구입한 이후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샤론은 3시간 만에 총 4억 원에 달하는 물품을 사들였다.
“괜찮아, 필요한 투자야... 필요한 투자야....”
“그래그래, 다 쓸데가 있으니까 산걸거 아니야.”
“그치? 너가 생각해도 그렇지?”
카드를 소중하게 쥐며 중얼거리는 샤론을 보며 시우은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안쓰러움과 귀여움이 더해져 참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