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1.
감회가 새로웠다.
게헨나의 최하층민 생활.
가을비를 맞으며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배수구를 삽으로 퍽퍽 퍼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예전이라면 눈만 쳐다봐도 불경죄로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을 지체 높은 귀족과 나란히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도 동등한 관계라고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이게 어딘가?
“미안하네.”
티페레트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나긴 사과로 말을 이었다.
시우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물론 샤론에게도 다시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티페레트 공작님께서 공증을 서주신 덕분에 현세에서도 한결 안전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티페레트, 이대로는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지 않으니 그쯤 하시죠. 시우 군도 샤론 양도 이해하는 것 같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신 건 시우 군에게 보상을 하고 싶으셨기 떄문이잖아요?”
“그렇군.”
티페레트는 데네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그리고는 진중한 눈빛으로 시우의 얼굴을 빤히 본다.
그 순간 시우는 당황했다.
엘로아의 눈빛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심이라고 말하기엔 어렵다.
그리움, 아련함, 후회.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그런 시선이었다.
“면목 없게도 내게는 보상하기에 마땅한 재산이 없네.”
원래 엘로아는 유서 깊은 공작답게 막대한 재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먼 옛날,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넘은 이야기이다.
마녀 ‘티페레트’의 재산은 모두 위치포인트의 현상금으로 빠져나갔고 이후로 벌어들이는 자금 역시 모두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사냥하는데 재투자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상 건 때문이시라면 괜찮습니다. 누구나 오해할 상황이었고 어제 제대로 사과도 받았는걸요.”
“네, 저도 괜찮아요. 공작님의 마음은 마녀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걸 아는 시우도 샤론도 공작에게 더 뭘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특히 샤론은 엘로아의 행동으로 인해 시우와 단숨에 가까워질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조금의 앙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오히려 조그마한 감사를 느낄 정도다.
“하지만 이대로 그대를 현세에 내버려 두는 것도 내키지 않아. 아무리 나와 제머나이, 그리고 수아 지부장의 공증이 있다 한들 그것이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니 말일세.”
그렇다.
치안이 좋기로 소문한 대한민국에서도 살인이 일어난다.
대부분 범죄가 검거되고 처벌받음에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세 마녀의 공증이 권위적이라 한들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 시우에게 접근할 마녀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들키면 그만이지’ 혹은 ‘그래도 못 참겠다!’ 같은 생각을 지지고 접근한다면 그 시점에서 공증의 효력은 무의미해진다.
공증이 24시간 시우를 옆에서 지켜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죠.”
“데네브에게 전해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대가 사용하는 자성마법은 ‘만병지왕의 계약’.
내 견습마녀였던 라피가 사용하던 것이라네. 그 어떤 병기를 손에 쥐건 최적의 한 수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계약이지.”
시우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엘로아는 괜찮다고 말하고 시우도 왜 그 계약이 자신에게 있는지 모르지만 우연찮게 주머니에 들어온 제자의 유품을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건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괜히 죄송해서....”
“괜찮네.”
잠깐 커피를 마시고 다시 입을 여는 티페레트.
“아무튼 자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계약을 완전히 체화하고 활용하는 걸세. 그것만 완벽하게 익혀둬도 어지간한 마녀를 상대로 저항도 못하고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씀은....”
“내가 수련을 돕지.”
시우는 조금 놀란 정도였지만 샤론의 반응은 달랐다.
둘다 설마 티페레트 공작이 그런 말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다.
마법전투에 있어 티페레트의 역량은 상상 이상이다.
실제 역대 티페레트는 여러 무술과 유파를 창립했으며 일대 종사로 이름을 떨쳐왔다.
그런 티페레트에게 배우는 전투술이라면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교육인 것이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어지간하면 사양을 할 예정이었던 시우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겉치레로나마 염치를 차리지 않고 덥썩 엘로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번에 있던 백기사와의 전투 그리고 백화점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을 보며 느낀 바가 있다.
이대로 목적의식이 결여된 채 어영부영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자극이었다.
자신은 더는 예전 같은 노예가 아니다.
빵 한 조각이 딱딱하고 말랑하고에 일희일비하던,
누구나 턱 끝으로 부리며 허드렛일을 시킬 수 있던,
목숨을 바치고 나서야 남을 간신히 구할 수 있던 그런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시우에게는 힘이 있다.
제 한 몸 보전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조금 더 정제하고 가다듬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제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이 생겼을 땐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보고 싶어요.”
시우의 곧은 의지를 전해 들은 엘로아는 잠시 멍하니 굳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라피의 ‘그릇’ 속에 잠재되어있던 무의식이 투영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고 싶다.
시우의 말은 라피가 말버릇처럼 했던 말과 정확히 빼닮아 있었다.
엘로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기는 일 없이 자신의 모든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솔직하게 말하지 나는 아직 자네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이 아니네.”
어제 대화로 투명한 진실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의혹으로 돌아갔을 뿐.
티페레트가 믿는 것은 객관적인 팩트가 아닌 시우의 사람 됨됨이라는 주관적인 요소였다.
“그대가 악의적인 속내를 숨기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상대가 에아 사달멜리크라면 어떤 변수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진심일세.”
티페레트가 시우의 임시 스승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는 두가지 였다.
하나는 사죄의 대가로 그가 자생할 만한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어쩌면 그가 에아를 꾀어내는 미끼 역할을 하지 않을까에 대한 희미한 희망 때문이다.
“물론 나는 성심성의껏 그대의 능력이 개화하길 도울 것이야. 허나 그것은 엄연히 감시를 겸하는 가르침이네.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보상을 준비토록 하지.”
시우는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엘로아를 보며 오히려 신뢰를 느꼈다.
사실 엘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당장 시우가 그녀에게 가르침 받길 원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엘로아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그녀가 원하는 바를 손쉽게 이뤘을 것이다.
굳이 감시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을 꺼내며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엘로아는 적당히 분위기에 편승해 편하게 목적을 이루는 것을 거부했다.
숨기고 있던 자신의 패를 모조리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만이나 음흉한 속내 따위, 티페레트의 사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정말 실례겠지만 시우는 왜 티페레트가 몇 번이고 에아를 놓쳤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좋습니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서 시우와 티페레트는 임시 사제관계가 되었다.
2.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티페레트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비웠다.
데네브는 쌍둥이를 깨우며 게헨나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역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이 난리가 났는데 애들을 여기에 두는 건, 시우 군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위험하니까요.”
“그렇죠.”
“그동안 잘 돌봐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즐거웠는걸요.”
예정되었던 기일보다 훨씬 앞당겨졌기에 쌍둥이의 두 뺨은 퉁퉁 부어있고, 입은 댓 발이나 나와 있었다.
여행가방에 짐을 챙겨 넣는 손길들이 아주 거칠다.
특히 오딜은 거의 울상이라고 말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스승님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요?”
“아직 조수님이랑 별거 못했는데...”
“상황이 상황이잖니. 심통 그만 부리고 어서어서들 짐 챙기렴.”
밍기적밍기적.
쌍둥이는 정말 죽어도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짐을 느릿느릿하게 쌀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던 데네브가 시우에게 물었다.
“혹시 가까운 시일 내로 저희 저택에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조만간 시우 군의 정식 시민증과 통행권이 발부될 거에요. 다른 마녀들처럼 자유롭게 게헨나를 오고 갈 수 있다는 말이죠.
매번 쌍둥이를 외부로 데려오는 것도 위험하다 싶으니... 한번 방문해주신다면 극진한 손님으로 모시고 싶네요. 이번 일에 대한 감사 인사도 얹어서요.”
“조수님이 저택에 오신다구요?”
“진짜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뿅 방안에서 튀어나오는 쌍둥이.
듣지 않는 척하고 있었으면서 들을 건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조수님이 우리집 오면 내가 뿔닭 찜 만들어줄게! 나도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저도 포커라운스 만들어 드릴게요!”
“포커라운스는 그냥 흰 빵에 견과류랑 꿀만 뿌린 거잖아!”
“언니가 말하는 뿔닭 찜도 레나가 다 재료 손질하고 속 채워 넣은 걸! 언니는 더치 오븐에만 얹어 놓는 거잖아!”
“오딜 오데트, 제발 하루만 오손도손 지내줄 수 없니?”
나란히 쓴웃음을 짓는 데네브와 시우.
서로가 서로의 고충에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뭘요, 저렇게 귀여우니까 가르칠 맛이 나는 거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오딜과 오데트는 마지막으로 시우, 그리고 샤론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얼마 오래 못 있었지만 즐거웠어요. 언니.”
“다음에는 조금 더 이야기하면서 놀아요.”
“그래, 나도 모처럼 귀여....예쁜 여동생이 생긴 기분이라 즐거웠어.”
샤론은 오딜과 오데트의 머리를 나란히 쓰다듬어주었다.
다음에는 시우 차례였다.
팔을 벌려 시우에게 각각 폭 안기는 쌍둥이.
시우는 식겁하며 데네브를 힐끗 보았지만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더 인정받았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포옹 정도는 묵인되는 분위기이다.
물론 그 이상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조수님, 꼭! 꼭! 와야 해? 추수감사절 이전에는 와주었으면 좋겠어.”
“그건 너무 늦어요! 적어도 한 달 뒤에는 와주셔야지!”
“네, 시민증이 나오는 대로 얼굴 한 번 뵈러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쌍둥이를 포옹해준 시우는 데네브에게 조용히 물었다.
“떠나시기 전에,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네, 편히 하세요.”
“메리골드 남작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시우의 말에 데네브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이 되었다.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고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라는 표정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평소의 남작이었어요. 다시 그 오두막에서 두문불출한다는 것까지도요.”
“그렇군요....”
역시 그렇게 된 건가.
시우는 알 수 없는 심경이 되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할지...
그래, 딱 싱숭생숭하다는 표현과 가장 걸맞은 감정인 것 같다.
“개인적인 호기심이지만 제게 맡겼던 쪽지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아니에요, 경망스러운 질문이었네요.”
“아닙니다. 번거롭게 쪽지까지 전달해 주셨는걸요.”
잠깐 어색하게 끊어졌던 대화는 데네브의 살풋한 미소와 함께 이어졌다.
조금 복잡해하던 표정과는 달리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한 현명한 눈빛이었다.
“시우 군은 인기가 많은 것 같네요.”
“예?”
“저도 조금 더 빨리 만났다면 관심이 생겼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쌍둥이를 위해서라면 이런 조언을 하는 게 맞을까 싶긴하지만...”
데네브는 시우의 귓가에 허리를 숙이고 속삭였다.
“여자는 이따끔 아무말 없이 안아주기를 바랄 때가 있답니다. 특히 남녀관계에 서툴수록요.”
“네?”
도저히 시우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데네브의 말뜻 자체가 이해 자체가 가지 않는다기보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해야할까...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낸 데네브는 눈을 찡긋 감고는 쌍둥이를 인솔했다.
“자, 돌아가자 말썽꾸러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