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1.
굴피나무 숲속의 오두막.
아멜리아는 커다란 여행 가방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공간 확장 마법과 경량화가 걸려있는 스승님의 유품 안에는 차곡차곡 쌓여있는 옷가지와 마법 용품, 그리고 하나의 편지와 하나의 쪽지가 살포시 얹혀 있다.
계절은 흘러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무성한 굴피나무 가지와 야생화 가득 핀 마당을 스쳐 가는 바람에는 어느덧 가을 냄새가 났다.
“.........”
아멜리아는 시우를 치유하기 위해 추방자였던 예빈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예빈은 몸과 뇌 일부분을 치유했을 뿐, 결정적으로 그의 인격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지 못했다.
거기서 나선 것이 케테르 공작.
그녀는 시우를 치유해 주었고 회복을 위한 하얀 물약까지 제공해주었다.
대신 아멜리아에게 한가지 대가를 요구하겠다고 말하였다.
여느 때처럼 시우를 그리워하며 마법을 연구하던 아멜리아에게 몇 달째 연락 없던 케테르 공작이 찾아왔다.
‘여와의 약속을 지킬 준비는 되었는가?’
82년간의 은거를 깨고 직접 나선 케테르다.
그녀를 움직이게 할 정도의 일이라면 그 대가는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이 결국 모두 떠나버린 허망한 삶.
후회뿐인 기억들과 그리움을 아련히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잃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서툰 탓에, 무지했던 탓에, 소중히 여길 줄 몰랐던 탓에.
이미 잃어버린 것투성이니까.
“왜 이런걸...”
아멜리아는 가방을 닫기 전 케테르 공작이 건네고 간 두툼한 책을 보았다.
사전만큼이나 두껍고 불길할 정도로 검은 가죽 커버로 덮인 책이었다.
아멜리아는 책을 건네받자마자 물었다.
‘이건 뭐죠?’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이 적힌 책.’
케테르는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살생부라네.’
무시무시한 내용치고는 마치 메뉴판을 가져다준 웨이트리스 같은 말투였다.
케테르 공작이 돌아가고 난 이후.
아멜리아는 찬찬히 살생부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현세 각지에 몸을 숨기고 있는 공적과 호문쿨루스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다짜고짜 현세라니.
다짜고짜 케테르 대신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숙청해야 한다니.
예전의 아멜리아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고 기피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끝냈음에도 놀라울 만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마지막으로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스승님과 행복했던 기억이 묻혀 있는, 시우와 행복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작고 소중한 오두막.
아멜리아는 문득 흔들의자 팔걸이에 걸려있는 시우의 셔츠를 보았다.
원래는 이곳에 두고 가려 했던 물건이다.
이 오두막은 아멜리아에게 소중한 것을 모아두는 보물상자였으니까.
아멜리아는 다시 가방을 열고 그의 옷을 곱게 개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얼굴에 가져가 체취를 맡는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향기, 그와는 정반대로 잊히지 않는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른다.
가방을 열고 셔츠를 넣은 뒤 문을 닫고 오두막을 나섰다.
처마에 걸린 풍경이 공연히 바람을 타고 울었다.
2.
샤론과 시우는 티페레트를 진정시키고 돌려보냈다.
그녀는 나중에 다시 찾아와 제대로 된 배상을 할 것을 약조한 뒤 어두컴컴한 도시로 사라졌다.
“딱하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샤론이 나지막이 말했다.
물론 시우를 다치게 했던 것은, 그리고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직도 쉽사리 용서되지 않는다.
시우의 목을 파고들었던 칼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연민이 남았다.
“그러게.”
인간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걷는다.
마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티페레트 공작은 아니었다.
미래가 아닌 과거는 그 누구라도 바꿀 수 없음에도, 그녀는 과거라는 이름의 수렁에 빨려 들어가 끊임없이 괴로워 해야하는 사람이었다.
시우도 착잡한 마음을 담배로 달랬다.
분위기도 달래려는 것인지 옆에서 샤론이 슬쩍 끼어든다.
“그거 맛있어?”
“맛? 아니? 그냥 피우는 거지.”
“나도 마법 때문에 종종 피우기는 하는데... 진짜 맛없던데.”
“가끔 머리 비울 때 좋아. 폐암으로 죽을 걱정도 없으니까 더 열심히 펴야지.”
“뭐야 그게.”
샤론은 간지러운 듯이 작게 몸을 말며 웃었다.
문득 생각이 나 말한다.
“아, 고마워 그리고.”
“뭐가?”
“나 도와주려고 해서.”
“야, 아씨...! 놀리지 마! 난 진짜 뭔 일 날 줄 알았단 말야. 안 그래도 너 늦게 돌아와서 걱정했는데...”
티페레트의 모습을 보자마자 시우를 뒤로 숨기며 싸울 채비를 갖추던 샤론.
시우는 순전히 제 몸을 사리지 않는 샤론의 희생 플레이에 감탄했을 뿐인데...
샤론은 그걸 놀리는 것이라 받아들인 듯하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시우의 어깨를 팡팡 내려쳤으니 말이다.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고맙다고.”
“........”
아직도 시우를 때리고 있는 손목을 슬쩍 잡으며 말하자 샤론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이 굳었다.
그리고는 눈을 대각선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고, 고맙긴... 내가 훨씬 더 고마운 거 많은데...”
이 반응...
뭔가 대꾸하기 모호하다.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반쯤 남은 꽁초를 쓰레기통에 넣은 뒤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어제처럼 소파에 드러누워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인기척이 느껴진다.
샤론이었다.
“왜? 잠이 안 와?”
“응, 안 와. 오늘도 거실에서 자려고?”
샤론은 시우 옆에 비스듬하게 걸쳐 앉더니 대뜸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사락사락 시우의 머리카락을 쓸어준다.
“오늘은 들어가서 자자. 내 방 침대 넓잖아.”
“들어가서? 같이?”
“안 될 거 뭐 있담?”
“괜히 불편하잖아. 소파도 침대처럼 편해. 이거 비싼 거잖아.”
“그래도... 정 그러면 내가 안 잘게 오늘.”
“됐어. 나도 굳이 안 자도 돼.”
여느 때와 같은 잡담이다.
쌍둥이가 오고 나서부터는 둘 다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느긋이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 오늘도 할래?”
샤론은 시우를 슬쩍 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할래?’ 사이에 생략된 단어가 무엇인지는 수줍으면서도 달짝지근한 샤론의 말투만 봐도 알 수 있다.
샤론의 포상 타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쌍둥이도 있잖아.”
“뭐 어때? 자는데.”
이거 어쩐지 애들 재우고 딸의 생모와 함께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느낌일 것 같은데.
“에이 됐어, 너도 힘들었을 텐데.”
시우도 시우지만 샤론도 오늘 고생이 많았다.
막 성욕이 쌓여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샤론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고 싶어!”
의외로 샤론의 반응이 격렬했다.
물론 뒤따라오는 말은 매우 소심해 거의 들리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아니, 뭐.. 그런거면 뭐....”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에 휩쓸리자 엄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싫냐고?
그럴 리가 있나.
결국 시우는 몸을 일으켜 털레털레 샤론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한 가득 나는 어스름한 방안.
샤론은 훌렁 윗옷을 벗었다.
아직 등과 가슴통 옆으로 슬쩍 삐져나온 옆 가슴만 보이는데도 고추가 반응한다.
이게 파블로프의 개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건가?
샤론의 녹발은 달빛을 받자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마치 전설 속 숲의 요정을 떠올리게 한다.
“침대 위에 앉을래?”
“어, 응.’
샤론은 수줍게 한 쪽 팔로 가슴을 가리며 권했다.
사실 ‘가슴을 가리며’이라는 표현엔 좀 어폐가 있다.
왜냐면 둔중하게 출렁이는 샤론의 맘마통은 두 팔로도 가리기 어려운 위용을 뽐내니 말이다.
결국 가린 것은 젖꼭지 뿐이라는 말인데...
이게 또 남자를 애타게 한다.
샤론은 쪼그려 앉더니 시우의 바지를 팬티와 함께 벗겨냈다.
몇 번 해본 일이라 시우도 엉덩이를 들어 샤론을 보조해주었다.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발기해 있는 자지의 열기가 은근히 샤론의 뺨을 그을렸다.
샤론은 붉게 물든 얼굴로 빤히 자지를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시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샤론이 대뜸 자신의 반바지 고무줄에 엄지손가락을 걸더니 스르륵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매끈했다.
흉이 지거나 잡티 따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장인이 만든 조각상이나 누드화를 연상시켰다.
허리께까지 치렁하게 늘어진 결 좋은 머리카락.
풍만하고 여성스러운 유방과 첨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젖꼭지.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복근.
사랑스럽게 옴폭 들어간 배꼽.
아름다운 하트 모양을 그리는 골반과 치골.
거웃 하나 없는 하복부에 선연하게 그려진 마녀의 낙인.
거기에 침대에 앉아 있는 탓에 꼭 다물려 있는 샤론의 보두덩이까지 보였다.
창가에 스며든 달빛 아래서 샤론의 살갗은 녹인 설탕을 뿌린 듯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
시우는 할 말을 잊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곡선을 모으고 선별해 여성스러움이라는 작품으로 직조한다면 저런 모양새가 나올 것 같다.
충격적이다.
“나, 나... 오늘 너무 무서웠어.”
샤론은 보기 좋을 정도로 살집이 있는 허벅지를 슥슥 비벼가며 입을 열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종아리와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그녀도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시우의 앞에 알몸으로 선 그녀의 각오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
“너를 잃게 될까 봐....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어.”
“........”
샤론은 한 걸음 한 걸음 시우에게 다가왔다.
그때마다 시우의 눈에 씌워져 있던 필터가 벗겨지고 새로이 씌워지는 듯했다.
친구가 아닌 여자.
여자가 아닌 암컷.
시우조차 그런 생각을 품게 할 정도로 샤론의 알몸은 악마적인 관능을 줄줄 뿌렸다.
샤론은 마치 걸쳐 앉듯이 굳어 있는 시우의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아랫배 위로 우뚝 서 있던 시우의 자지가 샤론의 촉촉한 꽃잎에 눌리며 그 열기를 공유한다.
긴장한 샤론의 팔다리는 서늘했지만 그녀의 꽃잎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열욕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내, 내가 아직 너랑 대등한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건 알아.”
샤론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처럼 시우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시우의 단단한 가슴팍에 모성의 집약인 샤론의 젖가슴이 비벼졌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싶지만... 그래도 나중에 이런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고 싶어.”
“어어....”
샤론의 반짝거리는 민트빛의 눈이 흔들리는 시우의 것과 마주친다.
이 어둠 속에서도 욕염과 능열로 촉촉하게 젖은 샤론의 눈동자는 오싹한 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시우의 입으로 샤론의 혀가 굴을 파고드는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샤론의 혀를 받아들이고 혀를 섞었다.
무척이나 달콤하고 까칠한 샤론의 혀가 능숙하게 시우의 입안을 뒤흔든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바짝 붙은 샤론의 꽃잎에 자지의 밑단이 비벼지며 움찔거린다.
조금씩 물기가 불어나고 있었다.
샤론은 짧은 키스를 끝내고 말했다.
“대등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당분간은 친구 사이라는 것도 좋으니까.... 날 안아주면 안 될까?”
샤론은 애처롭게 떨리는 가련한 목소리로 시우에게 부탁했다.
“시우가 날 여자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