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203화 (203/917)

#203

1.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

100년 전에 견습마녀를 물병자리의 마녀에게 잃었다.

위치포인트를 만들었다.

샤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는 꽤 들었지만 정작 이렇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 쇼핑몰에서 나눴던 건 대화라기에는 너무 일방적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 면밀히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온갖 머리색이 다 있는 게헨나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분홍빛 머리카락.

신촌 홍대 일대를 걷다 보면 완전 탈색 이후 저렇게 분홍머리로 염색하는 사람이 간간히 눈에 띄는데 단언할 수 있었다.

티페레트만큼 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을.

굳게 다물린 입술과 엄숙하고 가지런한 눈썹.

그리고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는 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체구가 작다.

쌍둥이보다 조금 크고 아멜리아보다 살짝 작은 정도?

특히 눈과 머리칼 색 때문인지 조금 더 어려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은 평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역시나 아름답다.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저 굳게 다물린 꽃잎같은 입술이 열리며 무슨 질문이 날아올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아, 제가 먼저 여쭈어야 하는 겁니까?”

“그렇네. 설명이 부족했군.”

시우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예쁜 건 예쁜 거고.

이것만큼은 좀 화나서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오해하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다짜고짜 공격하시다니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게다가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휘말려 들었지 않습니까. 저는 정황상 그럴 수 있었다고 해도 옆에 마녀까지 공격하신 거... 왜 그러신 건가요?”

처음 그녀를 마주했을 때 당혹감이 줄어들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생기자 문득 불만이 튀어나왔다.

시우야 리본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당시 갑옷으로 꽁꽁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오해였다치자.

그러나 샤론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험한 꼴을 당해야 했느냔 말이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그리고 그대가 에아 사달멜리크 본인, 혹은 그녀와 연관된 자라는 의혹이 있네. 지금도 변함이 없어. 그 마녀의 경우 제삼자로 위장한 방해꾼 혹은 협력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지한 것뿐이네.”

“그러면, 샤론... 아니 아까 그 녹색 머리의 마녀도 여차하면 해칠 예정이셨단 말씀이시네요?”

소중한 사람을 잃고 복수를 위해 현세를 떠돌던 공작이 눈이 뒤집힐 수는 있다.

시우도 거기까지는 정상참작이 가능했다.

어차피 잠깐 아프기는 했지만 몸도 다 나았고 딱히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샤론이 슬퍼하는 모습을 봤다.

그것까지 순순히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질문은 한 번에 하나라네.”

“뭐든 물어보시죠.”

“.........”

티페레트는 힐난의 기색이 곁들어진 시우의 말에 조용히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시우도 흥분으로 달아오르던 머리를 식히고 팔짱을 꼈다.

이 이상 감정이 앞서 좋을 것 없을 것 같다.

“자네는 에아 사달멜리크와 어떤 관계지?”

“개썅년이죠. 그 나쁜 년이 쳐들어와서 제 눈깔을 뽑아버렸으니까요. 그때 머리도 다쳐서 사경을 헤맸고요.”

즉답이었다.

실제로 에아에 대한 시우의 감정은 극악 그 자체였다.

여러 명의 마녀와 견습마녀를 살해한 것, 그 자체로도 생리적 혐오감이 생기는 마당에 즐거운 듯 엄지로 눈깔을 파헤쳤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얼굴만 떠올려도 그때 느꼈던 고통이 재생된다.

칼처럼 잘라 대답하는 시우의 말이 끝나자 깜빡하며 빛나던 3개의 문자 중 하나가 꺼졌다.

티페레트는 떨리는 눈으로 그 문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하나의 문답을 주고받았고, 그 문답에 거짓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다.

다시 시우의 질문.

“아까와 같은 질문입니다. 샤론도 그 자리에서 다치게 할 작정이셨나요?”

“....그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네. 어느 정도 겁을 줘서 진실을 토로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얘를 괴롭혀요? 그 친구가 집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는 아세요?”

“........”

“아무튼 전 더 여쭤볼 것도 없네요. 나머지 물어보시죠.”

도리어 압박당하는 듯이 몰아붙여지는 엘로아.

아까의 당당한 기색이 어디 갔는지 무척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왜 사달멜리크와 내 견습마녀의 자성마법을 사용하는 거지?”

“모릅니다.”

“뭐?”

“정말 모릅니다. 쓰러졌다 몇 개월 만에 다시 깨어났을 때 자연스럽게 낙인이 새겨져 있었어요. 무엇보다 그 공작님의 견습마녀의 자성마법이 저한테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제 낙인에 있던 그 마법이 무슨 마법인지도 파악을 못 했었거든요.”

“........”

시우는 굳이 묻지 않았던 것까지 줄줄이 말했다.

아무리 공작의 태도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원한을 남겨놓기에는 부담스러운 상대이다.

이 김에 가능한 모든 오해를 털고 싶었다.

공작은 휙 고개를 돌려 주위에서 떠돌던 계약의 문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빛나던 문자 하나가 사라졌다.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말이다.

이 계약은 거짓을 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또한 억제력이 엄청나다.

말을 교묘하게 돌리는 그럴듯한 속임수,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같은 꼼수를 원천차단하는 강력한 장치가 걸려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에아와는 오직 적대 관계이며 자신이 왜 두 가지 자성마법을 다루는 것인지도 모르고 있는 말.

문제는 그것이 완벽한 해명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떻게 마법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면 몰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니.

결백하다면 결백하고, 수상하다면 수상한... 어느 쪽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갈리는 애매모호한 답이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절 의심하고 계신가요?”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티페레트 공작이 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그녀의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것을 시우도 대답하면서 느꼈다.

그녀는 혼란이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답했다.

“모르겠군... 실로 모르겠어.”

엘로아는 지금까지 많은 군상을 접해왔다.

근본부터 글러 먹은 악.

태생이 남을 위하는 선.

상황을 봐서 적당히 타협하는 중립 등등.

타고난 사람의 기질 정도는 대화 몇 마디 정도면 손금보듯 보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 판단에 따르면 시우는 지극히 선한 남자였다.

자신이 다친 것보다 다칠 뻔했던 친구를 위해 화를 내는 것도.

주변에서 절대 나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 입을 모아 말하는 것도.

거기에 그의 자백이 더해진다면 무언가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사건에 휘말린 선량한 피해자라는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마지막 질문하시죠.”

“시우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 옥상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오늘 쇼핑몰의 옥상에서 마주했던, 시우를 살려달라며 울며 카드를 건네던 마녀였다.

“뭐, 뭐야! 또, 또 온 건가요?”

그녀는 엘로아를 발견하자마자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급히 완드를 치켜들고 시우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한번 격돌했으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도 그를 지키려는 듯이 적의를 드러낸다.

“시우야! 빨리 도망가! 여기는 내가 맡을게!”

“.........”

“.........”

샤론은 엘로아가 또 다시 시우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아무런 반응 없이 멀뚱히 서 있자 휙휙 고개를 돌리며 시우와 엘로아를 번갈아 본다.

그리고 슬그머니 완드를 소환해제했다.

“뭐, 뭔데? 이거 아니야?”

“어... 음, 그거 아닌 것 같아.”

엘로아는 마음이 굳은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위에 떠돌던 계약의 문자들이 검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더 물을 것은 없다.

“미안하네.”

엇! 할 새도 없이 엘로아는 두사람 앞에 무릎 꿇었다.

사람의 평소 행실과 행보는 그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의 평을 통해 알 수 있다고들 한다.

단순히 그의 말뿐이라면 아직 수상한 구석도 많고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아닌 네 명이 필사적으로 그를 옹호한다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에아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설령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공범 혹은 동업의 관계가 아니며, 철저한 피해자일 뿐이다.

“자세한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핍박한 점에 있어 깊게 사죄하고 싶네. 또한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까지 멋대로 끌어들이려 한 부분도 어찌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엘로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마를 바닥까지 숙였다.

그녀의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이 바닥 부채꼴로 흩어진다.

“면목이 없네.... 유구무언일세.... 합당한 보상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줄 수 있겠나?”

“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저, 저도 이제는 괜찮은데요...”

시우도 샤론도 어쩔 줄을 모르며 허둥지둥했다.

시우는 애초에 엘로아에게 그렇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 샤론이 휘말렸다는 점에서 분개했으나 지금까지 들어왔던 엘로아의 행보는 그 어떤 마녀보다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건 샤론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괴로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가며, 목숨을 걸고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사로잡은 그녀의 정의로운 행동은 칭송받을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 공작이 오해가 있었다 한들 직접 무릎을 꿇고 사죄를 구함에야.

더 원망하려야 원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어나세요. 오해도 풀렸고 사과도 받았으니 이젠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 미안하네. 이대로 있게 해주게.”

시우는 엘로아를 일으키려고 몸을 숙였지만 그녀는 바닥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이 왜 이렇게 센지 모르겠다.

시우가 샤론에게 눈짓하자 샤론도 호다닥 달려와 합세했다.

“티페레트 공작님, 고개를 드셔요. 분명 오늘 있던 일은 진짜진짜 화나고, 또 분했지만 저도 용서할게요.”

샤론이 일으키고 나서야 엘로아는 고개를 들었다.

시우도 샤론도 깜짝 놀랐다.

그 엄숙하고 강해 보이던 엘로아의 눈가에 글썽이며 맺힌 눈물 때문이었다.

목소리가 하나도 떨리지 않아 전혀 알지 못했다.

“내 잘못일세, 전부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탓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볼모로 잡아 협잡했던 것은 아무리 사죄해도 부족하네.”

“사, 사랑하는 사람...”

당황하는 샤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엘로아의 앞에 마주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는다.

엘로아의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긴 한데...

그녀의 슬픈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별 볼일 없는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다.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요.”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어...”

“아이참, 괜찮다니까요...”

어느새 샤론도 눈물을 글썽이며 엘로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느닷없이 시작되었던 청문회는 이산가족 상봉 같은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