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1.
샤론이 처음 영화를 접할때 그랬듯 쌍둥이의 반응도 무척 좋았다.
배우의 모공 개수까지 셀 수 있을 법한 화질로 상영되는 로맨스 영화.
영상미로 유명한 작품인 만큼 쌍둥이의 이목을 쏙 사로잡았다.
시우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쌍둥이는 상영 전까지 입을 재잘거리던 입을 꾹 다물고 집중했다.
그러니까, 한 15분 정도?
“코오.....”
“고로롱.....”
샤론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이제 막 본격적인 스토리 전개가 시작되려던 참이었는데 쌍둥이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그러게... 진짜 신기하다. 1초 차이도 없이 동시에 잠드네. 조는 박자도 똑같더니.”
인형탈처럼 다리부터 넣어야 하는 일체형 파자마.
묘하게 각자 성격과 맞는 파자마를 골라 입은 쌍둥이는 어느샌가 소파에 드러누워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하긴 오늘 일정과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피곤할 만했다.
이래저래 정신적으로 지칠 일도 많았고, 육체적으로도 마찬가지고.
특히나 어제 늦은 새벽 태풍을 뚫고 밤산책까지 다녀온 오데트는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다.
“어떡해, 너무 귀엽다. 이런 말 하면 안된다나? 그런데 어째 귀여운데...”
샤론은 몹시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봤을 때 여자들이 짓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쏙 앞으로 모인 입매에 여성스럽게 입을 가린 손.
거의 울먹일 정도로 초롱거리는 눈빛까지.
시우는 쌍둥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팔을 뺐다.
“우웅우웅....”
오딜도 오데트도 잠결에 눈썹을 찌푸리며 소매를 잡고 늘어진다.
그래도 용케 깨지는 않았다.
“잘 잔다~.”
“그러게, 여기서 재울 수는 없고... 내 방으로 옮겨야겠다.”
“나도 도와줄까?”
“아니야, 이 정돈 나 혼자도 할 수 있어.”
“오~ 시우, 기특해졌어.”
시우는 리본을 꺼내 빙글빙글 엮어서 해먹처럼 만들었다.
요새 이모저모 실생활에서 활용하며 특훈을 한 보람이 있다.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리본의 개수도 2개로 늘었고, 이렇게 복잡한 모양을 짜낼 수도 있게 되었으니.
오늘 그 때문에 오해를 사 얻어맞은 걸 생각하면 살짝 억울한 감은 있지만...
지금은 쌍둥이를 깨우지 않고 무사 배송할 수 있으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천사같이 잠든 쌍둥이를 나란히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 뒤 문을 닫고 나왔다.
둘 다 잠깐 뒤척였지만 한 번도 깨지 않고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사이좋게 잘도 잔다.
밖으로 나오자 샤론은 소파에 앉아 꺼진 TV를 바라보며 살랑살랑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그냥, 앉아 있지.”
잠깐 조용해졌던 샤론은 시우를 쓱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정들게.”
“그냥, 오딜 양이랑 오데트 양 하던 게 생각나서. 너무 귀엽지 않아?”
“그렇지.”
오딜과 오데트도 세월이 지나 경험이 쌓인 마녀가 된다면 제머나이 백작처럼 위엄 넘치는 마녀가 될까?
솔직히 지금까지 지켜봐 온 모습으로는 잘 상상이 안 갔다.
“처음에는 엄청 무서울 줄 알았거든.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왜 있잖아. 그, 그...”
“겉으로만 보면 오냐오냐 자란 귀족 영애 느낌이 물씬 나긴 해. 괜히 차 맛없다고 시비 걸 것 같고. 손수건 얼굴에 던질 것 같고.”
“맞아 그거!”
표현이 적절했는지 샤론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무튼 그런 느낌 때문에 조금 그랬는데. 마냥 예쁘네, 순둥순둥하고. 데려가서 여동생으로 삼고 싶을 정도야.”
“막상 그러면 꽤 피곤할걸? 내가 시달려봐서 알지.”
쌍둥이가 귀엽고 예쁘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순둥순둥이라....
둘의 환상적인 호흡에 홀라당 약점을 잡혔던 시우로서는 쉽게 공감하기 힘든 말이다.
지금이야 하하호호 쌍둥이와 이런저런 장난도 치지만 처음 약점을 잡혔던 때는 시우도 등골이 오싹했었다.
“난 담배 좀 피우고 오려는데 넌? 마저 영화 보려고?”
“아냐, 나도 잘 준비하게. 너 만나고 부쩍 잠을 많이 자는 것 같아. 원랜 거의 안 잤는데.”
“아무 생각 없이 머리 비우는 게 좋긴 하지.”
“그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짓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태풍이 지나갔다 해도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는 무거웠다.
그나마 좋은 점이 있다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 정도려나?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이자 담백한 연기가 폐부를 채웠다.
“후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눈이 따끔거렸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가서인지 노곤했다.
정신적인 충격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배테랑 군인도 아닌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죽는, 아니 학살당하는 걸 봤으니.
오히려 이 정도로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수상쩍을 정도다.
보통 영화 같은 거 보면 살인 현장만 목격해도 토하고 악몽 꾸고 난리 나지 않나?
시우는 새삼 자신의 냉담함을 깨닫고 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띠링 띠링
전화가 울렸다.
한참 전에 받았지만 정작 먼저 연락해 본 적은 없는 연락처.
데네브 제머나이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아, 거기에 놔주세요]
주변이 소란스러운 걸 보면 ‘아 거기에 놔주세요’는 아마 이쪽에게 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큰일이 있는 직후인데도 쌍둥이가 덩그러니 오피스텔에 방치된 이유.
데네브가 사건 정리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 들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받을 건 다 받고 하는 일이니 고생이랄 것도 없죠. 쌍둥이는 잘 있나요?]
“네, 방금까지 실컷 먹고 마시시다가 지금 곤히 주무십니다.”
[특별히 무서워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고요?]
여기서는 ‘네, 전혀요. 먹다 지쳐서 쓰러지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백작님을 많이 보고 싶어하시더라고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해주는 편이 낫겠지.
옛날 생각을 하며 곁들인 아첨이다.
[후훗, 그 개구쟁이들이 저를요? 그렇게 보고 싶다고 돌림노래를 부르던 조수님이 옆에 있는데? 그럴 리가요. 능글맞으시네요]
“하하.”
의도는 단숨에 간파당했지만 피로에 절어 있던 데네브의 목소리에서 느슨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면 성공이구나 싶다.
잠시만요라는 데네브의 목소리와 함께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따로 연락을 드린 이유는 쌍둥이들 때문만은 아니에요]
“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도 쌍둥이를 무사하게 돌려보내 줘서 고마워요. 은혜를 입었네요]
사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쌍둥이가 곁에 있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게 있었을까 싶은데...
데네브는 시우의 결단력 있는 행동 자체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이대로 아무런 보상 없이 넘어가서야 저의 체면도 서질 않죠. 특별히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딱히 필요한 건 없습니다. 이미 주신 것만으로도... 아.”
[뭔가 생각나는 게 있나 보네요]
생각해보니 샤론의 채권자 중에는 제머나이 가문이 있다.
제머나이의 반지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던 샤론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500억에 달하는 빚 중 꽤 커다란 액수가 제머나이 가문에서 융통된 것이 아닐까?
“아닙니다. 다음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샤론의 의사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제머나이 가문에서는 이미 많은 것을 지원받는 상황이다.
이번처럼 별것도 아닌 일에 떡하니 그런 거액의 돈 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차 상의를 해보든가 해야지.
[그럼, 저도 지금은 한가하지 않으니 다음에 정식으로 묻도록 할게요]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이었기에 시우는 다급히 물었다.
“백작님 한 가지만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네]
“혹시 제가 어째서 에아 사달멜리크의 자성마법을 다루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하아... 정말 본인도 모르는 거였군요. 도리어 제가 묻고 싶던 질문이에요]
역시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는 없지.
하지만 한창 바쁜 듯한 데네브에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네, 바쁘신데 공연히 죄송합니다.”
[뭘요, 무슨 일이 생기면 부담 없이 연락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담배는 어느샌가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 가 역한 연기를 풍기고 있었다.
시우는 문득 오늘 변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 짧게 묵념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다.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우울함은 그것으로 떨쳐내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시우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 마녀가 느닷없이 사람 없던 옥상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
오늘 시우를 에아로 착각하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붕권을 때려 박았던 장본인.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한이 불알을 쪼그라뜨리고, 소름이 닭처럼 다닥다닥 돋았다.
등골이 싸늘해지는 광경 속에서 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이번에도 때리실 거면 간 쪽은 피해 주세요. 제가 요즘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안 좋거든요.”
동시에 불쑥 강한 투지가 솟은 탓일까?
아니면 진짜 간이 박살 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간땡이가 팅팅 부어버린 걸까?.
시우는 저도 모르게 그런 어이없는 말을 뱉고 있었다.
스스로 말해놓고도 당황했다.
“........”
농담이라기에는 빈정거림이나 도발에 가까운 말실수에 전전긍긍할 무렵.
하얀 옷을 걸친 공작은 입술을 꾹 다물고 시우는 노려보았다.
다만 처음의 독기는 없다.
어디까지나 확신이 없는,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자네는... 누구인가?”
반나절 전에 들었던 대로 가냘프고 높은 음색이었다.
제철 대게마냥 꽉꽉 차서 다부졌던 주먹과는 별개로 힘없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샤론을 다칠 뻔하게 만들고 시우까지 반쯤 아작냈던 티페레트다.
보는 대로 욕을 바가지로 쏟아주고 싶을 줄 알았는데...
냉랭한 가면 뒤로 언뜻 비치는 나약한 모습, 톡 건들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분위기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말을 아꼈다.
시우가 발끈해서 덤벼든다고 뭐가 되는 상대도 아니고 말이다.
“계약한다.”
하지만 느긋한 연민을 품을 때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엘로아가 공중에서 검을 꺼내 들며 영창을 외웠으니.
옆면에 알 수 없는 12개의 문자가 음각된 아름다운 검이었다.
“피어라!”
쌍둥이는 오해가 풀렸다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실수였던 걸까?
생각해보면 데네브는 물론 시우 자신조차 왜 자신이 에아의 리본을 사용하는지, 공작의 견습마녀의 자성마법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모른다.
애초에 해명될 여지가 어디에도 없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는 대마녀 중에서도 대마녀.
요즘 좀 강해졌다지만 시우를 지렁이처럼 터뜨릴 수 있는 23 위계의 마녀다.
검은 갑주가 몸 위를 감싸며 살 궁리를 하던 시우.
엘로아는 시우 발치에 검을 던져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걸로 안심할 순 없다.
그녀라면 맨주먹으로도 시우를 골로 보낼 수 있다는 걸 반나절 전에 확인하지 않았던가?
“당장 싸울 의사는 없네.”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녀는 두 손까지 순순히 들어 보였다.
그보다 ‘당장’은 뭔소리린지.
조금 있다가 싸워도 뚜드려 맞는 건 매한가지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다만 묻고 싶네. 자네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우는 안대 너머로 아주아주 강력한 마력의 발현을 보았다.
살면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농밀한 마력이 공작의 입에서 피어 나온다.
언령.
술자의 의지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형상화하는 마법.
용언이라 불리는 고등 마법이 눈앞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공작의 언령에 공명해 검에 새겨진 문자 중 세 개의 문자가 빛났다.
그 문자는 일제히 주변으로 퍼져 나가더니 시우와 엘로아의 주변을 감싼다.
“계약을 맺고 싶네. 서로 3가지의 질문을 할 수 있으며 거짓을 입에 올릴 수 없는 계약일세. 동의하겠나?”
다행히 그녀의 말처럼 적의가 느껴지는 부류의 마법은 아니다.
“이런 편리한 게 있었으면 먼저 써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시우는 살짝 억울했다.
진작에 사용했다면 시우가 두들겨 맞을 일도 없을 것이고, 샤론이 다칠 뻔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마법으로 충분히 오해가 풀렸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손을 올려 시우의 주변에 아른거리는 문자열에 손을 얹는다.
동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몸을 옭아매는 것이 느껴졌다.
자백의 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방적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자백의 시와는 다르게 피술자가 동의를 요구한만큼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억제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의하겠습니다.”
그렇게 아닌 밤중에 청문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