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1.
건물 사이를 날듯이 뛰어오르던 티페레트는 보았다.
서울에서 가장 커다란 종합전시장 코엑스가 커다란 원 형태의 결계로 둘러 쌓여있는 것을.
예장이 현현시킨 저 이계 안에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엘로아는 가장 먼저 피리를 파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결계 마법에는 중추와 촉매가 존재한다.
이 경우 핵이 되는 것은 다곤의 피리일 것이다.
피해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결계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피리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결계 마법의 보편적인 특징 때문이다.
결계는 통상적으로 외부에서 내부를 관측하거나 자유로이 오갈 수 없게 끔 생성된다.
내외를 분리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 당연하다.
아마 정체 모를 기현상에 당황하고 있을 군경과 기자도 정작 코엑스 내부를 살피거나 진입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근 100년을 통틀어 가장 커다란 사건의 뒤처리를 떠맡게 될 수아 지부장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엘로아는 영창을 읊조렸다.
“계약한다.”
그녀의 자홍색 눈에 은은한 마력이 깃들며 ‘진실의 빛’이 너울거리기 시작한다.
티페레트의 자성마법은 ‘계약의 마법’.
계약이란 본디 대가를 수반한다.
이제부터 그녀의 눈은 모든 현혹과 눈속임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약이 종료되면 그 대가로 한 시간 가량 시력을 잃겠지만 말이다.
계약으로 얻은 힘이 눈에 깃들자 시야를 차폐하던 결계가 유리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아....”
수 킬로미터 미터 떨어진 코엑스 몰의 옥상에서 피리를 발견한 엘로아.
연이어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녀가 추격하던 적기사를 색만 바꾸어 놓은 듯한 하얀 기사가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의아하게 여길지언정 엘로아가 동요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기사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검은 갑옷.
그 갑옷을 발견한 엘로아는 격정을 느꼈다.
등 허리에서 뻗어있는 두 가닥의 리본.
색은 조금 달랐지만 그 생김새는 틀림없다.
하루도 한 시도 단 일 초도 잊은 적 없던, 사랑스러운 라피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 에아 사달멜리크의 자성마법.
저 모양새와 사용 방법 모두 ‘처녀의 베틀’에서 직조한 리본이다.
“그렇지....!”
희열.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폭발이었다.
요 며칠간 느꼈던 권태, 우울, 무기력함을 잿가루처럼 날려버리며 심장을 불사르는 짜릿한 쾌감.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믿고 있었다. 네년이 죽었을 리 없다고 믿고 있었느니라.”
살아있었다.
에아 사달멜리크는 살아 있던 것이다.
엘로아가 그토록 바랬던 대로 멀쩡히 살아 오늘도 열심히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열락이 시들시들했던 엘로아의 체모 한 가닥 한 가닥을 쭈뼛 세우며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엘로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메리골드 남작에게 당한 후유증이 남아있는 것인지 답지 않게 검과 방패를 들고 육탄전을 벌이는 에아는.
검술을 쓰고 있었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익숙한 궤도의 빗겨내기가 흉흉한 백기사의 찌르기를 흘려내고.
너무나도 눈에 익은 익숙한 궤도의 상단 베기가 백기사의 몸을 이등분한다.
허무맹랑한 망상임을 알면서도 저기에서 분전하는 마녀가 라피는 아닐까라고 생각해버릴 만큼 유사하다.
틀림없다.
저 검술을, 몸을 사용하는 방식을 티페레트가 잊을 리 없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라피가 물려받았던 ‘만병지왕의 계약’.
에아는 뻔뻔하게도 라피에서 강탈한 계약을 자신의 것인 양 다루고 있는 것이다.
환희로 물들었던 머릿속이 곧장 진흙탕에 처박힌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꽉 깨문 엘로아의 입술이 터져나가며 피가 흘렀다.
더없이 지독한 모독이자 능멸이다.
죽인다.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아니,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죽음을 애원하게 될 만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도록 철저히 망가뜨리다가 부숴주겠다.
엘로아의 발이 허공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쇼핑몰의 옥상에 당도한 엘로아는 주저 없이 방해꾼이 될 것 같은 백기사 3기를 박살 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적기사와 무슨 관계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이 이 앞에 있지 않은가?
100년의 숙원을, 증오를, 원망을 모조리 쏟아낼 수 있는 마녀가 사랑스럽게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림자로 꼴사나운 갑옷을 만들고 기사 흉내를 내는 모습조차 가증스럽다.
만병지왕의 계약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라피를 위해 엘로아가 새로이 만들어낸 그릇이자 계약이었다.
땅을 박찬다.
6개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강화된 신체.
땅을 딛는다.
부드러운 진흙처럼 땅을 파고드는 앞발과 대지와 하나가 된 듯 반듯하게 선 뒷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무술의 정수를 이어받아 발현된 발경(發勁)의 묘리는 조잡한 갑옷을 곤충의 외골격처럼 박살내고 그 안을 파헤쳤다.
“나를 잊지는 않았겠지.”
곤란하다.
입가에 천박한 웃음이 멈추질 않음이.
2.
손맛이 있었다.
“후우....”
형편없이 뒤로 나뒹구는 검은 갑주를 입은 에아를 보며 엘로아는 잔심을 끝냈다.
적을 쓰러뜨린 뒤에도 방심하지 않고 호흡을 고르며 주변을 살피는 행위이다.
술자가 의식을 잃자 그림자처럼 검은 연기로 이루어졌던 갑옷이 흩어진다.
고대하던 원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기를 기원하던 엘로아는 뻣뻣이 굳어버렸다.
“남자?”
리본을 다루고, 라피에게 빼앗은 계약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던 자의 정체는.
충격적이게도 에아 사달멜리크가 아니었다.
아니, 마녀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눈꺼풀이 찢어져 얼굴 반쪽에 피 칠갑을 했음에도 곱상한 얼굴.
청바지에 티셔츠라는 지극히 현세스러운 차림을 한 남자였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반전에 엘로아는 무엇을 해야 할지 조차 잊어버렸다.
혹시 어떤 수작을 벌이는 것이 아닌지.
가령 환혹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여 눈속임을 하는 것이 아닌지를 점검한다.
그러나 낙인 안의 마력은 정순하다.
더군다나 지금 엘로아의 눈은 허상을 꿰뚫어 본다.
“이게... 무슨....”
아연해진 엘로아는 더듬더듬 남자의 몸을 더듬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으니 촉각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영체이다.
가장 완벽한 상태로 신체를 유지해주는 영체의 특성상 옷 위로도 잘 발달한 근육이 만져졌다.
남녀의 신체를 변환할 수 있던 마법이 있던가?
아니 그보다 남자가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한 일이 역사상 있던가?
역시 에아가 사용한 고도의 기만책인가?
어쩌면 그녀가 던진 미끼인가?
극심한 혼란 속에 답을 내어줄 상대는 이미 기절해 있다.
“이게, 이게... 이게....”
“비켜서!”
그때 옥상으로 올라온 한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 정복을 차려입은 주제에 가죽으로 된 라이딩 부츠를 신고 완드를 손에 쥔 짙은 녹발의 마녀였다.
“물러서, 당장 비키지 않으면 공격할 거야.”
그녀의 푸른 눈에는 흐르는 듯한 반사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워있는 남자와 관계가 있는 듯한 마녀, 아마도 추방자.
선제공격을 가해오지 않은 것을 보면 남자가 휘말려들 것을 염려하는 듯하다.
“네가 한 짓인가?”
“무슨 소리야! 내가 이딴 짓을... 어?”
촛불을 훅 불어끄는 것처럼 완드 끝의 에메랄드에서 뭉치고 흩어지던 마력이 사라졌다.
“호, 혹시... 티페레트 공작?”
“그러하네.”
마녀 중에서도 개성 넘치는 분홍빛의 머리카락, 손에 쥐어진 예장 ‘계약의 검’.
쌍둥이의 전언을 듣고 헐레벌떡 코엑스로 달려온 샤론은 시우를 공격한 듯한 인물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100년 전 견습마녀가 살해당한 뒤 복수를 위해 현세를 떠도는 공작의 비화는 세간에도 잘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시우를 공격한 거죠?”
하지만 언뜻 전해 들은 바 그녀는 정의로운 마녀이다.
마녀들이 각자의 사정을 핑계로 호문쿨루스와 공적을 본체만체할 때 솔선해서 위치포인트를 설립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어차피 샤론이 아무리 발돋움한다 한들 상대할 방법이 없는 괴물이다.
따라서 샤론은 섣부르게 움직이기 전에 대화를 시도했다.
“마침 잘됐군. 이 남자는 누구인가?”
샤론이 전투 의지가 없음을 보였음에도 티페레트는 여전히 검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온몸에서 감도는 분위기는 여차하면 시우를 포함해 샤론까지 베어낼 기세이다.
“제 친구예요.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에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이번 사건을 막으려고 여기에서 싸운 거에요. 조금 전에 제머나이 가문의 견습마녀 분들이....”
“이 자가 에아 사달멜리크와 내 견습마녀의 자성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네.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말허리가 잘린 샤론은 입이 턱 막혔다.
에아 사달멜리크가 누구인가?
티페레트 공작의 견습마녀를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공적이다.
시우가 그녀와 맞서 죽을 위기를 넘긴 뒤 마녀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자성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그건 샤론도 몰랐던 사실이다.
하지만 샤론은 시우를 믿었다.
어떤 경위로 이런 복잡한 꼬임이 발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우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다.
공작이 염려하는 악행이 시우의 손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그간의 경험과 기억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샤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판단.
그런 것이 없는 공작이 단지 제삼자의 말을 믿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정말 아니에요. 시우는 조금 바보 같은 면이 있어도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이유 없이 해를 끼칠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난 자네가 누구인지 모르네. 하지만 이런 난리 통에 수상쩍은 남자를 구하기 위해 나타났다면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이면 베겠네. 물러나게.”
단지 허장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공작은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공작의 눈동자와 마주한 샤론은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확증편향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초에 샤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오해를 풀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설득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자네도 수상쩍군. 추방자겠지? 남자로 변장하거나 환생한 에아를 빼돌리기 위한 수작인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나? 자네도 모른 채로 매혹 같은 것에 걸려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게 아니라....”
“물병자리의 마녀는 간악한 자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내 손에서 3번이나 빠져나갔지. 방심한 적은 한차례도 없었어. 이 남자가 에아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다면 자네 역시 속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빠르게 말을 잇는 엘로아의 모습에는 조금의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나 강자이면서 오히려 쫓기는 듯이 궁지에 몰린 듯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마치 샤론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대로 끝내버리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군. 그편이 깔끔하지 않겠는가?”
곧게 뻗어 있던 엘로아의 검이 쓰러진 시우를 향했다.
정말로 죽일 생각은 없다.
정신을 잃은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의 반응을 지켜봄과 동시에 갑자기 나타난 샤론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일종의 블러프였다.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던 남자의 목숨을 위협하면 진실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돼!”
과연 샤론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녀의 발치에서 뻗어 나간 불이 장벽을 만들어 시야를 가렸다.
시멘트에서 돋아난 나무 덩쿨은 시우의 목을 겨누던 칼끝을 가로막았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돌풍에 몸을 맡기고 시우를 빼내기 위해 달려드는 샤론.
동시에 3 계통의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솜씨는 대단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꺅!”
샤론은 내달리던 자세 그대로 엘로아의 손에 목덜미를 채였다.
땅에서 뽑힌 다리가 공중에 붕 뜨더니 그대로 시멘트 바닥 위에 처박힌다.
무슨 일을 벌어진 건지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공작은 냉랭한 눈빛으로 샤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거늘.”
다시 한번 지근거리에서 공작과 얼굴을 마주한 샤론은 확신했다.
광기와 맹신의 그림자.
저렇게 예쁜 색의 눈인데도 지금은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복수심에 잡아먹혀 폭주하고 있을 뿐이다.
“자, 보이느냐?”
공작은 샤론의 목을 틀어 시우를 바라보게 했다.
그의 목에는 어느샌가 빨간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검날의 끝이 살을 파고들어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 남자는 죽네. 살리고 싶다면 자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고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