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97화 (197/917)

#197

1.

싸움의 흐름은 일방적이었다.

다양한 기예와 눈속임으로 시우에게 압박 가하는 백기사.

3M에 달하는 긴 장창이 자유롭게 간격을  조절하며 일방적인 공격을 가했다.

얼굴을 향해 찔러오는가 하면, 이따금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허벅지로 꺾여 내려오기도 한다.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 시우는 가까스로 받아치는 것이 고작인 상태.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찢어진 눈꺼풀에서 흐른 피가 눈시울에 고였다.

-깡! 캉!

미칠 것 같다.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을 앗아갈 일격이 일 초에도 몇 번씩이나 쉴 새 없이 날아온다.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다.

패턴화되지 않는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선 임기응변밖에는 답이 없다.

마법 전투와는 다른 의미로 피가 말렸다.

“후웁!”

시우는 호를 그리며 휘둘러진 창끝을 방패로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붕 회전한 창대에 배를 얻어맞았다.

갑옷을 넘어 전달되는, 내장이 주저앉는 충격.

폐 안의 공기가 쥐어짜진 것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빠져나왔다.

-콰앙!

시우의 뒷발이 힘껏 땅을 밀었다.

납으로 된 족쇄를 찬 것처럼 무거워진 다리를 필사적으로 잡아끌며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애매한 거리에서 싸우느니 차라리 완전 근접해 개싸움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기사는 아주 작은 것 하나 시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밀고 나오는 시우의 돌진을 받아내며 오히려 백스텝.

그로인해 간극이 다시 벌어진다.

냉병기 간의 근접전은 거리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갈린다.

둘의 거리는 언제나 일정했다.

창은 원 없이 찔러올 수 있고, 검은 유효타를 낼 수 없는 간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백기사에 의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신없는 파상공세 속에선 리본을 활용해 떨쳐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백기사와 흑기사는 다시 한 번 맞붙었다.

각기 금빛과 적빛으로 번쩍이는 마력 반사광 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지는 그림자.

차곡차곡 체력이 빠져나가는 탓에 갑옷에 생채기가 늘어간다.

-쾅!

“컥!”

이번에는 아래서 위로 두 번 내지른 창이 돌연 회전했다.

크게 휘둘러진 창대가 사우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목에서 뿌득 좋지 않은 소리가 나며 일순 의식이 아득해진다.

투구와 갑주를 이어주는 부분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 죽어버렸을 것이다.

-쾅! 쾅! 쾅!

유효타를 허용한 나머지 생긴 일시적인 뇌진탕.

땅이 출렁거린다.

안구만 물속에 잠긴 것처럼 시야가 일렁였다.

기껏 조절하던 숨이 턱 빠져나오는 바람에 호흡이 더욱 가빠졌다.

공격은 더 거세졌다. 승기를 잡은 백기사가 싸움을 끝내려는 듯 시우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탕!

절대 놓지 않으려 다짐했던 방패가 세 번의 찌르기에 맥없이 튕겨 나갔다.

활짝 열린 몸통.

백기사는 자세를 낮추고 무릎으로 땅을 밀며 창을 힘껏 찔러온다.

노리는 곳은 심장.

방패를 다시 만드는 것은 늦었다.

몸을 돌리는 것도 늦었다.

사신의 낫이 목에 걸려있음이 생생히 느껴진다.

극한의 상황 속 검을 쥐고 있던 시우의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챙!

“어?”

우연이었을까?

비스듬히 궤도를 파고든 칼날이 찌르기의 경로를 틀었다.

비틀린 창날은 갑옷의 옆구리에 미끄러지며 긴 흉터를 남겼지만 살을 찢지는 못했다.

시우는 커다란 힘을 싣지 않았다.

단지 힘의 축을 아주 조금만 들었을 뿐이다.

일련의 동작은 시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웠고 능숙했다.

경악과는 정반대로 시우의 발이 움직인다.

창의 가장 큰 빈틈은 혼신의 일격을 다한 찌르기가 빗나갔을 때.

싸움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보이는 승기를 이대로 놓아줄 순 없다.

허리를 스쳐 지나간 창대를 옆구리에 끼고 단단히 쥐었다.

가깝다.

도저히 닿을 수 없이 멀어 보이던 백기사의 간격을 저도 모르게 파고들게 된 것이다.

-부웅!

그에 대응해 하얀 방패가 눈사태처럼 밀려왔다.

어차피 방패로 좀 얻어맞는다고 뒤지는 것도 아니다.

뼈를 내주고 목을 친다.

시우는 얻어맞을 각오를 하고 비스듬히 세운 칼끝으로 목울대를 노렸다.

먼저 물러선 것은 백기사였다.

투구를 뒤로 젖히며 필사적으로 시우에게서 물러섰다.

다시 거리가 벌어져 버렸지만 손끝에는 감각이 남아있다.

새털 같은 힘으로 무거운 공격을 흘려보냈던 신묘한 감각이 칼끝을 징징 울리며 감돈다.

그걸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후우....후우....”

거친 숨이 색색 튀어나온다.

온몸에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칼날 위의 춤.

무섭다. 괴롭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다.

일반인에 불과한 시우가 생명을 건 사투에 흥미를 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하하....”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아까운 호흡을 낭비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해보자.

딱 한 번만 통하는지 보자.

견딜 수 없는 위험한 충동이 몸을 지배한다.

시우는 방패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롱소드를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쥔다.

조금 전 시우의 반격은 백기사의 경계심을 끌어올릴 정도로 위험했던 모양이다.

백기사는 아까처럼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창을 최대한 길게 잡은 채 시우를 경계했다.

-끼기기기긱!

공중에서 리본이 꼬아진다.

이제야 활용할 수 있을 여유가 생겼다.

기껏 봉인해 오던 리본의 활용을 허락한 것은 명백히 백기사의 실책이었다.

-핑!

공간을 접으며 쏘아지는 두 가닥의 리본이 백기사의 양옆을 스쳐 지나간다.

언뜻 보기에 빗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하아압!!”

시우는 리본의 양 끝을 옥상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리본을 수축시키며 동시에 바닥을 박차면 그림자의 날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가속이 가능해진다.

바람을 타고 달리듯 순식간에 쇄도하는 시우와 예상하지 못한 급가속에도 반격을 준비하는 백기사.

백기사는 날아오는 시우의 가슴을 노린다.

상단 베기 자세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예리한 일격.

시우는 백기사의 어깨부터 옆구리를 가로지르는 참격을 노린다.

찔러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베어낼 예정이다.

-서걱!

둘의 그림자가 교차하고 시우의 몸이 옥상을 나뒹굴었다.

전력을 기울인 참격의 힘을 몸이 지탱하지 못해 공중에서 한 바퀴를 구르는 꼴이 된 것이다.

낙법을 치는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땅을 튕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지는 백기사가 보인다.

-철그럭!

시우의 심장을 노리던 창이 두꺼운 갑옷과 함께 양단되었다.

그 두껍던 갑주가 통째로 베여나갔고, 두 손에는 금속을 베며 느껴지던 짜릿한 진동만이 남아있었다.

“이겼다!”

시우는 환호성을 질렀다.

장례식 매드무비가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전투가 끝났음에도 혈관에 남아 정신을 고양시켰다.

시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워낙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기억마저 흐릿한 최후의 일격을 되새김질한다.

신비로웠다.

검과 손끝이 하나가 되어 연결되는 기묘한 느낌.

앞을 가로막은 것이 바위였다 한들 매끄럽게 베어냈을 것 같은 참격.

그 기예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서 나왔다니.

“과일도 깎아본 적 없는데...”

하긴 마녀와 마법이 존재하고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이 정도 이상 현상이야 양반이지.

시우는 여기에 왔던 목적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력과 체력 모두 바닥을 쳤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지탱하며 제단 위에 올려진 피리를 검으로 싹둑 베어낸다.

-후에에에에엑!

제령이라도 성공한 것처럼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깊은 바다에서 들리는 심해 괴수의 단말마 같기도 했다.

탁류가 머무는 것처럼 우중충하게 건물 주변을 감싸던 막이 사라졌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던 마력이 사라지자 시우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우....”

생사를 오가던 격전이 끝나자 자연스레 생각나는 참사.

괴물에게 물어 뜯겨 죄 없이 죽어간 사람들.

시우는 자신이 성인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던 타인의 죽음에 자책하며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이라고 자책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저 탄내 같은 씁쓸함과 이런 짓을 벌인 마녀에 대한 분노가 메마른 입안에 감돈다.

처음으로 마주한 끔찍한 광경이 망막에 아른거린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떨쳐냈다.

“도망치자.”

이제 몸을 빼야 할 때다.

일단 시우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비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지쳤다.

갑옷 안의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것이 느껴져 공연히 몸이 떨렸다.

-철컥 철컥 철컥

좌표이동식으로 곧장 오피스텔로 직행하기 위해 계산을 하던 중 시우는 눈을 부릅떴다.

외벽을 타고 기어오른 세 기의 백기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양산형으로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동일한 생김새의 호문쿨루스는 기시감을 일으켰다.

어미 개 몸에서 분열하던 검은 개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겠지.

“에이 시팔, 이건 선 넘었지.”

하나도 겨우겨우 잡아냈는데 세 마리나 더?

죽어도 못한다.

시우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도주에 주력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

새하얀 벼락이 일었다.

-투쾅!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벼락이 아니었다.

놀라운 속도와 힘을 지닌 채 휘둘러진 참격.

물리법칙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흉맹한 일격이 번뜩임과 굉음을 동반했을 뿐이다.

그토록 고생해서 잡았던 백기사가 도마 위에서 손질되는 닭처럼 세로로 잘려나갔다.

강렬한 일격에 시선을 빼앗겼던 시우는 뒤늦게 벼락을 불러낸 마녀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하얗다.

분홍색이다.

눈이 빠질 정도로 집중했음에도 이 정도밖에 식별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날랜 몸놀림.

이윽고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백기사는 새로 나타난 마녀에게 창을 겨누었다.

-투쾅! 투쾅!

그러나,

무의미한 반항이었다.

시우가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맸던 창끝이 휘는 듯한 찌르기가 깔끔하게 빗겨나간다.

뭔가 번쩍번쩍하는 것 같더니 백기사 한 기의 흉갑이 찌그러진 캔처럼 변해버렸다.

다른 한기는 팔다리가 날아간 채 목이 뽑혀 죽었다.

마녀가 일방적인 파괴를 끝내고 멈추고 나서야 시우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흩날리는 백기사의 파편 사이로 서 있는 마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연분홍빛의 머리카락과 마젠타색의 눈동자.

곧고 가늘게 뻗은 속눈썹은 숱이 많고 길어 눈 위에 벚꽃이 한가득 쌓인 듯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검을 쥔 반대 손은 일그러진 투구를 너클볼 그립처럼 잡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녀이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요사하게 눈을 어지럽히는 외모와는 별개로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마녀라기보다는 무인의 것에 가깝다.

그녀의 양어깨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마력의 잔흔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기백이 뿜어져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자홍색의 눈이 휘릭 돌더니 시우를 꿰뚫는다.

동시에 전율했다.

분노와 증오가 농축된 듯한 시선에서 살을 따끔따끔하게 할 정도로 직관적인 살의를 느낀 탓이다.

백기사를 처단했기에 당연히 아군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시우는 황급하게 전투 채비를 갖추었다.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목을 내놓고 죽어줄 순 없지 않은가?

처녀의 베틀에서 리본을 뽑아내고, 방패를 단조해 반신을 가리고, 검으로 반격의 기회를 엿본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엄숙한 말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가 스산한 입김처럼 퍼진다.

약속?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을 여유도 없었다.

이미 검을 쥔 작은 손등에 푸르스름한 정맥이 돋는 것이 보였다.

온다.

시우는 중심을 낮추고 마녀의 동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신경을 기울였다.

호흡이, 거칠게 뛰는 심박이, 심지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조차 느껴질 만큼의 집중.

마녀는 땅을 박찼고.

사라졌다.

놓쳤다.

그것을 깨달은 즉시 반사적으로 방패로 심장과 목, 그리고 머리를 보호한다.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그림자의 경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방어를 시도했다.

-콰아아앙!

“커헉!”

등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

쇠망치로 전신을 두들겨 맞는듯한 고통에 숨이 멎는다.

입에서 활칵 쏟아진 핏물이 투구 가리개 사이로 피안개를 뿜었다.

검격이 아니었다.

마녀는 검을 휘두르지조차 않았다.

그저 진각을 밟고 중단에 작은 주먹을 찔러넣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방패는 물론 갑주까지 부숴버린 것이다.

직감할 수 있었다.

갈비뼈가 작살이 났을 것이다.

간이 터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노린 곳이 심장이었다면 죽었다.

“나를 잊진 않았겠지.”

터널로 빨려들어 가듯 암전이 드리우는 시우의 시야로 희열에 잠긴 듯 광소를 짓고 있는 마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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