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1.
아무리 밝은 햇볕 아래라도 정글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도심은 정글과 같았다.
CCTV와 블랙박스가 넘쳐나는 도심에도 반드시 그늘진 곳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서울 일대 지하에 길게 깔린, 지금은 폐기된 배수 터널 역시 그런 장소 중의 하나였다.
태풍 등의 이유로 도시가 침수되지 않게끔 일대의 빗물을 모아 한강으로 보내는 통로 역할을 하던 곳이나,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터널이 생겨나며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물론 이 구 배수 터널 역시 엄연히 시청의 관리하에 있는 공공시설이다.
그러나 마법으로 살짝 농간을 부려준다면 누구도 찾지 않는,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힌 사각지대로 만들 수 있었다.
-또각또각
지하 45M.
직경이 10M가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면은 구두 굽 소리마저 커다랗게 반사했다.
벽면에는 삭은 부직포가 너덜거리고 빗물이 들어찬 터널 전체에서는 지독한 물비린내가 풍긴다.
델라 레드클리프는 그 안을 장식불 하나에 의존하여 걷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과!
지상에는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으니 군데군데 아직도 제 역할을 하는 배수로에서 폭포수 같은 빗물이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델라는 코너를 돌아 어둡고 거대한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서 울려오는 시끄러운 물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녀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비단 소음 때문은 아니었다.
“하아.....”
그녀는 자랑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불만스레 팔짱을 꼈다.
가뜩이나 쿱쿱한 악취에 섞여 훅 풍겨오는 피비린내 탓이었다.
장식불을 몇 개 추가하자 공동 전체가 밝게 빛난다.
원기둥 형태로 존재하는 공동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제단이 있다.
그 위에는 영혼을 뺏긴 것처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주르륵 누워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여전하네요. 파울라 소치틀.”
그 위에는 한 마녀가 몸을 웅크린 채 무표정하게 단검을 놀리고 있었다.
숙련된 외과의처럼 정확한 솜씨로 가슴을 갈라내고 갈비뼈를 절단한 채 심장을 빼내고 있다.
절반의 얼굴이 뭉개진 비겁의 마녀, 파울라 소치틀은 묵묵히 시선을 들어 델라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델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울라는 묵묵하게 칼을 움직였다.
한 심장을 빼내면 다음 심장을, 그 심장을 빼내면 또 다른 심장을 순식간에 뽑아낸다.
제단 위에 누워있던 32명의 남녀가 유명을 달리하기까지는 10분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델라는 그것을 말리지도 말을 얹지도 않은 채 기다렸다.
케테르 공작이 게헨나를 만들고 유난을 떨기 전까지 인신 공양과 인체실험은 마녀에게 당연시되는 것이었으며 게헨나라면 몰라도 현세의 추방자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기도했다.
“아직도 실험을 계속하는 건가요?”
“나에겐 이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파올라가 손짓하자 허공이 열렸다.
주머니 차원에 숨어있던 호문쿨루스의 신체 일부가 삐죽 튀어나오더니 제단 위에 남은 찌꺼기들을 낚아채갔다.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먹어치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왜 이런 더러운 곳까지 날 부른 거죠?”
“친구인데 오랜만에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이유로 부르지 않았으리란 걸 아니까요.”
“하핫!”
파올라는 멀쩡한 쪽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웃음이라고 여기기 힘들 정도로 기괴한 미소였다.
모래가 자글거리는 듯한 웃음이 끊기고 파올라는 팔을 벌려 오랜 친우를 환영했다.
“임시 공방에 온 걸 환영해. 근사한 디저트도 향긋한 차도 없지만 말이지.”
델라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니까요? 평소에는 연락해도 답하지 않으면서.”
“경고하기 위해서야.”
“경고?”
영문 모를 말에 델라가 의아해할 때 파올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 즉시 공동의 공간이 쭉 찢어지며 사슬에 꽁꽁 묶인 한 호문쿨루스가 나왔다.
-크르르르르....
2M가 넘는 거대한 붉은 갑옷.
5M는 족히 되는 듯한 붉은 창.
15쌍의 눈.
거미줄에 묶인 사마귀가 탈출하려는 것처럼 거칠게 몸을 꿈틀거리는 그 호문쿨루스의 외형은 델라도 익히 들은 바 있는 것이었다.
“....적기사?”
“그래, 보시다시피 아직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지. 놀라운 아이야. 이렇게나 쇠약해져 있는데 50개의 심장을 선물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아.”
파올라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장막처럼 걷혔던 공간이 닫힌다.
그녀의 자성 마법은 호문쿨루스를 부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호문쿨루스는 파올라의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역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아이들은 자아가 강해.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는다니까.”
“이게 절 부른 이유는 아니겠죠? 항상 당신이 하던 짓이잖아요.”
지금까지 지켜본 행위는 구태여 델라를 불러서 ‘경고’하기엔 일상적이다.
그 사실에 델라는 모종의 불안함을 느꼈다.
“저 아이가 들고 있던 창 봤지?”
“붉은가지 말이죠?”
“그래, 붉은가지에 담긴 ‘왜곡’을 이용하면 어쩌면 인과와 순리를 비틀 수 있을지도 몰라. 통상적인 마법이 행할 수 없는 기적도 꿈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래서요?”
델라는 우선 차분히 파올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이 녀석을 길들일 수 없어. 내가 저 붉은가지를 억지로 빼앗아 다룬다 한들 저 아이가 다루는 것보다 못하겠지.”
“아무래도 그렇죠.”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고 동의하는 델라의 앞에 파올라는 히죽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한쪽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려고 해. 너도 휘말릴 수 있으니 당분간 여기를 떠나서 지내는 게 좋아. 이게 내 경고야.”
델라는 그녀의 오랜 친구를 볼 때면 항상 마음이 껄끄러웠다.
단순히 파올라가 공적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손가락질해도 델라는 누구보다 상냥했던 파올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아주 조금의 용기.
그것이 모자랐을 뿐이다.
델라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지 않았나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가끔은 포기라는 걸 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와 동시에 죽일 듯한 시선이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방금까지 신나게 웃고 있던 파올라는 손바닥을 뒤집듯 섬뜩한 표정으로 델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델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돌이키기에 늦었다 해도 무의미한 속죄를 자처하며 고통 속에 허덕이는 친우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파올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마법 따위는 없어요. 창조의 마녀조차 불가능하죠. 설령 왜곡을 활용한다 한들 마찬가지일 거예요.”
“네 정직한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 답해주지. 죽고 싶지 않으면 그 입 다물어.”
“싸울 생각은 없어요. 그냥..... 하아... 미안해요.”
칼날처럼 날카롭게 반응하는 파올라에게 델라는 순순히 사과했다.
어차피 여기 온 것은 그녀와 다투기 위함이 아니다.
델라가 사과하자 파올라도 더는 그녀의 발언을 문제 삼지 않았다.
“계속 말해줘요. 그럼 도대체 뭘하려는 거죠?”
“그건.....”
파올라의 입술일 달싹였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던 델라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떨리는 눈동자로 파올라를 바라보았다.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케테르 공작이 움직일 거예요.”
“그 또한 좋아.”
“그 또한 좋은 게 아니라 그녀가 움직이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죽어요.
델라는 뒷말을 삼켰다.
파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죽을 자리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백 년이 넘는 고통스러운 속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가.
델라는 어느 것에도 답할 수 없었다.
“말리진 않을게요. 하지만 동조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일단은 게헨나의 남작이니까.”
“그저 휘말리지 않게 주의하라고 전할 뿐이야. 친구니까.”
친구라는 말이 묵직하게 가슴에 박힌다.
짧은 상념.
어쩌면 이 모습이 델라가 볼 수 있는 파올라의 마지막 모습.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파올라의 모습 위로 함께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다니며 티격태격했던 시절 파올라의 회상이 겹쳐 보였다.
“후우....”
델라가 구두굽으로 땅을 차자 이면결계와 함께 주변으로 중계식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파올라는 멍한 눈동자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델라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파올라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델라는 중계식이 완전히 퍼지기 전까지 대규모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파올라는 델라를 친구로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녀가 돌연 적의를 드러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해보자는 거지?”
-크르르르
-끼익... 키익...
뒤늦게 파올라의 뒤로 공간이 찢어진다.
십 수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주머니 차원 속에서는 찢어질 듯한 괴수들의 소음과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천수를 부리는 마녀의 이름에 걸맞은 장관이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하다못해 내 손으로 끝내줄게요.”
파올라가 하려는 행동은 마법 연구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마지막 발버둥으로 무고한 인간을 길동무 삼으려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필요한 희생이라면 몰라도 그건 학살에 불과하다.
어차피 케테르 공작의 손에 무참히 살해 당할 거라면 적어도 이 손으로 장례를 치러주자.
“........”
델라의 결의를 읽은 파올라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도 보였고 무척 침울한 것처럼도 보였다.
“넌 역시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해하니까 이러는 거죠.”
“별로 듣고 싶지 않네.”
파올라는 입술을 질끈 물더니 뒤를 돌았다.
동시에 하나둘씩 그녀가 길들여 놓은 호문쿨루스가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타올라라.”
델라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붉은 마력반사광이 용암처럼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델라는 이미 만전의 상태다.
더군다나 이런 좁은 밀실은 화염을 다루는 델라에게 지리적 이점까지 안겨주었다.
-키에에에엑!
-끼이이익!
송장벌레처럼 생긴 괴수, 문어처럼 생긴 괴수, 들개처럼 생긴 괴수, 샴쌍둥이처럼 생긴 괴수 등등이 저마다 다양한 마법을 펼치며 델라에게 대응하려 들었지만 무의미했다.
수천 만 도가 넘어가는 홍련의 파도는 가로막는 모든 적을 한 줌의 재로 불살라버렸다.
이미 전개식을 완벽하게 활성화한 델라는 연거푸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면서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실제로 마력의 10분의 1도 소진하지 않았다.
전투의 흐름, 전장의 위치, 두 사람의 상성 모두 델라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어느덧 십수 마리가 넘던 호문쿨루스는 타거나 녹아 사라져버렸다.
파올라는 아쉬운 기색도 없이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이까짓 쭉정이들만 내는 이유는 뭐죠?”
그럼에도 델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눈이 10개가 넘어가는 것이 없다.
아무리 강화되었다 한들 그 정도의 잡졸로 델라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파올라가 잘 알고 있을 터.
“기다리고 있었어.”
“무엇을?”
“내 장난감 병정이 완성되는 것을.”
델라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방금 막 뽑아 내 제단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던 심장이 간데없다.
“너도 재밌을 거야.”
자포자기하는 것 같은 파올라의 망가진 웃음과 동시에 철컥철컥 쇠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비틀려 열린 공간 속에서 갑옷형의 호문쿨루스가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갑주들은 전신이 백색임을 제외하면 정확히 적기사와 동일한 생김새였다.
그 숫자는 정확히 델라가 방금 제물로 사용한 사람의 숫자와 동일했다.
“호문쿨루스의 ‘복제’는 얼마 전 연구가 끝났어. 네가 말한 대로 쭉정이들은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가장 강한 한 마리만 남겨두면 제물을 바치고 몇 마리든 복제해 낼 수 있으니까.”
델라는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복제?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00마리를 만들었건 1000마리를 만들었던 모조리 불태우면 그만이다.
“타올라라.”
델라의 무성의한 손짓과 함께 또다시 불꽃이 넘실거리며 갑주 위를 덮었다.
재질이 금속이라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델라가 피워낸 불이 녹일 수 없는 금속 따위는 없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불을 뒤집어쓰는데도 백기사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한 손에 든 커다란 방패를 앞으로 내세운 채 잘 훈련된 병사처럼 벽이 되어 화염을 막아내고 있었다.
“뭐.....?”
“복제한 아이들은 모체보다 훨씬 약하지만 어쨌거나 모체가 된 호문쿨루스의 속성을 본뜨게 돼. 적기사는 붉은가지에서 끌어낸 ‘왜곡의 수호장’을 지니고 있다는 거 알지?”
파올라의 말대로 델라의 불길은 방패와 도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토카막에 갇힌 플라스마처럼 제자리에서 일렁이다가 마력을 소진하고 소멸할 뿐.
델라의 불길이 가시자 백기사들은 일사불란한 자세로 델라에게 창을 겨눈다.
“이렇게 되어 유감이야 델라. 난 널 친구라고 생각했어.”
파올라는 등을 돌렸고, 백기사는 일제히 델라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