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1.
“........”
“........”
샤론의 인생에서 가장 곤란한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지금을 고를 것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말똥말똥 샤론을 바라보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견습마녀.
그 두 쌍의 눈빛이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샤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제머나이 백작은 그나마 언니 쪽이 검은색, 동생 쪽이 하얀색이라는 퍼스널 컬러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 쌍둥이는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쏙 빼닮은 데다가 아름답기 그지없어서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오싹함까지 더해준다.
저렇게 바라볼 거면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쌍둥이는 데네브와 시우가 함께 나간 뒤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저렇게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기, 과일이라도 더 깎아 올까요?”
샤론은 어렵사리 말을 걸었다.
다시 한번 나란히 쏟아지는 눈빛.
울고 싶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네, 감사합니다.”
“저는 사과가 좋아요.”
한참의 시간 끝에 돌아오는 대답.
부엌으로 향하면서 쌍둥이 쪽을 힐끗 보자 여전히 샤론 쪽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부엌 안으로 들어선 샤론.
“도대체 뭐야....”
시우가 제머나이 백작가의 귀한 손님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백작가의 반지를 지니고 있을뿐더러 지나가듯이 견습마녀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보통 게헨나 내부의 마녀들은 견습마녀를 외부로 보내지 않는 편인데 이렇게 시우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만 봐도 쌍둥이와 시우의 관계가 꽤나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시?”
혹시 시우가 키스해봤다는 상대 중 저 쌍둥이도 끼어 있는 게 아닐까?
전 여친이 현 여(사)친에게 눈치를 주는 그런 상황?
그간 무수한 로맨스 영화로 단련된 샤론은 즉석에서 근사한 시나리오 하나를 뚝딱 작성해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설마 이대로 홀라당 시우를 빼앗겨야 하나?
샤론은 과일을 예쁘게 깎아 거실로 나섰다.
“그래서.... 근데... .... ...... 아..”
“아냐 언니.... ..... 아닐거야....”
인형처럼 반듯이 앉아있던 쌍둥이는 어느샌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샤론이 다가오자 착 하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 시치미를 뗀다.
대화 내용이 무척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과일을 놓는 샤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쌍둥이.
길고 가는 포크를 들어 사과를 하나씩 입에 넣던 쌍둥이 중 하나가 돌연 말을 걸어왔다.
“마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 저는 샤론 에버그린이라고 해요.”
사실 마녀 사회의 배분으로만 놓고 본다면 견습마녀에 불과한 쌍둥이에게 샤론이 꿀릴 것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배분보다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문제, 샤론은 580억의 빚쟁이고 쌍둥이는 채권자의 딸내미라는 입장 차이가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귀여워 보이는 아가씨들이 화가 나서 쪼르르 제머나이 백작에게 달려가 ‘저 나쁜 여자의 전 재산을 몰수해 주세요. 스승님!’이라고 할지.
자연스럽게 샤론은 쭈그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오딜.”
“저는 오데트예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그래도 드디어 대화가 시작되었다.
샤론은 감격했다.
그 어색하고 갑갑하고 영문을 모르겠는 침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까.
“그런데 저희 조수님이랑 어떤 관계세요?”
“여기서 같이 사시는 건가요?”
하지만 쌍둥이의 질문을 듣자마자 샤론은 아까의 침묵이 한결 좋은 상황이었음을 깨달았다.
질문의 내용을 보건데 이건 대화가 아니라 일종의 심문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네, 일단은 제가 갈 곳이 없어서 시우가....”
“시우?”
“시우요?”
“네, 그, 저... 시우 씨는 저에게 숙식을 제공해주고 저는 마법을 가르쳐드리는 그런 느낌으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생각 없이 평소대로 내뱉은 호칭에 즉각 태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샤론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쌍둥이와 시우는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 조수님의 여자친구인 건가요? 그러니까, 애인?”
“아, 아뇨.”
엄밀히 말하면 이것저것 해온 일은 있지만 정식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는 아니었기에 대답한 샤론.
“그거 봐 언니, 내 말이 맞잖아.”
“오데트, 지금 그게 중요해?”
“아까까지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 게 누군데?”
“아니? 나는 그런 관계일 경우 조수님한테 조금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던 것뿐이야. 즉, 오데트 너는 내 말을 비약하고 있어.”
“언니야말로 괜히 내기에서 진 것 같으니까 꼬투리 잡는 거 아니야? 매번 그러잖아.”
그리고 별안간 시작된 쌍둥이의 말싸움에 샤론은 벙쪘다.
틀림없이 ‘후후, 당신 우리 가문에 빚을 졌다죠? 그 빚이 두 배로 불어나기 싫으면 얌전히 달링 옆에서 떠나세요!’나, ‘이 여우 년이 빈틈을 타서 시우를 꼬셔?’ 같은 살벌한 대화를 예상했는데.
엉뚱하게도 갑자기 둘이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는 건데. 오데트 네 아이디어 사실 정말 별로였어! 조수님이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잖아!”
“그렇다고 언니가 말한 대로 커다란 선물상자에 들어가서 놀래켜 준다는 건 더 바보 같은 발상이지!”
“바보? 나보다 마법도 못 쓰는 푼수가!”
“언니야말로 결과에 승복 못 하는 모습 정말 어린이 같거든?”
“저기 지, 진정하세요.”
언제나 있는 귀여운 투닥거림이지만 그 치열한 설전을 처음 접하는 샤론으로서는 일단 만류하고 보았다.
쌍둥이는 샤론을 동시에 바라보며 물었다.
그 눈빛은 싸움의 중재가 아닌 승자와 패자를 가려줄 심판을 찾는 눈빛이었다.
“에버그린 님이 보기에는 누가 잘못한 것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가 이상하죠?”
“네, 네?”
샤론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는 사이 시우가 돌아왔다.
2.
설마 하던 데네브의 퇴장.
생각보다 신뢰를 받고 있었구먼 하는 감회를 남긴 채 시우는 집으로 들어섰다.
“어래?”
시끌시끌하게 거실에서 난장판을 피우고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무슨 절간에 들어오기라도한 양 조용하다.
시우는 거실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차분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쌍둥이와 어정쩡한 상태로 굳어있는 샤론이 보였다.
샤론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간절한 구조 신호를 보냈다.
저 눈빛은 아마 쌍둥이가 폭주할 때마다 질질 끌려다녀야 했던 시우가 지을 법한 표정이다.
알 만했다.
시끄럽게 싸우다가 스승님이 돌아온 듯 하자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겠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오데트가 쪼르르 달려왔다.
“조수님, 스승님은요?”
“일이 생기셨다고 잠시 어디론가 가신다네요.”
“와!”
“정말요?”
그와 동시에 쌍둥이는 얌전한 견습마녀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거의 공중제비를 돌 기세로 소파에서 통 튀어 오른 오딜과 제자리에서 입을 가리며 좋아하는 오데트.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격언을 이렇게 간접 체험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그럼 스승님 언제 오시는데?”
“저도 그것까지는 전해 듣지 못했는데요. 아마 내일까지...끄악!”
시우의 말이 갑자기 끊긴 것은 그대로 소파를 박찬 오딜이 혼신의 바디어택을 감행하며 시우에게 안겼기 때문이다.
“조수니이이임! 보고 싶었어! 완전 보고 싶었다구!’
“오...오딜님.”
그 과정에서 무릎에 명치를 얻어맞은 시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한편, 가만히 서 있던 오데트도 격렬한 환영식에 참가했다.
간신히 오딜을 들고 있는 시우의 팔을 밀거니 잡아당기거니 하며 말이다.
“언니! 또 치사하게 혼자만! 조수님! 저도 보고 싶었어요!”
“네...네, 일단 오딜 님... 내려와 주세요.”
“앗! 응, 미안. 아까는 스승님이 계셔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속상했어.”
“작은 스승님은 이런 거 엄청 민감하시거든요... 우리가 애도 아니고!”
“맞아맞아!”
오딜은 폴짝 시우의 품에서 뛰어내리기 무섭게 따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당연히 옆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오데트는 덤이다.
“조수님 그동안 잘 지냈어?”
“무슨 일은 없으셨죠?”
“우리 잊어버리고 있던 건 아니지?”
“조수님이 우리 버리고 애인 만들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 외에도 시우를 만나러 오기 위해 열심히 마법 공부를 했다느니, 이번엔 생일 선물 대신 졸라서 특별히 찾아온 거라느니, 현세로 몰래 외출하는 방법을 궁리했다느니.
아무튼 온갖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음.
오랜만에 느껴보는 쌍둥이의 하이텐션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5년 간의 노예 생활 중 가장 좋은 인연을 꼽으라면 말할 것도 없이 이 똥꼬발랄한 쌍둥이니 말이다.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나 반가워해 주는지 오딜과 오데트의 눈가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감동이야... 5년 동안 꼼짝없이 못 볼 줄 알았는데...”
“언니는 그래도 마지막에 조수님이랑 데이트도 했잖아! 나는... 나는 그런 것도 못 했단 말이야.”
“아직도 그걸로 꽁해 있었어?”
“언니는 말을 너무 쉽게 해!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자자, 진정들 하세요. 그렇게 사이좋으시면서 왜 틈만 나면 싸우십니까.”
“오데트가 매일 시비 걸잖아!”
“언니가 매일 시비 건단 말이에요!”
“어허, 그럼 못써요.”
게헨나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별안간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한 쌍둥이.
변함없는 둘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만류하는 시우.
평소였더라면 심판을 찾았을 쌍둥이도 시우의 웃음을 보고는 곧장 히죽히죽 웃었다.
저 웃음이 다시 보고 싶었기에 그를 찾아온 것이다.
“꿈만 같아... 현세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에 조수님이 함께라니.”
“아! 맞아요! 조수님! 현세는 진짜 진짜 정말정말 신기한 것 천지에요! 조수님 만나 뵈려고 현세에 관해서 공부를 조금하고 왔는데 그런데도 너무 놀라운게 많아요!”
“맞아! 자동차도 오늘 처음 타봤는데 대단하긴 해도 승차감은 우리 마차가 더 낫더라고.”
“저는 엘리베이터가 제일 신기했어요! 저 이따 다시 타봐도 돼요? 요금은 어디에 내야 하나요?”
빈틈없이 채워지는 재잘거리는 사운드.
하긴 일평생을 게헨나에서 보내온 오딜과 오데트라면 현세의 모습이 신기할 것이다.
게헨나에 처음 잡혀간 시우가 마법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 말이다.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연신 자기들 할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익숙함이 느껴진다.
“신나 보이셔서 저도 기쁘네요.”
“조수님도 우리 보고 싶었지?”
“아이 참, 언니는...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오데트 님 말씀이 맞아요. 항상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어요.”
오딜과 오데트는 각자 시우의 한쪽 팔을 껴안은 채 폭 안겼다.
잠깐 딴짓을 하면 시우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랑말랑한 뺨을 가슴에 비비는가 하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이렇듯 쌍둥이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은 대체로 신체접촉이었다.
한동안 시우를 붙잡고 늘어지던 쌍둥이는 동시에 크게 하품을 했다.
시계를 보니 무려 새벽 4시다.
견습마녀의 반영체는 완벽한 영체와 달리 수면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통통 튀어다닐 것처럼 들떴던 쌍둥이가 피곤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우 역시 계속 수다를 떨며 놀고 싶지만 데네브가 믿고 케어를 맡긴 만큼 성실하게 임할 생각이었다.
일단 시우의 윤택한 삶을 유지해주는 전주이기도 하고 말이다.
“우선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주무실까요?”
“벌써?”
“졸리신 것 같은데요 눈도 빨갛고.”
“이건 조수님 만나서 좋아서 빨갛게 변한 거예요. 하품은 언니가 해서 따라 했어요.”
“아니? 나는 오데트가 해서 따라 했어. 난 하나도 안 졸려!”
역시나 고집을 부리는 쌍둥이지만 시우는 둘을 다루는 방법을 꽤 알고 있었다.
사실 방법을 알고 있다기보다는 쌍둥이가 시우의 말을 지나치게 잘 들을 뿐이지만서도...
“두 분이 가면 좋아하실 디저트 가게를 알아뒀어요. 내일 늦게 일어나면 그만큼 조금밖에 못가잖아요. 먼저 푹 주무시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같이 움직이는 건 어떨까요?”
“좋아! 대신 자는 건 한 침대에서 어때?”
“그건 곤란한데요. 데네브 님이 허튼 짓하면 큰일 날거라고 말씀하셔서. 전 소파에서 자려고요.”
물론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말을 해두는 편이 쌍둥이를 납득 시키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보고싶던 조수님과 만난지 30분도 안되어 수면을 종용받은 쌍둥이도 곱게 넘어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조수님, 이상한 짓 하자는 게 아니에요.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 뿐이잖아요?”
“맞아, 우리는 그냥 옆에서 손만 잡고 있을거라구.”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오늘만큼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아닌말로 정말 잘 하고 있는지 데네브님이 확인하러 오시면 어쩌시려고요.”
시우가 이 정도로 사양하자 쌍둥이는 울상이 되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된 까닭이었다.
그렇게 쌍둥이는 시우 방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시우는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