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1.
샤론에게는 무척 다행스럽게도, 데네브는 빚을 독촉하거나 채무자가 거액의 현상금을 거머쥐었다는 소리를 듣고 추징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기실 10년 전 샤론에게 빌려주었던 580억 정도는 제머나이 가문의 막대한 재산 앞에서는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제머나이가 샤론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목적도 빚 장사를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간 에버그린이 쌓아온 마법 연구자료를 담보로 잡고 열람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따라서 덜덜 떠는 샤론의 기우와는 다르게 데네브는 가볍게 눈인사만을 건네고는 거실로 들어섰다.
시우는 이것저것 물건들로 너부러져 있는 거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데네브를 안내했다.
샤론은 눈치를 보다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씻었다.
그런 샤론을 힐끗, 시우를 힐끗 번갈아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백을 건네는 데네브.
“집들이 선물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종이백의 모양도 무게도 받아들었을 때 느껴지는 출렁임도 술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시우는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보통 집들이란 환한 웃음이나 시끌벅적한 축하로 이루어지는 법인데 데네브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우의 사정을 이것저것 고려해 주었던 알비레오와는 달리 까탈스러웠던 데네브 쪽이 조금 더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크흠, 제머나이 백작님의 호의 덕에 편안히 살고 있습니다.”
불편하게 이어진 침묵을 깰 겸 괜스레 헛기침하며 운을 띄우는 시우.
방 구석구석을 시선으로 더듬던 데네브도 그에 호응했다.
“손님으로 받아주겠다고 한 것도 마다하고 구태여 현세로 나가신다길래 마음이 불편했는데. 잘 지내고 있어 보여서 다행이네요.”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네브는 예의를 차렸다.
뭔가 진땀 난다.
시우가 게헨나에서 반쯤 쫓겨난 결정적인 이유는 쌍둥이와 선을 넘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1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마녀와 동거한다라...
데네브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은근히 신경 쓰이는 것이다.
“생활에 어려운 점은 없나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풍족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데네브는 구태여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전에도 일선을 긋긴 했지만 꽤 정중하게 시우를 대했었지.
이런 상황에서 ‘그건 언니 쪽이 반쯤 내쫓으신 건데요...’ 라고 덧붙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드, 드시면서 이야기하세요.”
“감사해요.”
그때 부엌에서 한참 과일을 깎던 샤론이 배와 사과를 가득 깎아 어딘가 뻣뻣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세한 뒷사정을 모르는 샤론으로선 언제 그녀를 잡아먹을지 모르는 맹수와 같은 자리에 앉는 기분이었다.
“귀한 걸음 해주신 것은 감사한데...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샤론은 시우의 질문을 듣고 조용히 숨을 집어삼킨다.
데네브는 사과 하나를 와작와작 먹더니 한숨을 쉬며 답했다.
“후우.... 그건 직접 보면서 이야기하는 편이 빠를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앞뒤를 알 수 없는 데네브의 말에 시우가 어리둥절해 하는 한편.
데네브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폭이 넓어 정숙한 귀부인 느낌을 내주는 드레스를 활짝 올렸다.
갑작스러운 팬티 공개에 눈을 가리지도 못한 시우.
하지만 고명하신 제머나이 데네브 백작의 아랫속옷이 어떤 색인지 알게 될 일은 없었다.
데네브가 돌연 치맛자락을 걷자 마치 마술쇼처럼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
“..........”
아기새처럼 데네브의 치마폭에 감싸여있던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오딜과 오데트.
트레이드 마크 같던 하프 보닛 대신에 머리를 여러 가닥으로 땋아서 공주님처럼 번 헤드로 올렸다.
어른스러운 새까만 드레스는 인형 같은 이목구비와 조화되어 변함없는 귀여움을 자랑했다.
시우는 깜짝 놀랐다.
쌍둥이가 뿅하고 튀어나온 장소도 놀랍지만 설마하니 딸바보인 백작이 쌍둥이를 현세까지 데려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이다.
“제 명예를 위해 말하건대 이 서프라이즈는 구상부터 기획까지 요 말썽꾸러기들이 한 거예요.”
“그건 말씀 안하셔도 알 것 같네요...”
공간굴절이라도 잠깐 걸어두었는지 쌍둥이가 빠져 나오자마자 치맛자락을 머쓱하게 정돈하는 데네브.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보니 아까까지 딱딱했던 얼굴은 이 이벤트에 마지못해 어울리고 있었기 때문인가 보다.
“.........”
“.........”
하지만 당장이라도 시우를 향해 달려들 줄 알았던 오딜과 오데트는 렉이 걸린 것처럼 우뚝 멈춰서 있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양 보석 같은 자색 눈을 땡그랗게 뜬 채로 샤론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오데트 쪽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
“애들아?”
데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수님을 만나겠다고 들떠서 밤새 복도를 돌아다니며 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꽃단장하겠다고 설레발을 치던 쌍둥이.
그런데 혀가 닳도록 보고싶다고 말하던 조수님을 만났는데도 아무 인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백히 예의에서 어긋나는 행동인 바 데네브는 쌍둥이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조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두어 번 재촉을 받은 쌍둥이는 정중하게, 예절 담당선생이 보아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고상한 인사를 올렸다.
누군가 가르쳐준다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태생부터 타고난 고귀함을 연마한 ‘귀족’이야 말로 보일 수 있는 기품이었다.
“어, 네.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렇네요.”
“네.”
아마 데네브의 앞이라 자중을 하는 모양이지.
시우는 반가우면서도 지나칠 정도의 거리감에 살짝 당황했다.
셋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기다린 데네브가 입을 열었다.
“쌍둥이가 어찌나 조수님 보고 싶다고 야단법석을 치는지 공무를 겸해 데려왔어요. 대략 나흘 정도 이곳에서 머무르려고 해요.”
“네?”
“원래는 따로 방을 잡으려고 했는데.... 뭐, 저도 이곳에 있을 거니 큰 문제는 없겠죠. 머물게 해주는 대가는 충분히 지급할 생각이에요.”
“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가요?”
“괜찮다뇨?”
시우는 자신이 놀랐던 이유를 데네브에게 설명했다.
“아무래도 현세는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추방자나 호문쿨루스나 이것저것 있으니...”
그렇다.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쌍둥이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고작 쌍둥이의 고집에 맞춰 현세의 외출이라는 위험을 부담한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에서 쭉 살아가는 거라면 몰라도 현세라고 완벽한 무법지대는 아니잖아요. 시우 씨의 경우 여러가지 특수한 사례가 종합된 경우니 각별히 위험할 수 있지만 현세에서 견습마녀를 기르는 추방자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쉽게 말해 견습마녀를 동반한 현세행은 밤늦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위험한 해외여행 정도의 위험이지 제 3세계 분쟁지역에 투어를 가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데네브가 덧붙인 설명이었다.
“날이 밝으면 쌍둥이들에게 현지 관광이라도 시켜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저는 일이 바빠 동행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견습마녀 때 이런저런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깐 나와주시겠어요? 오딜, 오데트.”
““네 스승님.””
“너희는 얌전히 장난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렴.”
““네.””
시우가 봐 왔던 모습 중 가장 차분하게 대답하는 쌍둥이를 뒤로하고 데네브와 시우는 잠시 옥상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모진 비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데네브가 손짓 한 번 하자 얇은 막이 생기며 바람과 빗방울을 모두 막아주었다.
“담배 피우시죠?”
“네, 그렇습니다.”
“한 대 피우면서 이야기할까요?”
데네브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고 시우 역시 고개를 돌리고 불을 붙였다.
후우 내뱉은 연기가 너훌너훌 날아가며 세차게 흩어진다.
아름다운 데네브는 한숨을 깊게 쉬는 것으로 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어떤가요? 현세 살림은.”
“트러블이 없던 건 아닌데, 여러가지 배려해주신 덕분에 살만한 것 같습니다. 그때 주신 반지도 참 많이 도움이 됐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솔직히 전 당신이 게헨나에 남아주었으면 했어요. 행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잠자리가 뒤숭숭했을 테니까요.”
기억 속 데네브의 마지막 모습이 오딜과 키스했다는 사실을 들켜(데네브는 그렇게 알고 있다) 성을 내던 장면이었던만큼 시우의 예상보다 호의적인 말투였다.
“아닙니다. 제가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린 건데요.”
“... 사실 알비레오에게 뒤늦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반쯤 강제로 떠나게 되었다고.”
“아, 그건....”
“미안해요.”
아마 시우가 쫓겨나게 된 원인까지는 듣지 못했던 모양인지 데네브는 차분해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함께 계신 분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우는 조금 머뭇거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정확히 판별할 수 없었기에 생긴 딜레이다.
“허락도 없이 집안에 끌어들인 건 죄송합니다.”
“시우 군, 책망하려는 게 아니에요.”
“...친구입니다. 어쩌다보니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함께 지내게 됐네요.”
시우의 답변에 데네브는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식으로 교제하거나 연인 관계라거나 그런 건 아니라는 건가요?”
“네.”
아직은요... 라는 말을 덧붙일까 말까 하다가 관두었다.
데네브는 한층 더 시름에 잠긴 표정이었다.
사실 데네브는 생각이 많아졌다.
특별히 남성과 깊은 관계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살아온 세월이 있다.
쌍둥이가 시우를 마주했을 때 장면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느끼는 바가 있었다.
쌍둥이가 시우에게 호감을 품은 건 구태여 증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했다.
데네브가 생각하기에 시우 역시 훗날 오딜 혹은 오데트와 깊은 관계가 되어도 기꺼이 허락할 수 있는 좋은 남자이다.
심지어 영체가 된 이상 남자 쪽 수명을 걱정할 것도 없이 일평생의 배우자로 지낼 수도 있다.
그런데 백작가에서 시우를 믿지 못하고 섣부르게 손을 쓴 결과....
‘그를 내쫓음’, ‘쌍둥이에게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뺏어감’ ‘그 기회가 다른 마녀에게 넘어갔을 수 있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고 쌍둥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물론 견습마녀의 안위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는만큼 몰지각한 교제를 허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건 불발탄을 가지고 노는 쌍둥이를 방치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 이외.
가령 쌍둥이가 시우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인상을 남겨준다던가.
함께 좋은 추억을 쌓아 당분간 떨어져 있더래도 시우가 쌍둥이를 기억하게끔 조성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계획이다.
“저는 일이 바빠서 쌍둥이 옆에 오래 있지 못할 거예요. 시우 군이 잘 보살펴주세요.”
“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괜히 제가 끼어있으면 서로 불편할 테니까요.”
“아닙니다. 오딜님도 오데트 님도 데네브 백작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울 거예요.”
데네브는 그의 답이 만족스러웠다.
만약 그가 흑심으로 가득한 남자였더라면 구태여 쌍둥이와 단둘이 남을 기회를 걷어차지 않았을 것이다.
데네브는 그날 오딜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충격에 판단이 흐려졌음을 인정했다.
타인을 위해 목숨을 두 번이나 걸었던 남자가 생각 없이 쌍둥이에게 손을 뻗어 그릇을 망칠 만큼 한심한 인간일 리 없지.
“쌍둥이들에게 선물을 보내두었으니 잘 쓰도록 하세요. 저는 근처 호텔에서 묵을 테니 연락할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전화해 주시고요. 아, 쌍둥이에게는 급한 일이 생겨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주시겠나요?”
“네, 알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시우에게 명함을 건네준 데네브는 먼저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