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1.
견습마녀로서 티페레트 공작에게 그릇을 물려받은, 그리고 낙인을 물려받을 예정이던 라피.
라피는 사랑받기 마땅한 아이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라피를 사랑했다.
새와 가축, 들짐승들마저 그녀의 옆에 모여들기를 기꺼워했고 함께 들판을 걸을 때면 들개나 새 따위가 몰려들어 애교를 부릴 지경이었다.
그렇듯 라피는 언제나 밝고, 명랑했으며 모두에게 행복한 미소를 안겨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애교 넘치는 성격으로 무뚝뚝한 엘로아의 입가에도 기습적으로 미소를 새겨넣기 일쑤이던 라피가.
어느 날 말했다.
“스승님! 저 현세에 가고 싶어요!”
견습마녀답게 호기심이 많고 행동력도 뛰어난 라피를 생각하면 언젠가는 해오리라 예상했던 부탁이었다.
그런 질문에 엘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응당 위대하신 티페레트 공작의 이름을 계승 받을 견습 마녀라면 견문을 넓히기 위해 더욱더 넓은 세상을 알아야 한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여간, 말 만큼은 청산유수로구나.”
씩씩하게 대답하는 라피와 그 모습에 활짝 웃는 엘로아.
두 사람의 나이차이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즐거운 자매의 잡담으로 보일 것이다.
“현세는 위험하단다. 특히나 라피같은 견습마녀를 노리는 흉악한 녀석들이 잔뜩 있어.”
“그 정도라면 자신 있어요! 저는 스승님이 주신 마법을 능숙히 다룰 수 있잖아요!”
호언장담하는대로 라피는 뛰어난 견습마녀였다.
엘로아로부터 고작 한 획에 불과한 그릇을 받았지만 어지간한 마녀와 견주어도 능히 몸을 뺄 수 있는 전투력을 지니게 되었다.
어떤 병기를 다루던 최적의 수를 깨닫고 시행할 수 있는 ‘만병지왕(萬兵之王)의 계약’.
그녀의 천부적인 전투 센스는 그릇에 담긴 계약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장담하건대 순수한 무(武)의 경지를 놓고 논하자면 라피와 견줄 마녀는 몇 없으리라.
물론 마녀들의 전투에 마법이 빠질리는 없으니 무의미한 논쟁이었지만 말이다.
“스승니이임... 네? 제발요!”
엘로아가 고민에 잠긴 듯하자 타이밍을 잡고 애교 공세를 퍼붓는 라피.
팔짝팔짝 뛰며 다가와 뺨에 뽀뽀하는가 하면 맞잡은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앙탈을 부린다.
그만둬.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엘로아의 비탄에 잠긴 읊조림은 끝내 목소리가 되지 못한다.
보글거리는 잡음이 되어 물거품이 되어 맥없이 흩어질 뿐.
멈춰야 한다.
허락해서는 안 된다.
엘로아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애원하고, 간원해도 각본이 정해진 영화처럼 꿈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꿈은 이미 결말이 정해진 과거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흐음, 마침 현세에 볼일이 있으니 동행하겠느냐?”
“정말요? 네? 정말이죠?”
“물론이지. 내가 언제 네게 허튼소리 한 적 있더냐?”
이렇듯 엘로아는 비극이 예정된 선택지를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라피의 기뻐하는 모습에 엘로아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세가 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라피라면 능히 시간을 벌고 대처할 수 있다.
자신이 옆에 있다면 그 어떤 공적도 그녀를 노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에 내렸던 결정이었다.
“대신.”
“네! 새겨듣겠습니다, 스승님!”
“가기 전까지 들떠서 마법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 것. 약속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평소에 하던 거 두 배씩 할게요!”
“잠도 자지 않고 하겠다는 말이구나.”
“에헤헤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기쁨에 펄쩍펄쩍 뛰던 라피의 모습이 일그러진다.
찢어지고 훼손된 필름이 영상기를 거쳐 재생되는 것처럼.
활짝 웃던 라피의 모습도, 그런 라피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엘로아의 모습도 일그러졌다.
뭉개지고 흩어진 행복한 과거는 코끝을 찌르는 쇳내가 되어 시야마저 붉게 저미는 듯 했다.
엘로아는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 아래는 라피가 있다.
조금 가벼워진.
많이 차가워진.
더는 움직이지 않는.
라피가 있다.
피범벅이 된 채 자궁을 적출당한 라피의 몸을 덧없이 끌어안은,
순간의 방심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어리석고, 오만하고, 방자하고, 교만한 엘로아가 있다.
어리석은 티페레트 엘로아.
네가 소중하게 여긴 것이라 하여 영원할 줄만 알았더냐?
네 오만함과 방심이 이런 비극을 불러오리라, 정녕 예상하지 못했더냐?
낄낄 비웃는 듯한 자신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울린다.
차디찬 비가 피부를 때리고 흘러내린 핏줄기는 시멘트 위로 붉은 연못을 피웠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절규가 폐공장 안을 울렸다.
물병자리의 마녀, 에아 사달멜리크.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라.
난 널 죽일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고통과 절망 속에 처박아주마.
네 시끄러운 비명이 질릴 때 그 간악한 몸뚱어리를 불태우리라.
네 사지가 불타오르며 고통에 몸부림치고 목숨을 구걸하면 나는 그 위에 기름을 끼얹으며 비로소 웃으리라.
날 기억해라.
나도 널 잊지 않을 테니.
귀를 온통 먹먹하게 만드는 절규와 포효와 함께 티페레트 공작은 눈에 떴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온몸을 흠뻑 적신 식은땀과 가빠진 호흡.
울컥 치밀어 오른 구역질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엘로아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술병을 쥐었다.
미지근한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체한 듯 목구멍에 걸려있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하아....하아....”
엘로아의 마법은 대체로 신체에 막대한 부담을 넘긴다.
산을 베고, 바다를 벨 정도의 힘을 그 작은 몸에 응축하다 보면 제아무리 영체라도 휴식과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엘로아의 몸은 영체이면서도 항상 4시간 정도의 수면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건 저주와 같았다.
잠이 깊어질 때면 언제나 지긋지긋한 악몽이 소나기로도 씻어내릴 수 없는 피 냄새와 함께 찾아온다.
자신의 과오를 마주하고 확인하는 것을 100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행해온 것이다.
“........”
엘로아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어둑한 방 안의 한쪽 창은 온통 야경으로 가득하다.
돈이 넉넉하지 않은 엘로아에게 수아 선생이 기꺼이 제공한 호텔 객실이었다.
잠깐 정도는 시선이 사로잡힐 법한 화려한 풍경이건만.
엘로아는 곁눈으로조차 눈길을 주지 않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몸에 끈끈하게 달라붙은 얇은 잠옷을 벗어 던지다 문득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
겁에 질린 듯 핏발이 선 눈, 그 가운데 방황하는 자홍색의 눈동자.
복잡한 머리만큼 헝클어진 복숭앗빛 머리카락.
“하...”
너무나도 공허해 보이는 모습에 어찌 된 영문인지 웃음이 나온다.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를, 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공허한 웃음이 욕실 내부에 건조히 울린다.
만약 에아 사달멜리크를 이 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었더라면.
밤마다 찾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저주도 끝이 났을까.
이제는 답을 찾을 수 없게 된 헛된 의문이 마찬가지로 헛되게 머릿속을 떠돌다 사라졌다.
엘로아는 찬물로 끈적거리는 땀을 씻어냈다.
차디찬 빗줄기처럼 몸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속에서 문득 생각한다.
이 세상, 복수의 허망함을 설파하려는 문학 서적은 넘쳐난다.
복수를 끝냈을 때의 허망함과 좌절을 메시지랍시고 보내려는 작품을 볼 때마다 엘로아는 코웃음 쳤다.
누가 이런 당연한 것을 모르겠는가.
어떤 멍청이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봐도 누구든지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복수의 대상이 죽어버렸으니 허무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멈춰서야 할 때이다.
과거의 망집에 목이 매여있을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세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겠지 않느냐고.
자기 자신이 속삭인다.
엘로아는 매몰차게 고개를 털었다.
허나 복수는 이성적으로 재단할 수 있는 감정 따위가 아니다.
복수는 불과 같다.
원수뿐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 불사른 끝에 이뤄지는 파멸을 향한 질주이다.
그렇다면 함께 불탈 대상이 사라져 버린.
불완전 연소한 채로 홀로 남아버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공연히 찾아오는 섬뜩함에 엘로아는 천천히 주저앉아 강박적으로 중얼거린다.
“살아 있을게야...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지. 분명 내가 파악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아티펙트 따위를 사용해 그 자리를 벗어났음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 주었으면 한다.
텅 비어버린 공허함에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함께 불타오르기를 원했다.
간절히 원했다.
2.
“스승님! 부탁이 있어요!”
“스승님! 저희 부탁이 있어요!”
공무를 살피던 알비레오는 갑자기 들려온 소란에 눈을 끔뻑였다.
조수님을 만날 거라는 둥 반드시 이른 시일 내에 낙인을 계승 받겠다는 둥.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인 마법 공부에 빠졌던 오딜과 오데트가 벌컥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커다란 다짐을 하고 온 듯 부리부리하게 눈을 뜬 상태였다.
“예의 없게 그게 뭐니. 다시 나갔다 들어오렴. 노크도 하고.”
하지만 기세좋게 들어왔던 쌍둥이는 알비레오의 지적이 들려오자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똑똑
““스승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러렴.”
노크 이후에 허락을 받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까의 반복이었다.
““스승님! 부탁이 있어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굴면서도 제 할 말을 하려 드는 쌍둥이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을 숨긴 알비레오.
깃펜 끝으로 이마를 긁적이고는 잠시 펜을 잉크 통에 돌려놓았다.
“그래, 우리 천방지축 쌍둥이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으셔서 이렇게 오셨을까? 문까지 뻥뻥 차면서.”
“문을 차지는 않았어요 스승님...”
“맞아요! 조금 힘줘서 열었던 것 뿐이라구요.”
오딜과 오데트는 모처럼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자신들이 예의 없이 굴지 않았음을 어필했다.
“그래그래,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고. 그래서 부탁이란 게 뭐니?”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모처럼 힐링이 됐으니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묻는 알비레오.
하지만 쌍둥이는 처음의 기세와는 다르게 쭈뼛대기나 할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나란히 서 있던 오데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오딜.
아마 가위바위보를 이긴 것은 오딜 쪽인 모양이다.
“스, 스승님...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나요?”
“물론 알지, 우리 귀염둥이들 생일이잖니? 키퓌시 빵집에 의뢰해서 근사한 케이크도 준비해 뒀단다.”
평소라면 키퓌시에서 만든 특제 케이크 소리만 들어도 신나서 비명을 질러댈 쌍둥이지만 어째 반응이 차분했다.
알비레오는 낌새를 느꼈다.
쌍둥이가 무엇을 부탁하기 위해 야밤에 찾아왔는지에 관해 말이다.
“네! 맞아요! 그, 그런데... 생일 선물날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요....”
“그러니? 들어나 보자꾸나.”
“저기.. 그게....”
오데트가 지나치게 머뭇거리자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오딜이 당차게 나섰다.
“스승님! 저희 이번 생일 선물로 현세에 유희를 가고 싶어요!”
쌍둥이가 준비해 온 부탁은 알비레오의 예상대로였다.
아마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도 더 엄격한 데네브가 아닌 상대적으로 널널한 알비레오와 단독으로 협상하기 위한 안배였을 것이다.
데네브는 자정이 넘기면 마법 연구를 하기 위해 연구실에 틀어박히니 말이다.
협상하기에 앞서 부탁에 약한 쪽을 공략한다라... 제법 머리를 굴린 흔적이 엿보였다.
알비레오는 태연히 팔짱을 끼며 물었다.
“현세에 가고 싶은거니? 아니면 신시우 조수가 만나고 싶은거니.”
“....조수님이요.”
“물어놓고 미안하긴 한데. 어느 쪽이건 안 돼.”
당연하게도 단호한 대답이었다.
현세는 위험하다.
정작 마녀들도 심심하면 공적과 호문쿨루스에게 습격당해 픽픽 죽어 나가는 마당에 견습마녀에 불과한 쌍둥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 티페레트 공작조차 잠깐의 방심으로 자신의 견습마녀를 잃지 않았던가?
“제발요... 스승님... 저희 절대로 이상한 행동 안 할게요! 스승님이 옆에서 감시하셔도 괜찮아요!”
“맞아요! 조수님을 5년 동안이나 못 본다는 건 너무 가혹해요... 겨우 141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이렇게 힘들단 말이에요.”
“친구라구요! 친구!”
당연히 쌍둥이들도 쉽게 허락이 떨어지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알비레오의 단호한 말에도 거듭 부탁을 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사전 준비를 해왔는지 알비레오를 설득하기 위한 말말말이 쏟아졌다.
이대로 잡념을 남겨두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얼굴을 보고 해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히려 조수님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으로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
현세는 언제나 궁금해 해왔으며 새로운 지식은 학구열을 불태울 것이다.
생일 당일이 아니라 스승님이 한국에 들를 일이 생기면 그때 동행하도록 하겠다.
조수님이 현세에서 혼자 얼마나 외로우시겠냐.
등등.
거의 50여 가지의 ‘우리가 조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성토했다.
“부탁이에요 스승님... 저희 정말 말 잘 들었잖아요 최근에.”
“맞아요! 이번 부탁만 들어주시면 지금보다 두 배 세배로 열심히 할게요!”
“흐음....”
알비레오는 갸름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돌아가 보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테니까.”
“정말요?”
“그래,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데네브와도 상의해봐야 할 것 같고.”
부탁하면서도 설마 재고라도 해줄지 몰랐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는 오데트와 오딜.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 자렴. 생일이 끝나기 전에는 결과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정말 감사해요!”
오딜과 오데트는 만족한만한 성과에 화색이 되었다.
면접이 끝난 입사지원자처럼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흐음.....”
사실 쌍둥이에게 현세행을 잠깐 허락하는 것은 그녀 역시 고민했던 문제이긴 했다.
티를 내지는 않지만 쌍둥이가 급격하게 우울해진 것도 보이고, 무엇보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은인인 시우를 반쯤 강제로 외로운 세상 속에 떠민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너무 위험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뿐.
“뭐, 옆에서 지켜보면 괜찮으려나?”
쌍둥이 성격이라면 말도 없이 가출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럴바에는 관리하에 조금 쉬는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알비레오의 고민은 깊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