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1.
시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델라를 이겼다.
샤론이 일의 윤곽을 잡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파스타가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식사를 끝내고 난 이후였다.
그쯤 되자 아무리 시우라도 샤론이 왜 갑자기 이상해졌는지 알아차렸다.
“너 하나도 안 믿고 있었구나?”
“어? 아? 무슨 말이야? 못 들었어.”
“내가 델라 이겼다는 거 못 믿고 있었어.”
어째 별다른 설명이 없었는데도 순순히 넘어가는구나 싶더니.
시우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던 것이 아니라, 아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델라와 시우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고 애초에 시우가 델라를 쓰러뜨린 것조차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이루어진 천운이니.
“아냐아냐, 나 진짜 믿었어.”
샤론은 시우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면서 두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내 이번에도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듯이 추궁도 않았는데 조심스레 고백한다.
“사...사실 못 믿고 있었어...미안.”
“미안할 것까지야.”
시우는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믿기 어려웠을 것 같다.
도리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모른 척해준 이유를 생각한다면 샤론이 미안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근데 왜 그렇게 말 안 했어?”
“어? 뭐가?”
“막 쓰러뜨렸다고 자랑할 법도 한 것 같은데...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 같아서 나도 착각했지...”
“나 이렇게 대단하다고 뻐기는 것 같아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 뭐.... 또 너가 자세한 거 안 물어보길래 그런갑다 했지. 아 맞아, 이거 있어.”
시우는 지갑을 뒤적이더니 명함 하나를 꺼냈다.
그곳에는 시우의 정체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겠다, 시우에게 해코지하지 않겠다는 짦막한 조항이 있다.
심지어 레드클리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내용까지 함께 적혀 있었다.
그제야 샤론은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완벽하게 믿을 수 있었다.
“참고로 너 괴롭히는 것도 관두라고 했어. 아마 시달리는 것 같아서.”
샤론이 투덜거리며 델라의 뒷담화를 하던 내용은 몇 번이고 들어봤기에 추가한 약속이었다.
샤론은 눈을 끔뻑끔뻑 깜빡이더니 시우에게 갑자기 찰싹 달라붙었다.
“뭐, 뭐야. 갑자기.”
“.........”
“샤론?”
“........”
입술을 삐쭉 내밀고 시선을 피하는 샤론은 한사코 시우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대답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간 혼자 지레짐작하고 뻘짓을 하던 것이 창피하기도 했고, 그런 대단한 일을 태연하게 해치운 시우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와닿는 것은 더는 혼자 마음고생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갑자기 델라가 찾아와 돈을 뜯어 갈 염려도 없고, 신촌에서 쫓겨나 어디로 가야 할지 전전긍긍해야 할 필요도 없다.
혼자 끙끙 속앓이하던 일이 녹아 없어지자 바보처럼 눈물이 왈칵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거...거마어....”
샤론은 와락 시우를 안고는 한참이나 끅끅거리며 울었다.
이번에는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사이로 어쩐지 요즘 참 많이 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오늘의 용건은 위치포인트에서 결정을 교환하고 파스타를 먹는 것이었던 만큼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어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 허튼짓했네.”
“어째 갑자기 이상하게 굴 때가 많더라.”
“아니 나는 너가 나 배려해서 선의의 거짓말 한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샤론은 혼자서 착각한 끝에 야단법석을 떨던 이유야 시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아무튼 시우가 허황한 말로 샤론의 부채 의식을 덜어주려 한다고 착각했겠지.
그녀가 착각하게 둘 바에는 차라리 제 얼굴에 금칠을 좀 하면서라도 자랑을 했어야 했나?
시우가 생각하는 것은 딱 기껏해야 정도까지였다.
“아무튼, 너가 못 미덥거나 그랬던 건 절대로 아니고... 내 맘 알지?”
그러니까 샤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못 미더웠으면 그렇게 생각했지?’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좀 섭섭하네.”
“섭섭해? 많이? 진짜?”
따라서 시우가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는 것은 순전히 샤론의 반응이 재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제머나이 쌍둥이 급 혜자 리액션.
자신의 삽질이 부끄러운 듯, 혹은 시우가 나쁘게 생각할까 걱정되는 듯, 이따금 얼굴이 벌겋게 변하는 샤론을 보고 있자면 장난기가 샘솟았다.
“화난 건 아니지?”
“미래의 대마녀 샤론 님에게 배웠는데 델라 정도는 이길 수 있는 거 아닌가? 어떻게 이걸 못 믿냐. 하아....”
“아니, 믿었어! 믿었긴 믿었는데 그니까.. 어....”
“조금 전까지 선의의 거짓말인 줄 알았다느니 하지 않았어?”
“아냐! 그건 그냥 음... 해본 말. 어, 그냥 해본 말이야. 실제로는 믿고 있었는데.... 물론 완전히 다 믿지는 못하지만....
왜냐하면 엄청 대단한 일이잖아! 마법을 배운지 10년도 안 된 남자가 대마녀를 이기다니! 와! 대단해! 시우 대단해!”
조금 장난을 치자 횡설수설하더니 갑자기 시우를 떠받들어주기 시작하는 샤론.
‘나는 사실 너를 믿고 있었다’라는 변명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칭찬으로 기분 좋게 해 주기’로 노선을 변경한 모양이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이 더 재밌다.
“됐어, 난 너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었는데... 넌 아니었구나.”
“어...어....”
시우는 마지막으로 섭섭하다는 대사를 한껏 쳐주고 나서 웃음 참기에 실패했다.
더는 샤론의 반응을 보며 무표정을 유지할 수 없던 것이다.
당황하던 샤론도 시우의 웃는 얼굴을 보더니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사태 파악을 한 듯이 곧은 눈썹이 순식간에 위로 날카롭게 치솟는다.
“야! 신시우! 감히 날 속여?”
“너도 나 속이려고 했으니 쌤쌤이지.”
“난 진짜 너 화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속은 것이 분한 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항의하는 샤론.
그 모습도 어찌나 재밌는지 시우는 소파 위를 구르며 웃었다.
분한 듯 씩씩거리던 샤론이 갑자기 휴대폰을 확인한다.
“으씨! 너 여기서 딱 기다려!”
“그래그래, 내 집인데 어디 가겠냐?”
쿵쿵거리며 현관으로 나간 샤론은 박스 하나를 들고 자기 방으로 호다닥 들어갔다.
또 뭘 하려고 저러는 건지 궁금해 슬쩍 몸을 일으킨 시우.
“뭐해?”
“기다려! 들어오지 마!”
문 너머로 두고 보란 듯 샤론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3분도 지나지 않아 방문이 덜컥 열렸다.
재등장한 샤론은 얇은 여름 이불을 드라큘라 망토처럼 두르고 있었다.
비장하게 지은 표정과 어딘가 얼빵한 모습이 대조되어 웃음이 나온다.
“너 뭐하냐?”
“나만 놀림당한 것 같아서 너한테 한 방 먹여주려고.”
샤론은 각오를 다진 듯 훌렁 이불을 풀었다.
이불 아래 꽁꽁 싸매여 있던 샤론의 몰골을 확인한 시우가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다.
“엑....”
“어, 어때?”
어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샤론은 방에 들어가 자신만의 비밀병기를 착용하고 온 것이다.
그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검은 고양이.
그것도 아주 요망한 검은 고양이었다.
“아....어....”
시우는 말도 잊고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아마도 이벤트용 속옷으로 보였다.
아동용 속옷처럼 보일 정도로 유치한 디자인이 뇌쇄적인 샤론의 몸매와 뒤섞이며 파괴력을 과시했다.
가슴의 정 가운데에는 고양이 얼굴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어 샤론의 훌륭한 가슴골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색기 넘치는 검은 팬티은 천 면적이 아주아주 적은 끈팬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도톰한 보짓살이 삐쭉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샤론의 손에 끼워진 커다란 고양이 손 장갑과 고양이 귀 머리띠, 그리고 가느다란 목을 감싼 방울 장식의 초커.
화려한 샤론의 머리카락 색과 대비되는 검은 천의 조화는 그 자체만으로 관능을 풀풀 풍겼다.
사랑스러운 차림으로 변신한 샤론은 얼빠진 시우의 반응을 보고 통쾌한 복수에 성공한 것처럼 히죽 웃었다.
“야,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응! 그러려고 시킨 거 맞거든.”
오히려 벗은 것보다 충격적이다.
하얀 피부 탓에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검은 옷감이 무척이나 선정적이어서 그 아래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속살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고 할까.
“하아... 너한테 정말 고마운 게 많아서 어떻게든 갚아주려고 이렇게 야한 옷까지 차려입었는데~ 네가 날 놀려먹는 게 너무 재밌어 보이니 어쩔 수가 없네. 나도 너 놀려줄래.”
샤론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는 시우에게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때마다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샤론의 순산형 골반, 거짓말처럼 위아래로 출렁이는 가슴, 그리고 딸랑딸랑 울리는 방울 소리.
“오늘 하루종일 이 차림으로 있어야겠다~ 내 가슴에 손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신시우.”
분명 오늘 낮까지만 해도 가슴으로 해주겠다고 장난을 치던 샤론이었는데.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시우는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바라만 봐도 자지에 자극이 오는 저런 차림으로 있으면서 손도 못 대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고문이나 다를 바 없다.
“이제 슬슬 마법 공부할 시간이네. 공부방으로 들어가요. 시우 학생~”
“이건 좀 너무한데....”
“너무하긴 무슨. 그러게 누가 나 놀리래?”
웃으며 다가온 샤론은 싸구려 합성소재임이 분명한 고양이 장갑으로 시우를 일으키더니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속옷 엉덩이 부분에 있는 고양이 발바닥 프린팅이 씰룩이는 것이 보여 더욱 괴로웠다.
결국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 앉은 시우와 과외선생님처럼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샤론.
아무래도 성인용품이 한국 여성의 평균 가슴 사이즈를 상정하고 일본에서 수입되어 온 만큼 고양이 브라 안에 갇혀 있는 샤론의 가슴은 무척 갑갑해 보였다.
“자아, 오늘은 전에 배우다가 말았던 흙의 원소에 대해 다시 공부해 볼 거예요.”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안 어울리게.”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신시우 학생. 저는 언제나 학생에게 예의를 갖추는 선생님이었는데요?”
“네 그러시겠죠.”
놀리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샤론은 너스레를 떨며 시우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일부러 이러는 것은 분명하다.
시우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업보라면 업보지만 상당히 괴로웠다.
왜냐하면 수업 도중 시우의 시선이 곁눈으로 향하는 즉시 신이 난 샤론의 놀림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어머, 시우 씨. 선생님 가슴을 그렇게 빤히 보면 안 돼요. 지금은 마법 수업 중이잖아요?”
“선생님이 수업에 그런 옷차림을 입어도 되나요?”
“뭐가요? 저는 귀여워 보여서 입은 것뿐인데. 시우 학생은 변태네요?”
슬쩍 장단을 맞춰주자 더 좋아한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어머나, 시우 학생. 설마 수업 중에 이렇게 되다니 불성실한 학생이네요.”
아까부터 은근히 시우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샤론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시우의 세 번째 다리를 더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조금 놀란 시우.
샤론은 어느샌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빵빵하게 부푼 그의 물건을 옷 위로 슬쩍 쓰다듬으며 자극했다.
“이건 반칙이지.”
반칙 중의 반칙이다.
그냥 옆에서 알짱거리고만 있어도 자지 아파 죽겠는데 손으로 만지기까지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힘들어?”
“아니, 뭐. 그냥 옷이라고 차려 입어주면 좋겠네. 내가 미안해.”
오늘 수업은 공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무런 집중을 하지 못했다.
사실 시우가 아니라 부처를 앉혀 두었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샤론은 우후후 소리를 내며 웃더니 시우를 일으켰다.
“내 방으로 가자. 아까 하기로 한 거니까 해줄게.”
“어?”
“너가 쩔쩔매는 모습 보니까 화 다 풀렸어.”
갑자기?
어리둥절해 하는 시우의 앞에 샤론은 자기 가슴을 보아 파이즈리할 때처럼 흔들었다.
“안 할 거야?”
그리고는 샐쭉한 눈웃음을 짓는데...
요괴 저리 가라 할 요사스러움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샤론에게 이끌려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