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78화 (178/917)

#178

1.

덜컹이는 버스 차창 밖으로 높다란 빌딩 숲이 흘러 지나갔다.

어찌 보면 가장 ‘대도시답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본사 사옥이 모여있는 도심의 풍경.

처음에 이 광경을 봤을 때는 경악했었는데...

현세살이가 10년이나 지나자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광화문이 보였다는 건 머지않아 도착지라는 의미이다.

샤론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웬 한숨이야?”

옆자리에 앉은 시우는 태평하게 물었다.

어제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긴 했지만 두 사람이 쌓아온 우정은 꽤 무거웠던 모양이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 어색한 기류는 날아가고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샤론은 괜히 그의 친근한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고민을 하게된 원인 자체가 시우를 향한 기만으로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냐. 피로가 아직 안 풀렸나 봐.”

“이제 알바도 그만둘 거라면서 좀 쉬는 게 어때?”

“쉬는 건 쉬는 건데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다 싶어서.”

“그래?”

“응.”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 담기지 않은 대화가 끝나고 샤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별안간 시우와 함께 온 것은 어제 사냥한 호문쿨루스의 결정을 환전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마녀도 아니고, 마법을 사용한다는 사실도 비밀에 부치고 있는 시우가 위치포인트까지 동행할 순 없다.

따라서 시우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샤론만 들어가 환전을 끝내고 근처 파스타 집을 가기로 약속된 상태.

문제는 역시 델라였다.

델라는 샤론을 쓰러뜨리고 그녀의 사냥터까지 접수하겠음을 선언했다.

어제는 용케 델라가 난입하지 않아 충분한 수확을 거뒀다한들 갑자기 이렇게 많은 결정을 환전하면 어떻게든 델라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또라이년이 그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 나올지...

아니, 그 전에 재수없게 환전 전에 마주쳐서 고스란히 수확물을 뺏기지는 않을지 등등.

온갖 걱정거리가 가득해 스트레스 때문에 위에 구멍이 송송 날 것 같다.

무려 스펀지 위가 될 것 같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면 되나? 얼마나 걸려?”

“얼마 안 걸릴 거야. 늦어야 30분?”

“그럼 나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란히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

샤론은 시우가 들어간 카페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가죽 주머니를 열어 확인했다.

공간 확장 및 경량화 마법이 걸린 선대의 유품이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넓고 깊은 자루 안에는 거의 한 포대에 가까운 결정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샤론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환전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 델라와 마주칠까 전전긍긍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환전소로 직행했다.

다행히도 환전소 창구에 다른 마녀는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에버그린 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일이 좀 있어서요. 이거 모두 환전 부탁드릴게요.”

은행원 차림을 하고 있는 위치포인트의 직원은 방긋방긋 웃는 사무용 미소로 에버그린을 반겼다.

그리고 그 미소가 천천히 놀라움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샤론이 창구에 놓인 접시 위에 가죽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자, 대박이 터진 파칭코 기계가 구슬을 토해내는 것처럼 끝도 없이 결정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접시 위로 수북이 쌓인 결정에 온화한 미소를 짓던 접수원의 눈도 좌우로 흔들렸다.

“확인 이후 그... 금방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예의 바른 접객 태도를 보인 접수원은 몇 번의 왕복 끝에 결정의 무게를 재기 시작했다.

샤론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초조하게 입구를 힐끗거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

무게만 재는 것이 아니라 위조 여부를 판별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였다.

불안함을 참지 못한 샤론이 슬쩍 재촉이라도 하려는데 때마침 접수원이 밖으로 나왔다.

“총 무게 54kg 하고도 552.2g 확인되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모아주셨네요.”

“그, 그렇죠.”

54.5kg.

돈으로 계산하자면 54억 5천 만원.

다시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에 샤론은 이 긴박한 상황에서 움찔이려는 입꼬리를 잡아 눌러야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원래 환전을 할 때면 항상 받던 현금으로 가득한 흰 봉투를 건네받지 못한 것이다.

“저기, 돈은요?”

“위치포인트 각 지부에서 보유한 현금 수량은 한정이 되어 있어서요. 1억 이상의 환전금은 개별 계좌를 통해 입금해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개별... 계좌요? 그런 거 없는데...”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서는 위조 신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샤론은 위조 신분을 구매할 여력이 없었기에 온라인 계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온라인 사이트에서 결제한 것만해도 시우가 대신 연동해둔 인터넷 계좌를 통하지 않았던가?

물론 액수만큼의 현금은 지갑에 채워놓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환전금을 계좌로 받으실 때는 시중 은행이 아닌 저희 위치포인트에서 제공하는 위치 뱅크를 통해서 지급되니까요.”

“위치 뱅크요?”

이름 개구려.

라고 샤론은 생각했다.

하지만 돈을 받으려면 만들어야 한다는 데 별 수 있나.

“네, 아직 가입하시지 않았다면 이쪽 서류를 작성해 주시겠어요? 계좌개설부터 입금까지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곤란해하는 샤론의 모습에 접수원은 앞에 카탈로그를 쓱 내밀었다.

종이의 맨 위에는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옆에는 에소드 백작의 상징인 두꺼운 기둥 모양의 인장, 마지막으로 게헨나의 금고 은행을 상징하는 금화 문양이 박혀 있었다.

샤론은 대충 쓱쓱 사인한 뒤 종이를 다시 넘겼다.

창구 안쪽 컴퓨터 자리로 돌아간 접수원은 얼마지나지 않아 카드 한 장과 종이 하나를 꺼내주더니 약관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샤론 에버그린 님의 계좌 WB-G0J1-1SOQVG5로 금일 환금하신 오십사억 오천오백오십이만원 입금되었습니다. 이 계좌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게헨나 시민법을 위반하는 사용처 및 불법적 소득이 발생할 시 사전 경고 없이 환수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계좌번호가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계좌와 개인정보(아주 대충)가 적힌 종이와 약관을 꼼꼼히 훑어보는 샤론.

한 두 푼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거금을 얻게 되고 나니 세상 모두가 돈을 뺏어가려는 승냥이 떼 같이 느껴졌다.

“1금융권 은행에 찾아가셔서 카드를 보여주시면 정상적으로 은행 업무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이 절차는 마녀들의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감시를 위해서였다.

추방자 및 현세의 마녀 사이의 자금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공적’이 신분을 위장해 결정을 팔아치우는 것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

비록 호문쿨루스를 잡아들여 현상금을 받는 것이 여러 국가 기관과 마녀 사이의 협약이라 한들 그 수혜가 마녀 사회 전반에 해악을 끼치는 공적에게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제대로 입금된 금액을 확인한 샤론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오늘 거액을 환전한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수 있는지를 물었고 이후 함구를 부탁했다.

접수원은 잠깐 미심쩍은 듯 샤론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믿을만할지는 몰라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설치한 기분이라 작은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위치포인트의 정보교환소를 들러 어제 취득했던 심장 표본을 넘겨주었다.

이제 전세계 위치포인트에서 쌓인 DB를 바탕으로 1차 분석을 한 뒤 위치포인트 소속 마녀에 의해 정밀분석에 들어갈 것이다.

따로 밝혀지는 내용은 나중에 서신을 통해 전달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시우와 헤어진 지 1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샤론은 서둘러 시우가 기다리고 있을 카페로 향했다.

2.

“이걸 어떻게 굴려야 할까...”

지금까지 매 분기 빚을 갚는데 급급했다면 지금은 여유 자금이 생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종잣돈이 생겼으니 불려보려는 심산이었다.

“요즘 서울 땅값이 그렇게 팍팍 오른다는데 어때?”

카페에서 기다리던 시우와 합류해 터덜터덜 걷던 길.

혼자서 생각에 잠긴 샤론의 혼잣말에 시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부동산?”

“어, 요즘 서울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잖아. 아마 한동안도 계속 오를 거고. 그 정도 돈이라면 그래도 아파트 한 두 채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오르는데?”

시우는 잠시 스마트폰을 뒤적이더니 샤론에게 기사 하나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한 해 상승률이 30%”

샤론이 가진 돈이 54억이니 해마다 약 16억 정도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이다.

남은 돈으로 위조 신분을 만들어 부동산에 투자한다면 빌린 돈의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금액의 돈을 꾸준히 벌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나 안정적일지는 이것저것 조사해봐야겠지만 코인보다 위험하겠어.

샤론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일이 많고, 미처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도 있을 테지만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찾은 것처럼.

샤론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던 시우의 팔에 저도 모르게 팔을 끼워 넣었다.

사실 당장에라도 그를 껴안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이 정도로 감정표현을 제한한 것이다.

갑자기 낀 팔짱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묵직한 애기맘마통의 압박에 당황하는 시우.

“시우야, 오늘도 그거.... 해줄까?”

“야, 밖에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어제 배운, 시우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

은근한 목소리로 들려온 샤론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우는 한눈에 봐도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지둥거렸다.

샤론은 무심코 웃음을 숨겼다.

귀엽다.

만약 남자를 사귄다면 듬직하고 푸른 소나무 같은 남자와 만나야겠다고 생각해왔던 샤론이었지만 요즘 들어 생각에 변동이 생겼다.

“내가 이상한 얘기라도 했나? 뭐 해준다고 말도 안 했는데.”

“아.....”

본인은 어마어마한 선의를 선뜻 건넸으면서, 정작 본인이 은혜를 돌려받을 때면 부담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한다.

누구보다 갑질하기 좋은 입장임에도 전혀 그러지 않을뿐더러, 작은 애교와 장난에도 쩔쩔맨다.

그러면서도 위기의 상황이면 누구보다 멋지게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이런 게 정말 멋진 남자 아닐까?

샤론은 멍하니 굳은 시우의 귓가에 손을 모으고 속삭였다.

“장난이야, 내가 어제 가슴으로 해줬던 그거 맞아.”

“적당히 해.”

“얼굴 빨개졌어, 시우.”

샤론이 키득거리자 시우는 화난 것처럼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실제로 힘을 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괜히 창피한 탓에 화난 척을 하는 것뿐이라는 걸 샤론은 이미 알고 있다.

“삐졌어?”

“아니, 내가 왜.”

“그럼 안 삐졌어?”

“그렇다니까.”

“근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내 표정이 어떤데.”

대화를 글로 써두면 대판 싸운 커플과 비교가 되지 않을 테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영상으로 찍는다면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올 것이다.

“막 빨리 내 가슴 보고 싶은 표정인데?”

“넌 집에 가서 보자.”

“그래도 나 배려해줬네. 여기서 보여달라고는 안 하는 걸 보니까.”

거액의 돈을 쥐게 된 덕에 텐션이 업되어 계속해서 시우를 놀리는 샤론과 무방비하게 당해주는 시우.

두 사람의 모습은 꽤 정다웠다.

후반부 가서는 시우도 어이가 없는지 시종일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한동안 시우를 신나게 놀리던 샤론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도리어 새파랗게 질리기까지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파스타 집 근처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최악의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면에서 맞닥뜨려 모른 채하고 지나갈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태.

그 마녀의 정체는 오랫동안 샤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악덕 마녀.

썅년 오브 썅년인 델라 레드클리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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