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73화 (173/917)

#173

1.

한바탕의 사투가 끝나고 찾아온 평화는 무척 달콤했다.

날이 잔뜩 선 채 피부를 두드리는 소나기와 푹신한 소파의 갭은 이게 인생이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오늘의 영화 초이스는 무난한 로맨스였다.

결별한 두 남녀가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서로의 기억을 지웠지만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영화.

사실 시우는 이미 예전에 본 적이 있다.

꽤 재밌게 봤었기에 샤론에게 보여주기 위해 고른 것이었다.

“푸하....”

이제는 그녀의 일상복이 된 나시티에 돌핀 팬츠.

길게 뻗은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샤론은 반쯤은 소파에, 반쯤은 시우에게 기대어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하나 더 가지고 올까?”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이미 다섯 캔이나 마셨잖아.”

“아냐아냐, 나 기분 좋아서 취해 보이는 거야.”

지금껏 지켜봐 온 바 샤론은 술이 그렇게 센 편이 아니었다.

맥주를 두 캔 정도 마시면 기분이 거하게 좋아져서 예쁜 눈웃음을 치거나, 시답지 않은 시우의 농담에도 팔을 퍽퍽 때리며 꺄르르 웃곤 했으니까.

그런 샤론이 죽을 위험을 넘기고, 빚을 갚을 막대한 돈이 생기고, 피로로 노곤한 몸을 샤워로 깨끗이 하고,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맥주 다섯 캔을 마셨다?

샤론의 행복지수와 고양감 그리고 텐션은 200%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풀 도핑 샤론인 것이다.

“나야 좋지.”

“기다려봐아~”

시우가 잠시 영화를 멈춰놓자 샤론은 총총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웠던 수입 맥주들을 한 아름 꺼내왔다.

“야, 그걸 어떻게 다 마시려고.”

“뭐 어때, 오늘처럼 기분 경삿날에는 죽어라 마셔봐야지!”

평소 빚 때문에 힘들어하고 우울해하던 샤론만보다가 이렇게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보니 시우도 더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파 옆 임시로 배치한 소형 아이스박스에 맥주를 우루루 쏟아 넣은 샤론은 신을 내며 시우에게 맥주캔을 하나 주었다.

“시우야 시우야. 내가 따줄게.”

“나 아직 다 안 마셨는....”

“괜찮아 괜찮아! 그거 빨리 마시고 이것도 마셔.”

“어이구, 취하셨구먼.”

“응! 나 취한 것 같아.”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샤론이 건넨 캔맥주를 받았다.

어째 물 들이켜듯 빨리 마시더니 금방 해롱해롱 상태가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최근에야 샤론이 시우를 만나면서 많이 풀어진 구석이 있지만 이전의 생활을 들어보면 극악의 채무자 라이프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꿋꿋하게 빚을 갚기 위해 노력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다른 추방자에게는 미숙아라는 비아냥이나 듣고, 모든 오락을 포기한 채 일에만 몰두하는 생활이라...

어찌보면 시우의 5년 노예 생활도 샤론보다는 덜 빡빡했다고 할 수 있겠다.

기간도 10년으로 굉장히 길고.

사람이 어깨에 힘만 주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휘청이다 고꾸라지는 법이다.

가끔은 이렇게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 쉬어주는 날도 필요한 거지.

“시우야....”

갑자기 시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샤론.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평소보다 따끈따끈한 손바닥.

“내가 너한테 지이이인짜, 고마워하는 거 알지?”

“알지알지, 이제마저 영화 보자.”

“아니, 제대로 대답해 줘. 내가 너한테 진짜 진짜 고마워하는 거 알지?”

시우와 놀거나 영화를 볼 때도 어딘가 절제되어 있던 샤론.

따라서 시우는 샤론의 주사를 처음 보았다.

샤론은 주사를 부릴 때 말꼬리가 조금 늘어졌고, 같은 말을 반복했으며.

자꾸 웃었고, 또 계속 달라붙었다.

더불어 마지막 주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좀 자의식과잉인가?

“알겠어, 너 고마워하는 마음 알아. 됐지?”

“응, 됐어.”

샤론은 시우의 대답을 듣고도 방글방글 웃으면서 손을 놔주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시우의 손등을 꼬집는가 하면 손가락 하나하나에 깍지를 껴보거나 손을 뺨에 대보거나 한다.

귀엽네.

평소에도 하는 짓이 꽤 귀여운 편이지만 오늘은 아주 애굣덩어리였다.

“이제 됐지? 영화 튼다?”

“응! 대신 손 잡고 있어도 되나?”

“음... 그래.”

뭐 손 좀 잡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의 스킨십 정도는 별로 부담되지도 않는다.

“그럼, 나 자리 좀 옮길래.”

“자리를?”

“기다려 봐.”

소파를 밟고 일어선 샤론은 시우의 한쪽 발목을 잡아 다리를 벌리더니 그사이 빈 공간에 앉았다.

그리고는 시우의 배와 가슴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마치 시우를 소파처럼 사용하는 모양새였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불편해? 그냥, 이 자세로 영화 보고 싶어서.”

“불편한 건 아닌데...”

“조금만 이렇게 있을래 조금만, 응?”

샤론이 워낙 가볍기도 하고 크게 불편하진 않았는데 사실 불편한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그녀의 등허리가 시우의 물건을 꾹꾹 누르고 있다는 점 정도?

그다지 자극이 오는 것도 아니니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다만 좀... 이건 너무 본격적인 커플 자세인데? 하는 감상 정도가 들긴 했다.

취하기도 했고 본인이 만족하는 듯하니 내버려 두자.

시우의 품에서 자리를 잡은 샤론은 흡족한 듯이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얌전히 영화 감상에 몰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우는 이 자세의 추가적인 문제점을 알아차렸다.

먼저 시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샤론.

그녀의 머리에서 향긋하고 좋은 향기가 솔솔 올라온다.

시원한 물향과 섞인 허브 정원에 온 것 같은 산뜻한 향기.

이 자체로는 그냥 들이마시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거기에 풋풋한 살내음이 섞이면 뭔가 분위기가 야릇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알코올에 흥분한 심장이 쿵쾅거리는 느낌과 샤론이 숨을 쉴 때 살짝 부풀었다 줄어드는 몸까지도.

전부 느껴졌다.

“흐음.....”

하지만 딱히 시우도 티를 안 냈고 샤론이야 여느 때처럼 별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영화 관람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잠자코 시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영화를 보던 샤론이 별안간 몸을 일으키기 전까지 말이다.

“불편하구나?”

샤론이 몸을 일으킨 것은 시우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자세로 있는 이상 살짝만 내려다봐도 나시티 위로 샤론의 깊고 깊은 가슴골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로 괜히 신경 쓰였으니까.

“........”

샤론은 화면을 가린 상태로 슬쩍 시선만을 뒤로 돌렸다.

잠깐 마주친 눈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녹은 설탕 같던 망설임이 결심으로 굳어지자마자 시우는 깜짝 놀랐다.

“우웅....!”

“어?”

팔을 교차해 티의 밑단을 잡은 샤론이 훌렁 상의 탈의를 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시우는 멍하니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도 반응은 똑같았을 것이다.

그녀의 몸은 조각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상처럼 아름다웠으니까.

돌핀 팬츠의 허리춤부터 곧게 뻗은 기립근, 옷을 벗는 동작을 따라 유려하게 움직이는 어깻죽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잘록하게 들어가는 허리선이 블랙홀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옷에 딸려 올라갔던 그녀의 청록빛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다시 쏟아지며 한결 진항 체취를 풍겼다.

머리카락을 뒤로 모으고 정리해 손목의 머리끈으로 묶는 샤론.

그녀가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등판 뒤로 부드럽게 출렁이는 옆 가슴의 자태가 희끗희끗 엿보였다.

고혹적이다.

그저 등을 보이는 것임에도 훅 풍기는 색기가 느껴졌다.

“하암....”

샤론은 하품하는 척하며 다시 아까처럼 시우를 소파 삼아 기댔다.

바로 어제 보았던, 가녀린 몸매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그 자세로 고개만 뒤로 젖힌 샤론은 뻣뻣하게 굳은 시우를 보고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갑자기 벗는 게 어딨어. 놀랐잖아.”

“내 가슴 예쁘다면서. 보기 싫어?”

“그건 아닌데... 갑자기 이러시면 제가 좀 많이 당혹스럽거든요.”

“헤, 넌 맨날 당황하면 존댓말 나오더라.”

샤론은 자기가 해놓고도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한쪽 팔로 가슴을 슬쩍 가렸다.

그와는 별개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가득 수 놓여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냈는지 쭈뼛거리던 시우의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이 세상 어떤 첨단 공학을 가져와도 비빌 수 없을 극상의 감촉이 손바닥 가득 담겼다.

부드러운 감각도 감각인데 손바닥 부근에서 느껴지는 쫄깃거리는 돌기가 굉장히 신경 쓰인다.

어제보다 훨씬 뜨겁게 느껴지는 피부는 아마 술 때문이겠지.

“너 많이 취했구나?”

“아니아니, 하나도 안 취했어. 그런데 오늘 너 힘들었을 테니까. 그치?”

“아, 어, 그래.”

“내가 너 힘들면 가슴 보여주고 만지게 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은 힘든 날이었으니까 해줄게. 힘든 날이니까야.”

이런 훌륭한 가슴을 인질로 잡고 그렇게 물어보면 남자가 할 수 있는 대답이야 뻔히 정해져 있는 것이다.

샤론은 자신의 말이 설득력있다고 생각했는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머지 시우의 한 손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편해?”

“펴...편하네.”

그런고로 갑자기 샤론의 자연산 가슴 패드에 손을 얹고 영화감상을 하게 되었다.

제 딴에는 편히 만지라는 배려인지 아까보다 낮은 위치에 기대는 샤론.

시우가 원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샤론의 가슴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 그러면서도 흐드러지는 가슴의 모양을 관찰할 수 있는 환상적인 포지셔닝이었다.

너무 과하게 크지 않고 모양까지 예뻐 남자를 미치게 하는 샤론의 맘마통.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고 슬쩍, 아주 슬쩍 가슴을 쭈물거려 보았다.

어제 느꼈던 감각이랑 똑같다.

“시우야.”

샤론의 예쁜 민트빛 눈동자가 빙그르 올라가더니 시선을 마주친다.

“내 눈치 안 봐도 돼. 떡 주무르듯이 막 주물러도 괜찮은데.”

“떡 주무르듯이?”

“표현이 좀 그랬나? 아무튼 맘껏, 맘껏 하고 싶은대로 해. 내 고마움의 표시...라고 하면 이상한가?”

아무래도 시우가 찔끔찔끔 눈치만 보며 신경을 쓰고 있자 정말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지가 서버렸다.

지금까지는 반야심경을 외우며 간신히 버텼는데 샤론의 ‘떡 주무르듯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광경이 상상되며 하반신에 피가 쏠려버렸다.

샤론은 갑자기 등 뒤에 딱딱한 것이 닿자 아무 말도 않고 슬쩍 자세를 고친다.

많이 쪽팔렸다.

이번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샤론이 말했다.

“그... 신경 안 써도 돼. 오히려 기쁜데? 너가 내 몸을 보고 정말 예쁘다고 느꼈다는 거 아니야... 뭐, 음, 뭐.... 안 싫어.”

술기운에 한껏 올라갔던 텐션이 아니라 쑥스럽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소녀 말투였다.

아마 그 단단한 것이 발기된 자지라는 것을 알아챘고, 처음 있는 경험인 만큼 위축된 모양이다.

배려해 주는 듯한 그녀의 말투 때문에 더욱 민망스럽다는 것은 알런지.

그래도 샤론 나름의 감사 표시인 듯하니 거부할 생각은 결코 없다.

미쳤다고 이걸 거부하나?

까놓고 말해 이 시점에서 체면 차린답시고 손을 뗄 수 있는 남자가 있긴할까.

“알겠어. 그럼 계속해도 돼?”

“응. 해줘.”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하나도 집중하지 못한 채 샤론의 가슴만을 주물럭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영화 따위보다 훨씬 매혹적인 것이 두 손안에 있었으니까.

“........”

“........”

잔잔한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평소라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감상을 말하거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물어보거나 아무튼 수다쟁이가 되는 샤론이었는데...

지금은 잠잠하다.

영화를 보지 않고 있던 것은 시우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우는 느릿하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손바닥에 맞닿아있는 샤론의 꼭지.

이게 원래부터 이렇게 뾰족하게 서 있었던가? 하는 뒤늦은 생각.

아니다.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된다.

남녀 관계에 대해 무지한 샤론이라면 그저 시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슴을 제공했을 것이다.

샤론의 가슴을 보고 주무르면서 발기한 것처럼 샤론의 유두도 반복되는 마찰에 조금 딱딱해졌을 뿐이다.

“....재밌었다. 엇...!”

뻔히 거짓임이 보이는 감평은 짤막하게 늘어놓은 샤론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나던 도중 팔에 힘이 빠졌는지 휘청하는 샤론.

시우는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었다.

“조심해.”

“아.....”

말랑하고 부드러운 샤론의 옆구리 살이 손에 잡힌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얼떨결에 잡았을 뿐인데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짝 붙은 두 사람의 얼굴.

시우의 품에 매달리듯이 안기게 된 샤론은 조금도 웃지 않고 빤히 눈을 마주해왔다.

“........”

“........”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버텨내지 못하고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시우였다.

“허벅지 아프니까 내려올래?”

사실 별로 안 아프다.

이 거리에서 보는 샤론의 얼굴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아무거나 주워섬긴 것에 불과하다.

동그랗게 커진 순박한 눈망울, 안쪽으로 앙다문 입술.

원래도 예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거리에서 보는 건 파괴력이 다르다.

“시우야.”

하지만 샤론은 시우의 허벅지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신 달콤해 보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나 알 것 같아.”

“뭘?”

“키스해야겠다 싶은, 타이밍.”

시우의 목을 끌어안은 샤론이 갑작스레 입술을 겹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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