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1.
20초.
샤론이 남아있는 모든 호문쿨루스를 격파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진록빛의 에메랄드로 치장된 샤론의 완드가 빛나는 순간.
백화점 안에 작은 폭풍이 일어났다.
좁디좁은 실내 공간에서 발생한 소용돌이가 검으로 내려쳐도 잘 베이지 않던 호문쿨루스를 버터오징어처럼 쫙쫙 찢는 것을 보며 시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테러라도 일어난 듯이 엉망진창이 된 백화점 한가운데서 샤론은 완드 끝을 바닥에 톡 내려놓는 것으로 싸움의 종국을 알렸다.
“후우.... 됐다. 빨리 수거하자.”
“그래, 도와줄게.”
“지금은 내가 후딱할게. 넌 조금 쉬고 있어. 고생 많았으니까.”
잔당처리를 끝낸 샤론은 마지막 한 방울의 마력까지 알뜰하게 사용해 염동으로 수많은 사체를 일제히 들쑤셨다.
시우가 조금만 복잡한 염동을 써도 엉망진창의 결과가 나오는 것과는 달리 기본기가 탄탄한 샤론은 백 개가 넘는 사물에 간섭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가 꺼내온 결정도 마치 외과의가 적출한 듯이 아주 깔끔하고 말이다.
샤론은 공중에서 날아오는 결정을 하나하나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시우야, 너 무술 배워본 적 있어?”
“아니, 그런 적 없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 모호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아직 위기가 다 지나갔는지 확실하지 않고, 오늘의 일이 훗날 어떤 사고의 전조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샤론으로선 모처럼 제대로 된 사냥 끝에 대량의 결정을 수확했고, 또 시우로선 새로이 정립한 그림자의 법칙이 매우 유효하다는 걸 확인할 기회였으니 두 사람 모두 마냥 찜찜하진 않은 것이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 싸워? 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
“모르겠네. 나도 몸이 먼저 움직여서 깜짝 놀랐어.”
샤론은 흥분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제일 얼떨떨한 것은 시우였다.
그 많은 호문쿨루스를 잡았는데 몸에 무리가 간 구석이 조금도 없다.
체감상 중거리 달리기를 뛰고 온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졌을 뿐.
이제껏 막무가내로 몸을 사용하던 것과 달리 아주 효율적으로 움직였다는 증거였다.
“아 맞다, 너도 군대 다녀왔겠구나? 군대에서 배운 거지?”
“아니, 거긴 그런 데 아니야.”
살짝 들뜬 어조로 이상한 억측을 이어나가는 샤론.
그녀의 양 뺨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의 보조개가 피어나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의 양이라면 그녀의 빚 걱정을 잠시간 덜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총 103개의 결정이 샤론의 손에 들어왔다.
샤론은 호문쿨루스의 결정으로 가득 차 묵직한 주머니를 기쁜 듯이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1억, 아니 1억 5000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시우야.”
“왜?”
“내가 생각해 봤는데...”
샤론은 근처 박살이 난 매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우에게 다가갔다.
갑옷 중 투구만을 해제하고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내리는 그를 보며 멈칫한 샤론.
솔직히 오늘 시우는 좀 멋있는 것 같았다.
“이거 환전하면 8할은 너한테 줄게. 네가 한 거니까.”
“그런 게 어딨어. 원래 우리 계약이 사냥해서 얻은 건 네가 갖고 대신 마법 알려주겠다는 거였잖아.”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한 두 푼도 아니고.”
그건 샤론이 어디까지나 그가 사냥에 거의 참여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내걸었던 조건이다.
하지만 오늘 이 풍족한 전리품은 순전히 그의 힘으로 빚어낸 것이 아닌가?
케케묵은 구두계약을 들먹이며 ‘이거 다 샤론꺼!’라고 하는 건 도저히 도리가 아닌 듯싶었다.
시우는 씩 웃더니 털썩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샤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제아무리 힘든 처지에 있어도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헤쳐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아보였다.
“됐어, 약속은 약속이잖아.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게 더 이상해. 무엇보다 나는 당장 돈이 급한 케이스도 아니고.”
“어....”
“너 다 가져. 난 오늘 사냥에서 너한테 배운 거 써먹어 본 거에 만족해.”
시우의 손길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샤론은 멍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고작 머리를 쓰다듬어졌을 뿐인데 가슴을 보였던 때보다, 가슴이 만져졌던 때보다 심장이 요란스레 뛴다.
왜 이렇게 발꿈치가 들썩이는 건지.
왜 이렇게 실실 때아닌 미소가 나오려는 건지.
자칫 헤실헤실 풀어진 볼썽사나운 얼굴을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샤론은 다급하게 입가를 가린 채 안절부절못했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반응에 아차 싶어 손을 떼는 시우.
그러고 보니 오딜도 허락 없이 머리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었지.
“돌아가자.”
샤론은 차분해진, 아니 차분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태도로 휙 돌아섰다.
위험도 사라진 것 같고 결정도 회수했으니 이 황량한 곳에서 이러고 있을 필요 없다.
집으로 돌아가 뭐든 야식시키고 느긋하게 영화 한 편 봐야지.
샤론은 속으로 오늘 야식은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다짐했다.
“진짜 고마워 시우야.”
“고맙긴 뭘.”
“항상 나 배려해주고 도와줘서.”
“말 섭섭하게 하네. 우린 서로 공생 관계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지 뭐.”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샤론과 터덜터덜 그녀를 뒤따르는 시우.
모처럼 연출된 훈훈한 분위기에 시우도 살짝 겸연쩍었다.
안 그래도 오전에 있던 샤론의 ‘가슴 만질래? 이벤트’를 정신줄 놓고 만끽한 탓에 돌아온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했는데.
연이어 사건이 일어난 덕에 없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묻힐 것 같았다.
에스컬레이터를 거쳐 백화점 지하와 신촌역을 연결하는 지하상가 쪽으로 내려왔다..
혹시 괴물들이 튀어나올까 경계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기색은 없다.
불이 꺼진 상가 내부가 을씨년스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응?”
그때 샤론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당황하는 시선으로 시우를 바라본다.
“왜?”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조금 전에 뭐가 커다란 울림이 쿵 쾅 하고 느껴졌던 것 같아서.”
“아니? 나는....”
못 들었는데 라고 말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커다랗게 건물 내부를 울리는 둔중한 소음.
-쿵!
시우와 샤론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쿠쿡...쿵....
진열대에 놓여있는 귀걸이나 반지 따위가 달그락달그락 떨리며 유리 진열대 위를 굴러다닌다.
비상구 안내등이 발악이라도 하듯이 점멸한다.
땅을 딛고선 발끝부터 올라오는 진동이 몸을 덜덜 떨리게 했다.
“이건....”
가뭄을 맞은 논밭처럼 천장이 갈라졌다.
건물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던 콘크리트와 철근이 비명을 지르며 쪼개지고 휘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연이어진 진동과 소음에 알아차렸다.
“이...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다.
이 소음은 어느 쪽에서 들려온다던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건물 전체가 지르고 있는 끔찍한 비명이었다.
“이리 와!”
위기를 직감한 시우가 샤론의 손목을 잡아챘다.
“엇!”
휙 끌려와 살포시 시우의 품에 안긴 샤론.
심상치 않다.
너무 간다라는 생각도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누가 봐도 붕괴의 조짐이 아닌가?
시우는 그녀를 안은 채 곧장 마력을 증폭시키며 좌표이동을 활성화했다.
“시...시우야...!”
“가만히 있어 봐!”
“이럴 때가 아니라 도망가야 해!”
“도망가려는 거니까 나 믿고 얌전히 있어 줘!”
점점 커지는 굉음에 거리 소리를 지르듯이 대화하는 두 사람.
시우의 좌표이동식에 대해 잘 모르는 샤론은 불안한 듯이 시우를 재촉했다.
좌표이동식은 굉장히 까다로운 마법이다.
대입해야 할 변수도 무수히 많았고 거리와 동승객의 숫자에 비례해 마력 소진량도 어마무시하게 커진다.
가장 좋은 것은 집까지 단숨에 이동하는 거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계산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듯했다.
따라서 이동할 곳은 백화점 근처로 설정한다.
-콰과과과과과광!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소리.
아니, 소리라기보다는 이미 충격파의 영역에 도달한 폭음과 함께 저 멀리 복도 끝부터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인다.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파괴의 파동이 시우와 샤론을 향해 달려왔다.
아무리 그림자의 법칙이 효율 좋은 마법이라고 해도 솔직히 저 충격량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 사이로 샤론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우의 바로 발등 앞에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졌을 때.
시우는 아슬아슬하게 좌표이동에 성공했다.
2.
12층의 백화점이 붕괴한다.
백화점 밖으로 좌표이동에 성공한 시우가 본 것은 고개를 젖혀야 끝을 볼 수 있는 커다란 건물이 맥없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쿠구구궁
질량과 위치는 곧 에너지다.
수 만 톤이 넘어갈 질량을 지닌 돌덩이가 수십 미터 상공에서 추락하고 있으니, 백화점은 그저 무너지는 것만으로도 질량병기에 가까운 에너지를 사방으로 방출했다.
소리로, 충격으로, 진동으로.
아무래도 지하 5층이나 되기 때문인지 마치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유리조각, 사람보다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런 무거운 것들은 시우와 샤론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으나 분진과 먼지는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일대에 퍼져 샤론을 감싸 안은 시우를 덮쳤다.
저 건물을 짓는 데 얼마나 걸렸을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 중국인으로 북적이던 백화점이 한 무더기의 건축폐기물로 변하기까지는 20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으...으...으....히으.... 뒤, 뒤질 뻔했네...”
샤론은 겁에 질린 듯이 시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도 그럴 게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밀물에 쓸려나간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던 복도, 귀가 잠깐 들리지 않게 만들었던 폭음과 코 앞까지 다가왔던 붕괴.
샤론은 영락없이 자신이 깔려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시우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됐겠지.
아무리 마녀라도 마력이 없는 상태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충격을 상쇄하는 것을 불가능하니 말이다.
“괜찮아?”
“괜찮긴, 개... 개무서웠어....지릴 것 같아. 진짜로...”
“어째 오늘따라 술술 풀린다 싶었지. 내 팔자가 좀 사나워서...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선방인데?”
분위기도 띄울 겸 진실이 섞인 농담을 가볍게 던져보았지만 샤론은 여전히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었다.
사실 시우라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간을 맞추지 못했으면 건물 안에 납작포가 되었을 건 시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경험이라고 해야하나?
최근 험하게 굴러온 까닭인지 생각보다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거기에 샤론이 이렇게 벌벌 떨고 있는데 자신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겠다는 건가?
“봐봐, 다친 데는 없어?”
“다친데는 없는데... 자...잠시만... 나 몸이 굳어서... 안 움직여...”
샤론은 시우의 옷깃을 꾹 쥔 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슬쩍 등을 토닥여주었더니 샤론은 막혔던 숨이 트인 것처럼 헉헉 거센 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보니 눈꼬리에 처량한 눈물이 그렁그렁 방울져 있었다.
“괜히 지하로 가자고 한 것 같아. 이것도 호문쿨루스가 한 짓이겠지?”
아니라면 너무 공교롭다.
지하상가에 진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지는 건물이라니.
“그 정도의 지능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아 나도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풀려... 쉬자, 돌아가서 무조건 쉬자.”
샤론은 앓는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시우의 옷을 놓아주고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두 사람이 태평하게 쉴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
“........”
인간은 놀라운 광경을 보면, 상식 이상으로 당혹스러운 장면을 보면 자연히 침묵하는 법이다.
지금의 샤론과 시우가 그랬다.
저 멀리.
아마도 원래는 백화점의 입구’였던’곳.
여름 바람에 분진이 가시고 먼지가 가라앉자마자 보인다.
어지간한 건물 크기의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샤론과 시우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광경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땅을 박차며 달려오기 시작한다.
샤론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시...시우야 도망가야 해. 저건... 저건 아니야.”
한번 땅을 구를 때마다 울리는 지축.
4족 보행임에도 높이만 족히 30M는 될 것 같은 거대한 체구는 오늘 열심히 때려잡았던 호문쿨루스의 엄마뻘쯤 되는지 굉장히 유사하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 뿐이었더라면 실력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은 시우와 그의 활약을 지켜봤던 샤론이 겁에 질릴리 없다.
무엇보다 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온몸에 촘촘히 박혀있는,
새빨간 눈이었다.
시우는 경악하다 못해 도리어 헛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저게 몇개야 도대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난장판에 끌려다니는 시우의 사주는 오늘도 착실하게 그를 가시밭길로 이끌고 있던 것이다.
좌표이동식은 그렇게 빈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계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샤론을 포함해 도망치려면 족히 30초는 걸릴 텐데 어미 개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아하니 10초도 못해 발에 짓밟힐 것이 뻔했다.
시우는 샤론을 공주님 안기 자세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그다지 무겁지 않은 샤론인데 갑주의 힘까지 더해지니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다.
“뭐, 뭐 하는 거야!”
“지금 마력도 없잖아! 이게 더 빨라!”
그리고 곧장 뒤를 돌아보고 저 멀리 뻗어있는 이면결계의 경계면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