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67화 (167/917)

#167

1.

편의점 알바는 단순하다.

바코드를 찍어 계산하고, 카드를 긁거나 현금 받아 거스름돈 주고, 폐기를 분류하고, 들어온 상품을 진열하면서 재고 체크 해주고, 가끔 바닥을 닦아주면 끝.

샤론의 미모가 미모이다 보니 가끔 진상이 나타나거나 지나치게 질척거리는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그걸 위해서 일부러 ‘박영(薄影)’의 부적을 장만한 뒤로는 그것도 옛 일이다.

얇은 그림자라는 문자 그대로 소지하고 있는 사람의 존재감을 대폭 감소시켜주는 부적인데, 현세에 나온 마녀들은 대부분 이걸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녀는 하나같이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니고 있고 아름다운 미모는 해충을 꼬이게 하는 법이니 말이다.

시우의 오르골처럼 마력의 파동을 아예 없애주거나 안의 소리를 차단하는 고성능의 아티펙트는 아니지만 50만 원에 귀찮은 관심을 덜어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길거리를 나다닐 때는 거짓말 않고 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 번씩 추파가 날아와 참 고달팠었는데.

“이것도 슬슬 그만둬야 하나?”

샤론은 텅 빈 편의점을 슬쩍 훑어보고 계산대 안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래는 이 시간 동안 주식 공부를 하거나 코인을 알아보거나 했었는데.

주식도 코인도 모두 쓴물을 들이키고 나니 열의가 사라져버렸다.

결국 멍하게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샤론이 불가피하게 하루의 6시간을 아르바이트해야 했던 것은 집세를 포함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지금은 따로 집세를 마련할 필요가 없어졌고, 시우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시간만큼 돈 벌 궁리를 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시우에게 기대게 생겼으니 말이다.

“시우...시우, 흠....”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샤론은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오늘 오전의 일이 기억났다.

낙담하고 슬퍼할 시우를 위해 샤론이 큰맘 먹고 준비한 ‘가슴 만져볼래 이벤트’.

지금 생각해오면 꽤 대담한 짓을 했다고 생각 중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한들 맨 가슴을 보이는 것은 부끄럽고 또 낯뜨거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도 참...”

샤론은 시우의 앞에서 가슴을 오픈했고 심지어 쭈물쭈물 주무르게까지 해주었다.

그 결과 기운을 찾아 여느 때보다 조금 들뜬 그의 모습까지 확인했으니 수치를 감수하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은 시도였다 할 수 있겠다.

샤론은 괜스레 자신의 가슴을 쓸어모아 보았다.

가슴이 예쁘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흠.....”

정말 예쁜 걸까? 달릴 때 불편하기나 하고 게다가 까만 점까지 있는데.

남자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자신감도 없었고 따라서 시우의 말이 사탕발림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이거를 시우의 앞에 보여준 데다가 손으로 만지게까지 했다라...

조금 수위가 높은 영화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가슴을 주무르며 정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어떤 기분이길래 저렇게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만 사실 샤론은 별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가끔 젖꼭지가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 꾹꾹 눌릴 때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 나긴 했지만 자신이 주무르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근데 왜 이러냐....”

그런데 왜 그 상황만 떠올리면 얼굴이 이렇게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걸까?

그가 쥐었던 가슴 피부가 따끔따끔 뜨거워지는 걸까?

이런 건 로맨스 영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도 뿌듯했다.

시우가 좋아하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남사스러운 짓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뭐 어때?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 때면 만지게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지만 친절한 시우가 자신이 힘들 티를 낼 리도 없고, 설령 힘들다고 해도 샤론에게 막무가내로 부탁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따금 샤론이 먼저 제안을 해줄 생각이었다.

아무튼 오늘 잡념은 여기서 마무리.

교대 전에 마지막으로 매장 상태를 점검한 샤론은 룰루랄라 편의점을 나왔다.

“어래?”

그리고 문득 눈치챈다.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심지어 어색한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단순히 일이 끝나서 그런 게 아니다.

잠깐 이유를 생각해 본 결과 저 엘리베이터만 타면 곧 시우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언제나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어떤 보물이든 주고 싶어요]

[당신을 만나게 될 상상만 해도 행복하고 즐거워져요]

[왜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던 거에요]

갑자기 언젠가 보았던 영화 속 여배우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있지 않을 때 상대를 생각한다 + 무엇이든 주고 싶다 + 만날 상상만 해도 행복하고 즐겁다 =?

“이게.... 사랑?”

샤론은 잠깐 아연했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 짓는 가벼운 웃음이었다.

“에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 빚 갚아주나.”

아무튼 샤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2.

“뭔가 잡혀?”

“아니?”

마녀복으로 갈아입은 샤론은 전봇대 위에 서서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 일과.

샤론이 편의점 알바를 다녀온 이후 전단지 붙이기를 하면서 겸사겸사 호문쿨루스 추적에 나선 것이다.

다만 시우가 옆에 있게 된 문제에 대해 샤론은 자신의 착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문쿨루스를 사냥하는 것만 걱정하면 됐던 이전과는 달리 샤론에겐 곤란한 점이 있었다.

바로 샤론의 사냥터를 뺏어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델라의 존재다.

그렇기에 원래대로라면 시우를 놓고 혼자만 사냥하려 했다.

만약 델라와 마주친다면 굴욕적이지만 자비를 구걸할 심산으로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시우를 떼어낼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다는 것.

시우는 샤론에게 델라를 자신이 쓰러뜨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샤론이 그에게 잠자코 방에 있으라 말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완곡한 증거가 된다.

모처럼 세워준 그의 체면을 짓밟는 것이고, 또 샤론의 응원도 허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샤론이 선택한 것은 간절한 기도였다.

설마 하룻밤 만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겠어?

내일부터는 더 좋은 변명을 떠올릴 테니 부디 오늘만 나타나지 말아다오... 라는 심정이다.

“오늘도 허탕이려나... 요즘 괜찮은 거 맞아? 거의 몇 주째 못 잡은 것 같은데.”

샤론은 이어지는 허탕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우울해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샤론과 시우 모두에게 곤란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반대로 빚을 갚을 방법을 오늘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불행이니.

그냥 돌아가자.

이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리 판단한 샤론은 전봇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시우를 설득하려 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갈래?”

“벌써? 아직 30분 정도밖에 안 돌았잖아.”

“그냥 조금 피곤해서... 오늘은 집에서 좀 쉬고 싶네.”

더군다나 샤론에게는 남아있는 마력도 거의 없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잔챙이들을 만난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하필 오늘 위험한 호문쿨루스를 만나면 순전히 시우의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

델라에게 쓰러졌던 샤론을 발견한 것이 시우였던 만큼 그도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엇....”

거짓말처럼 나침반의 자침이 움직인다.

이 근방에 이면결계를 뒤집어쓴 호문쿨루스가 존재한다는 의미.

불행히도 시우가 그 나침반을 보고 말았다.

평소에는 잘 나오지도 않던 게 왜 하필이면! 샤론은 속으로 절규했다.

“나 혼자라도 다녀올게.”

“뭐? 절대 안 돼!”

“하지만 너도 피곤해 보이고 마력도 전부 회복 못 한 거잖아. 마침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잘 됐어.”

태연한 시우의 말에 샤론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진지한 생각인지 아니면 허세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문쿨루스는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델라까지 고려한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일단은 설득해보자.

“호문쿨루스가 무슨 슬라임 같은 건 줄 알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존재가 아니야.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고!”

“조심할게. 그리고 아마 우리가 항상 잡던 검은 개가 아닐까? 이제 그 정도라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위험하다 싶으면 곧장 몸을 뺄게. 그리고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가는 동안 혹시 다른 사람이 호문쿨루스에게 당할 수도 있는 거잖아.”

결국 샤론은 마땅히 시우를 설득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시우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냥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호문쿨루스가 민간인에게 끼치는 피해를 막아보려는 심산이다.

시우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지.

말려도 혼자라도 갈 것 같은데 차라리 옆에서 돌봐주는 편이 마음 편하다.

“후우, 그럼 나도 같이 가. 마침 돈도 필요하긴 하고.”

“그래 주면 나야 든든하지.”

씩 웃은 시우는 떨떠름해 하는 샤론과 함께 자침이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번화가 한 가운데로 발을 들이자 백화점을 포함한 일대가 이면결계로 감싸였다.

결계의 중심부가 되는 것은 신촌역과 지하로 연결되는 지하로 5층, 지상으론 12층에 달하는 높다란 백화점.

“가 볼까?”

“내가 앞장설게.”

이미 영업시간이 종료되어 불이 캄캄하게 꺼진 백화점은 당연히 이면결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우의 낙인에 저장되어있던 마력이 증폭에 증폭을 거듭하더니 그림자의 입자가 흘러나와 갑옷이 되어 몸을 감쌌다.

샤론도 지팡이를 든 채 주위를 경계하며 백화점 입구 앞에 섰다.

결계의 중심에 백화점이 있기도 하고 나침반의 자침도 건물 내부를 향하고 있으니 호문쿨루스는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열게.”

“응, 불법 침입하는 기분이야.”

“맞지 않나?”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은 시우는 문고리를 잡았다.

아주 살짝 잡아당겼을 뿐이지만 갑옷에서 나오는 완력은 어마무시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의 프레임이 깡통이 찌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휘어지고 프레임 사이의 유리가 와장창 깨져서 흩어졌다.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유독 그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 경보음은 안 울리네?”

“문고리 그만 잡고 있고 빨리 들어가자.”

“어, 좀 신기해서.”

샤론은 이런 생활이 익숙할지 몰라도 시우는 아니었다.

영업 종료된 백화점에, 그것도 사람 하나 없는 시각에 불법 침입을 하다니.

아무리 이면결계의 안이라지만 신기한 건 신기한 거다.

“시우야 근데 해보고 싶은게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야?”

“아, 원래 사용하던 그림자의 입자를 조금 바꿔봤어. 해봐야 획을 한두 개만 더 추가한 거긴 한데. 실전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데?”

“네가 알려준 흙의 원소 식을 참고해서 아주 조금 섞어봤거든? 네가 보고 부족한 점을 좀 짚어줬으면 좋겠네.”

시우의 말에 샤론은 가까스로 경악을 참았다.

알려준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기존 마법에 접목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결과물을 눈앞에서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물론 시우라면 어떻게든 유효한 결과를 끌어냈으리라는 묘한 믿음이 생겨났지만 말이다.

그렇게 백화점 1층을 쭉 들어가 보는 시우와 샤론.

“꽤 어둡네.”

여느 백화점처럼 화장품점과 계절 옷을 판매 중인 1층은 거의 주위 분간이 힘들 정도로 캄캄했다.

백화점에는 창문이 없어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고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건 탈출 유도용 녹색 조명뿐이었으니 말이다.

을씨년스럽고 어쩐지 평소보다 실내가 조금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은 덤이다.

“내가 좀 밝혀줄게.”

샤론의 주위로 장식불이 5개 정도 켜졌다.

이러니 한결 이색데이트에 가까운 기분이다.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1층을 절반 정도 수색했을 때 샤론은 뭔가 알아차리고 시우를 보았다.

비슷한 시점에서 시우도 같은 걸 느낀 것인지 동시에 샤론을 보고 있다.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의 감상은.

“뭔가 이상해.”

“좀 이상하지 않아?”

위화감.

샤론이 지닌 나침반의 탐색 범위는 반경 150M이다.

“우리 백화점 밖에서 여기까지 150M는 충분히 걸어왔지 않나?”

“내 말이. 그럼 뭐라도 나와야 하는 건데....”

즉, 1층을 둘러본 시점에서 호문쿨루스를 조우하거나 설령 엇갈렸다 하더라도 나침반의 바늘이 움직여야 한다.

“자침은 계속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어.”

“나가자.”

시우는 곧장 샤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침반이 고장 난 것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주 빠르게 어디를 가리키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양 정신없이 떨려온다.

-크르르르

사방에서 낮게 목울대를 울리는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지금껏 샤론과 시우가 사냥해왔던 검은 개였다.

“시우, 널 지켜줄 여력은 없어.”

“미안, 괜히 고집부렸다.”

“사과는 다음에, 네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고 이럴 줄 알았나?”

이건 샤론이라고 해도 예상못했을 일이었다.

동일한 호문쿨루스가 이 정도의 숫자가 모여있다는 것은 듣도보도 못한 일이고, 설령 10마리 정도라면 지금의 샤론이라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

아무튼 사방에서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은 한 두 마리의 것이 아니다.

화장품 샵의 진열대, 에스컬레이터, 옷걸이의 사이, 복도, 계단.

곳곳에서 번쩍이며 하나 둘씩 떠오른 붉은 안광은 어림잡아 세어봐도 그 50개이상.

사냥감을 몰아넣는 데 성공한 한 무리의 짐승이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동족의 목숨을 앗아간 두 마녀에게 복수하겠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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