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1.
현세와 게헨나를 오가는 마녀를 위해 준비된 출입국 관리소.
하루에도 많은 마녀가 이동을 하는 만큼 ‘문’과 연결된 라운지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봄날의 벛꽃을 연상케 하는 연분홍빛의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묵은 마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교태나 애교 따위가 아닌 긍지와 신념으로 반짝이는 자홍빛 눈동자.
반듯하게 다물린 가녀린 입술과 선이 엷은 신체라인.
짧은 보폭을 재촉해 뚜벅뚜벅 라운지의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기는 마녀의 모습에서는 어째서인지 카리스마 넘치는 철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제각기 라운지 한구석을 차지하고 떠들어대던 마녀들은 소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
마녀 사이에서도 유별난 그녀의 외형을 보고 즉각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계약의 마녀,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
그러나 단순히 공작이라는 작위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수백 단위의 호문쿨루스를 도륙하고 두 자릿수의 공적을 잡아 죽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마녀들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마이웨이에 독선적인 마녀라 해도 그녀의 숭고함과 공훈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눈인사로 그 경외 섞인 반응에 응대한 엘로아는 즉각 자신이 찾던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이군, 제머나이 데네브 경.”
“티페레트 공작, 그간 무고하셨나요?”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마녀는 고풍스러운 머메이드 드레스로 몸을 감싼 채 미소와 함께 엘로아를 맞았다.
공작의 연락을 받자마자 분 단위로 쪼개진 스케줄을 통째로 알비레오에게 넘기고 홀로 마중을 나온 것이다.
그도 그럴게 티페레트 공작이 획득하는 유산과 공적이 남긴 물품을 매수해 차익을 남기는 곳이 제머나이 가문이다.
고품질의 마도구와 아티펙트를 쉴새 없이 공급해주는 우량고객에겐 VIP 대우를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
“에아 사달멜리크는 어디 있지?”
“자리를 옮겨서 말씀 나눌까요? 마차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빨리 가지.”
데네브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는 엘로아의 모습은 예상대로 격정적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하지만 데네브가 보기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100년간 현세를 떠돌아다니며 게헨나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던 그녀가 에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돌아왔다.
원거리 통신이 가능한 수정구와 원격편지도 있지만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겠지.
우아한 마차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엘로아는 데네브가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입을 열었다.
“에아 사달멜리크가 죽었다고? 정말인가?”
“먼저 유감을 표합니다. 작년 겨울 물병자리의 마녀는 메리골드 남작을 습격하기 위해 게헨나에 밀입국했고 남작과의 전투에서 죽었어요.”
그 순간 데네브는 보았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꿋꿋하게 버티던 엘로아의 표정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아마 믿지 못하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네브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럴 리 없다.”
“티페레트....”
“그럴 리 없네. 에아 사달멜리크는 집요하고 철저한 놈이야. 시신은? 시신은 발견했나?”
엘로아는 거의 데네브를 덮칠 듯한 기세로 몸을 기울이며 묻는다.
솔직히 좀 걱정됐다.
그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가볍게 주먹으로 마차를 때린다면 이 초호화 마차는 산사태에 휩쓸린 산장처럼 폭싹 무너질 테니 말이다.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메리골드 남작이 사용하는 자성마법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렸다는 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주 세세한 입자를 뿌려 타인을 간섭하는 입자 마법은 문자 그대로 상대를 조각조각 분해해 버린다.
당장 쌍둥이의 말을 듣고 그 자리로 달려간 데네브가 발견한 것도 상처하나 없이 시우를 껴안고 절규하는 아멜리아와 한 무더기의 꽃으로 변해있는 사달멜리크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전투는 압도적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 차이가 있는 상태에서 사달멜리크의 도주를 방임했다?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점들을 덧붙여 설명해주자 엘로아의 표정이 점점 구깃구깃 해졌다.
허무함과 분함이 섞인 거친 숨소리를 가까스로 갈무리하는 공작.
“사달멜리크와 전투를 벌인 마녀가 메리골드라고 했나? 직접 만나봐야겠네. 도저히 그 간악한 여우년이 죽었다는 걸 믿을 수 없네. 만남을 주선해주게.”
엘로아의 말투에는 이대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정념이 이글거렸다.
반면 데네브는 난처했다.
메리골드 남작이 어떤 상태인지 소피아로부터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견습마녀 시절 살던 오두막에 처박혀 명백한 축객령을 내린 채 은거.
정황상 그녀의 짝사랑이던 노예와 모종의 이유로 결별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하니.
“그게....”
데네브는 망설였지만 엘로아는 절대 포기할 눈치가 아니다.
만약 말린다면 직접 수소문해서라도 멋대로 메리골드를 찾아가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데네브가 약속을 잡아주는 편이 두 사람을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
“후우... 네, 지금 곧바로 가보죠.”
“고맙네.”
마차는 덜컹이며 아멜리아가 사는 굴피나무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
단조로운 일상이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일상이기도 했다.
시우가 떠난 이후 아멜리아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일을 했다.
마법 연구에 몰두해 슬픔도 아픔도 모두 묻어버리는 것.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무언가에 매몰되는 것.
따뜻한 색감으로 가득했던 오두막에서의 행복한 생활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전처럼,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세상 속에 남겨져 감당할 수 없는 것에서 도망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떠오르고 만다.
원망에 젖었던 그의 눈초리가.
배신감에 사무치던 그의 목소리가.
아멜리아는 종이를 펼쳐 들고 떠오른 마법식을 적어 내려갔다.
만약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지금까지 알아 왔던 것을 백지에 처음부터 적어 내려간다.
조금의 사고력이라도 남아있다면 전부 소진해야만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힘들어할 시간이 없어질 테니 말이다.
스승님이 돌아가신 시기에도 이랬다.
아멜리아는 그 덕분에 조금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고, 그녀를 애타게 부르는 슬픔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분명 똑같은 상황임에도, 분명 같은 방법임에도 완벽히 무감각해지고 전부 잊어버릴 수 없었다.
마법 연구에 몰두하며 잡념을 억누르다가도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한 사람이 너무나도 뚜렷이 떠오른다.
신시우.
구깃.
가슴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과 함께 아멜리아가 붙잡고 있던 하얀 종이의 모서리가 일그러졌다.
“.......”
아직 체력이 남아있어서 그렇다.
머리가 하얗게 백지가 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서 그렇다.
아멜리아는 다시 빈 종이를 잡고 그 위를 채워가려던 중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을 느꼈다.
“제가 먼저 허락받고 올게요.”
“아닐세, 내가 직접 가겠네.”
무표정했던 아멜리아의 이마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분명 그 누구도 찾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두었거늘.
짜증이 났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그저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것마저 이뤄지지 않는가?
오두막의 문이 벌컥 열리며 두 여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제법 익숙한 얼굴의 제머나이 데네브, 또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분홍빛 머리카락의 마녀였다.
“무슨 일이죠?”
아멜리아의 입에서 쌀쌀맞은 물음이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데네브도 그것을 알고는 있던 것인지 몹시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양해를 구했다.
“갑작스레 찾아와 정말 죄송합니다. 에아 사달멜리크에 대해 꼭 묻고 싶으신 점이 있다 하셔서....”
데네브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아멜리아보다도 작은 체구의 마녀가 쏙 튀어나와 말했다.
“메리골드 남작, 허가 없이 찾아와 미안하네. 에아 사달멜리크와 격돌했던 날의 일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대신 전해드리자면 이분은 티페레트 공작이셔요.”
오죽 마음이 급했는지 자기소개도 없이 불쑥 본론으로 들어가는 엘로아와 그녀를 대신 소개하는 데네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아멜리아는 왜 그녀가 이곳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티페레트의 견습마녀가 물병자리의 마녀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소문에 둔감한 아멜리아조차 아는 대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아멜리아의 눈에 서렸던 적의가 누그러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은 아멜리아도 알고 있다.
아멜리아는 티페레트와 데네브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차를 내오겠어요.”
3.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제 눈으로 확인했어요.”
“........”
아멜리아는 나름 성의를 담아 그날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시우의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따금 가슴이 쿡쿡 쑤셔오긴 했지만 말이다.
예상대로 공작은 에아가 정말 죽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죽었는지를 듣고 싶어 무리해 아멜리아를 찾아온 모양이다.
그 심정도 이해가 갔다.
단 한 번 있는 복수의 기회.
어쩌면 허무하기 그지없는 끝일지라도 아멜리아가 가로챈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는 아멜리아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던지라.
“유감이에요.”
라는 말을 끝으로 위로를 끝냈다.
티페레트는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혹여 잠깐 시선에서 놓치거나 특이한 낌새를 발견한 적은 없는가?”
“없어요.”
“환혹 계열 마법에 빠져 있었거나 공간 이동을 사용한 듯한 낌새는?”
“없었어요.”
“그렇나.... 고맙네.”
기운이 빠진듯 비틀거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한 엘로아는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곧고 날카로웠던 눈매는 불쌍할 정도로 내려 앉았고, 귀족의 귀감이라 불려 마땅했던 위엄 있는 음색마저 병자의 것처럼 쇠약하다.
엘로아는 터벅터벅 오두막을 나섰고 테이블에는 데네브와 아멜리아만이 남았다.
데네브는 차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티페레트 공작께서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으셨을 거예요.”
“알고 있어요.”
“저대로 두었다간 멋대로 방문할 것이 눈에 선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동행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담담하게 용서하는 아멜리아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아니 괜찮은 게 아닌가?
데네브는 인사를 끝으로 오두막을 나서며 과거 아멜리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았다.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처음 쌍둥이를 맡겼던 당시 살아있는 인형처럼 보였던 아멜리아.
같은 마녀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인간적인 감정이 배제된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났더랬지.
그에 반해 신시우의 소유권을 양도받기 위해 두 번째로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는 훨씬 생기가 넘쳐났다.
비록 떨떠름함과 옅은 분노라는 마이너스적인 감정이긴 했지만 분명히 희로애락을 느끼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금 모습이 어느 쪽에 더 가까우냐를 꼽으라면 말할 것도 없이 첫 만남 때의 모습일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조금만 톡 건드려도 면도날처럼 손가락을 베어버릴 것 같은 냉랭함이 은연중 묻어나왔다.
“낙심하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데네브가 아멜리아의 보모도 아니고 그녀의 상태를 꾸역꾸역 보살펴 줄 필요는 없다.
데네브는 곧장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엘로아에게 다가갔다.
“이제 어쩌실 예정인가요?”
“....모르겠네.”
“저택에 자리를 마련해 드릴 테니 조금 쉬어가시는 건 어떠신가요?”
“괜찮네, 아직 해야 할 일도 있고. 적기사를 놓쳤어. 놈이 다시 공간도약을 하기 전에 잡아 죽여야 하네.”
“바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지.”
데네브가 느끼기에 엘로아는 무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법 연구조차 포기하고 복수를 위해, 그리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슬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100년 동안 달려가던 목표 중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공허함과 허무함이 몸을 짓누를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 즐거웠네.”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을 텐데.
그런 심정을 품고 데네브는 물었다.
“...어디로 가실 예정인가요?”
“한국.”
엘로아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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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Lin님이 그려주신 시우에게 맴찢당한 아멜리아 입니다!
주변의 풍경이나 속상해 하는 모습이나 제가 머릿속에 그리던 그림을 똑같이 연출해주셨어요!
압도적인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