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1.
알타이 산맥.
몽골어로 ‘금의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산맥은 고비사막에서 시작되어 서시베리아 평원까지 1600km에 거쳐 이어지며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 중국까지 4개의 국가를 남동에서 북서로 가로지른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삐뚤빼뚤한 강이 광활한 대지 위를 누비면, 그 옆에는 드문드문 자라있는 자작나무와 낙엽송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거센 바람에 비질하는 소리를 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찌르는 산꼭대기는 모자처럼 만년설을 얹고, 산줄기를 따라 길들지 않은 비탈길에는 야생 염소들이 뛰놀고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신을 찬미하게 될 자연의 장엄함 속에 키가 작은 여자가 서 있다.
성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외관은 막 성인이 된 듯 숙녀라기 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앳된 외모.
다만 누구든 그녀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소녀의 체모와 눈동자가 알타이산맥의 자연경관 이상으로 신비롭기 때문이다.
연한 복숭앗빛의 탐스러운 장발과 자홍색의 눈동자는 사람을 홀리는 여우의 것처럼 요사스럽다.
요사스러운 것은 소녀의 외모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유목민들의 거주지까지 직선거리로 수십 킬로미터는 나아가야 하는 험지이다.
한데 그녀는 마땅한 가이드도 없이,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빙하가 녹아내린 차디찬 호수의 수면을 밟은 채 서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몸보다 긴 새하얀 검을 들고 있다면 그 기묘함은 배가 될 테지.
“........”
그런 그녀의 주위로 마력의 파동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눈꼬리에 매달리는 자홍색의 마력 반사광.
농밀한 마력의 분출에 잔물결 하나 없이 거울 같던 수면이 폭풍을 마주한 듯이 흐트러졌다.
조그마한 구 형태로 그녀에게서 확장되기 시작한 이면결계는 점점 주위의 풍경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10M, 20M, 100M, 500M, 1KM, 5KM, 10KM.
아무리 케테르 공작이 간소하게 보급한 이면결계라해도 이 정도의 규모로 펼치게 된다면 많은 마력을 소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귀여운 인상이 무색하게 애교 없이 곧게 뻗은 눈썹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왔구나.”
작게 중얼거린 소녀가 수면을 박찼다.
마치 어뢰라도 터진 것처럼 폭음을 내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호수.
놀랍게도 그건 어떤 마력 작용도 아니었다.
분홍빛의 소녀는 그저 수면을 힘껏 박찼을 뿐이다.
순전히 다리에서 생겨난 각력이 그만한 물리법칙의 폭거를 일으킨 것이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백 미터에 달하는 호수를 뛰어넘은 소녀의 몸이 목적지를 향해 쇄도한다.
한 발짝 한 발짝 뻗을 때마다 폭발하듯이 터져나가는 지면.
음속을 돌파한 전력 질주는 그저 스쳤을 뿐인데 애꿎은 낙엽송을 뿌리째 흔들고, 호수를 깨뜨린다.
10초가량 달리던 그녀는 들풀이 잔뜩 돋아난 고산 초원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녀에게 도망쳐 아공간 속에 몸을 파묻고 있던 호문쿨루스, ‘적기사’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
신장은 대략 2M.
그 이름에 걸맞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길할 정도로 짙은 붉은 갑주로 덮여있다.
멈춰선 소녀의 존재를 인식한 듯이 그녀의 방향을 힐끗 바라본다.
그렇게 부상을 입혀두었는데 아공간 내부에서 회복한 건지 벌써 멀쩡한 모습이었다.
대다수의 호문쿨루스에는 달리 이름이 붙지 않는다.
모든 개체가 제각각인 데다가 한 번 발견되면 곧장 사냥당하여 다시는 불리지 않을 고유명사를 일일이 붙여주는 것이 비효율적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있는 호문쿨루스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은 악명 높은 호문쿨루스라는 것을 뜻한다.
마녀와 인간에게 피해를 끼친 추방자에게 ‘공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처럼 저 흉측한 붉은 갑옷의 호문쿨루스에게는 ‘적기사’라는 고유의 칭호가 붙었다.
500년 전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견된 이래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망자를 만들고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찾아온 마녀를 일곱이나 역으로 사냥한, 창조의 마녀가 만들어 낸 괴물.
-철컥!
자신의 갑주처럼 붉은 창을 치켜드는 적기사.
동시에 투구 아래로 감겨있던 눈이 떠진다.
마치 상대를 비웃는 듯 기분 나쁘게 휘어있는 15쌍의 눈동자가 소녀를 향했다.
그 불길한 시선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녀는 검을 쥐었다.
-까득!
어마어마한 악력에 짓눌린 그립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지긋지긋한 놈. 여기서 결판을 내자.”
두 손으로 그립을 쥔 소녀의 몸이 비스듬하게 꺾인다.
‘계약’을 거쳐 신력에 달한 완력 앞에 하프소딩같은 인간의 잔기술은 필요 없다.
가진 모든 힘을 전력으로 때려박을 수 있는 예비자세만 필요할 뿐.
“계약한다.”
짧은 영창을 끝으로 순백의 검, 그 옆면에 요정의 문자가 떠오르며 계약의 명시를 시작한다.
계약 하나, 전신 근력의 증대.
계약 둘, 전신 근육의 순발력 증대.
계약 셋, 전신 근육의 유연성 강화.
계약 넷, 지불한 모든 마력을 단 한 번의 참격 변환.
계약 다섯, 상호의 간격을 무시.
계약 여섯, 검로의 모든 것을 벤다.
하나의 계약이 늘어날 때마다 배로 불어나는 마력의 중압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적기사도 수수방관할 생각은 없는 것인지 손에 들린 ‘붉은 가지’를 상대에게 겨누었다.
“베어주마.”
단단히 대지를 딛고 선 소녀의 다리는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안정감이 넘쳤다.
체중과 힘을 실어 몸이 뜨지 않도록 고정한 앞발은 진각이 되어 지축을 뒤흔들고 땅을 밀어내 추진력을 더한 뒷발로부터 토사가 폭발하듯 휘날렸다.
공간을 베어내는 듯한 일격.
너무나도 깔끔한 탓에 소리도, 바람도 없이 휘둘러진 검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소녀를 겨루고 있던 붉은 가지 끝에서 검붉은 결계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2.
거대한 규모로 펼쳐졌던 이면결계가 걷혔다.
가장자리부터 올가미를 조이듯이 작아질 때마다 참격이 만들어낸 파괴의 흔적이 수복되었다.
검풍의 후폭풍에 휘말려 모조리 날아가 버린 호수도.
참격의 범위에 걸쳐 치즈처럼 비뚜룸히 잘려나간 산맥도 모두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결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여느 때처럼 평화롭고 목가적인 고산초원의 모습.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은 무성의하게 자신의 예장인 ‘계약검’을 역 소환시키고는 혀를 찼다.
“쯧.”
또 놓쳤다.
수백 미터는 족히 떨어진 산맥과 함께 적기사를 베어낸 참격도 ‘붉은 가지’가 만들어낸 결계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도주를 생각하고 있었나...”
갑자기 아공간에서 튀어나왔길래 이제야 싸워줄 마음이 들었나 싶었는데.
적기사는 참격을 방어해낸 직후 차원의 틈새를 뚫고 사라져버렸다.
호문쿨루스에게는 차원을 넘나드는 고유한 능력이 있다.
비활동기에는 아공간 내부에서 잠적하다 활동기가 되면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깽판을 친다.
특히 ‘붉은 가지’가 지닌 왜곡의 능력은 그 도주 수단을 보다 정밀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인간형인 만큼 지능이 높은 적기사는 그것을 아주 적절하게 활용했다.
엘로아가 1년의 추적 기간 동안 적기사와 7번 격돌하고 7번 모두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수급을 취하지 못한 이유다.
싸움에서 이겨도 아주 조금만 틈새를 주면 쪼르륵 도망을 쳐버리니 말이다.
이번에도 무려 한 달간의 험지 생활이 무의미해져 버렸지만 엘로아는 그다지 큰 짜증을 내지 않았다.
도망친 사냥감은 다시 쫓으면 그만이다.
일반적으로 이 넓은 세상에서 특정 호문쿨루스를 추적하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엘로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5번째 격돌 이후로 추적할 수단을 마련해두었다.
12개의 ‘계약’ 중 하나를 소모해 적기사와의 계약을 끝내 둔 것이다.
계약의 내용은 ‘서로 간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
따라서 엘로아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적기사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수십 킬로미터 정도의 오차값이 존재하지만 수색의 범위가 좁혀진다는 것만으로 이미 희보다.
지금껏 수백 마리의 호문쿨루스를 사냥하며 얻은 경험상 호문쿨루스의 공간 도약에는 제약이 있다.
쿨타임이 존재하고 그 쿨타임은 도약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길어진다.
깨작깨작 공간을 뛰어넘어 도망치던 적기사가 이번엔 꽤 먼 거리를 한 번에 도망쳤다.
즉, 당분간은 얍삽하게 도망가는 것 따위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엘로아는 곧장 몸을 숙였다가 질주를 시작했다.
달릴수록 점점 가속되던 그녀의 몸은 거의 음속에 육박하며 분당 수 킬로미터 미터를 나아갔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엘로아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한동안 외진 곳에서만 생활하다 전파가 잡히는 곳으로 오자 그동안 밀렸던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
그리고 메일 제목을 확인한 공작은 그 자리에서 망연히 멈추어 섰다.
[티페레트 경, 게헨나에 침입했던 에아 사달멜리크가 아멜리아 메리골드 남작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공적 에아 사달멜리크 사망 알림]
[사달멜리크 사망]
비슷한 내용의 메일이 수십 개씩이나 도착해 있었다.
티페레트 공작은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위치포인트의 창립자였고 그만큼 호문쿨루스와 공적에 관한 모든 정보는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거기에 눈에 불을 켜고 에아를 족치려 하는 엘로아에게 에아에 대한 제보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우선순위가 높았다.
수십 통의 메일이었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동일했다.
100년 전 엘로아의 견습마녀를 죽인 공적, 에아 사달멜리크가 사망했다는 것.
사망?
그 바퀴벌레 같이 도망치던 년이.
손끝부터 잘근잘근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덜컥 죽어버렸다고?
엘로아는 자신을 간신히 지탱하던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두 장면이 떠올랐다.
유희를 허락해 달라고 떼쓰던 그녀의 견습마녀 ‘라피’에게 현세로 나갈 수 있게 허락해주었던 자신의 모습.
허름한 창고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라피의 몸을 껴안고 절규하던 자신의 모습.
그날 이후 맹세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견습마녀를 죽이고 그릇을 강탈해간 악적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살아갈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복수는 끝났다.
이미 죽은 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런 속죄도, 진혼도 하지 못한 채.
감정을 불태우는 것도, 진심으로 분노할 권리도 빼앗긴 채 덜컥 끝나 버렸다.
“라피... 라피....”
다리에 힘이 풀린 엘로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사랑하는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한동안 멍하니 중얼거리던 엘로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뜬소문일지도 모른다.
당장 진위를 판별해야 한다.
엘로아는 게헨나로 돌아가기 위해 시민증을 꺼내 들어 마력을 주입한 이후 인근의 푸른 강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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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팬아트를 받았습니다!
그 정체는... 무려 멘탈박살난환쟁이 님이 두 번째로 그려주신 델라 레드클리프 입니다!
전부터 느꼈던 건데 참 살짝 무서운 여성분들을 정말 잘그려주시는 구나 싶었습니다!
또 한 장의 팬아트는 공지의 팬아트 갤러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