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1.
잠깐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얼굴만 보였다.
샤워하고 나왔을 때처럼 복숭앗빛으로 살짝 상기된 두 뺨과 어디를 향할지 모르며 애매하게 떠도는 눈동자.
이제는 알겠다.
샤론은 지금 시우만큼이나 어색해하고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별 건 아니야.”
“뭔데?”
[해피 할로윈! 널 위해 마녀 의상을 준비했어!]
[오우 퍽!]
그나저나 저 영화 속 배우는 무려 5분 가까이 떡치고 있다.
둘이 1년 동안 이것저것 좋은 시간 보냈다는 걸 여러 특별하고 코믹한 이벤트로 쓱쓱 보여주는데.
하필 이런 타이밍이니 신경 쓰여 죽을 것 같다.
샤론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영화에서 보면... 키스하다가 자연스럽게 성교로 넘어가곤 하잖아. 저 영화처럼.”
“그렇지.”
키스 이후에 달아오른 남녀가 몸을 섞는 장면은 거의 고정적으로 나오긴 한다.
하지만 샤론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혹시 대답이 제대로 안 들렸나 싶어 다시 대답하는 시우.
“그렇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샤론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근데 이런 거 물어보는 게 실례인 것 같기도 해서.”
“가까운 사이면 별문제 없지 않나?”
“그런 거야?”
“음... 아마도?”
그래도 뭘 물어볼지는 대충 예상이 가고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답해줄 수 있다.
“음... 그럼, 너도 해봤다는 거지? 저거.”
샤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리킨 화면 속에서는 때마침 여자친구의 질내에 힘껏 사정하는 남자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응.”
“그렇구나. 뭔가 어른 같네 갑자기.”
샤론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대응해 마찬가지로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시우.
“그럼 키스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타이밍도 자연스럽게 느끼게 돼?”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딱 쌍둥이랑 성교육할 때의 모습 같다고 하면 착각일런지.
그걸 의식하자마자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그녀의 가슴골로 눈이 간다.
시우의 물건을 넉넉하게 감싸고도 남을 것 같은 윗 가슴은 어스름한 빛을 반사하며 은은하게 광택을 띠고 있다.
“어....음...응.”
그때 샤론의 눈동자가 시우의 시선을 따라 잠깐 가슴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분명 아주 순식간이긴 했어도 가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들켜버렸다.
이걸 사과해야하나 고민하던 터에 샤론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슬그머니 시우 쪽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렇구나....”
그렇게 영화 상영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2.
“음......”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향유하는 사회인이라면 잠들었을 시각.
샤론은 침대 위에 앉아 깊고 깊은 고민에 잠긴 채 몸을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위해 깨어있던 것은 아니다.
오늘 델라와의 전투 이후 시우를 치료하는 바람에 텅텅 비어버린 낙인에 마력을 다시 보충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통상 마녀의 낙인 내부에 저장된 마력은 농도가 짙다.
이렇게 농도가 짙은 마력은 주위의 마력을 끌어들이는 성질이 생긴다.
이 성질을 이용해 외부의 마력을 낙인 내부로 들이고 정제해서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놓는 것이 ‘자기화’ 과정.
지금 낙인이 텅텅 비어있는 만큼 마력을 끌어들이는 힘도 약해졌다.
전부 채워두려면 느긋하게 잡아 2주 정도는 걸리겠지.
가장 큰 돈줄인 호문쿨루스 사냥을 위해서는 마력이 필수적이고, 마력수 등 마력을 보충할 수단이 없었기에 샤론의 상황은 결코 좋지 못했다.
멍하니 앉아 2주가 날아가게 생겼으니 말이다.
“에효.... 어쩌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샤론은 매트리스가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델라 때문이었다.
마력을 어느정도 회복하고 다시 호문쿨루스 사냥에 나선다고 해도 지금까지 사냥해오던 구역이 델라에게 넘어갔다.
그 고약한 년의 성깔이라면 필요도 없는 사냥터를 붙들어 매고 샤론이 침범할 때마다 으름장을 놓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샤론을 괴롭혀 온 것도 모자라 시우까지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제일 서러운 것은 이렇게 화나는데도 당장 그녀를 찾아가 뭐라 할 수가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떠나야 하나...”
서울은 샤론이 현세로 처음 나왔을 당시 정처 없이 이동하다 운 좋게 정착한 곳이다.
정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만큼 생활이 익숙해진 곳은 없다.
또 새로운 장소를 찾아 사냥터를 잡고, 거처를 마련하고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상납금이 밀려 이자가 데굴데굴 불어날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샤론이 지금껏 갚아온 돈보다 액수가 커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시우와 떨어져 지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자리를 잘 잡은 그에게 빚 때문에 같이 떠나 달라고 부탁할 염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부 사실대로 말하기에는 돈을 대신 갚아달라는 암묵적인 신호로 보일까봐 꺼림찍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외로워졌다.
“어쩔 수 없네...”
일단은 시우를 어떻게든 떼어 놓고 몰래 사냥해야겠다.
만약 델라에게 걸린다면...
분하지만.
정말 분하지만 자비를 구걸하거나 그녀가 제안했던 수상쩍은 아르바이트에 응하는 수밖에.
“하아....”
다시 한번 깊은 한숨.
널찍한 방 안이 너무나도 답답하게 느껴졌기에 샤론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바로 맞은 편 시우의 방으로 슬쩍 들어갔다.
이상하게 시우와 함께 뭔가를 할 때면 잠깐이나마 힘든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 아우라라도 흐르는 건지 복잡한 현실을 잊고 속 편하게 있을 수 있다.
탱자탱자 놀다가 이번 분기 납부금 마련을 소홀히 할 정도로 말이다.
“쿠우......”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아까 샤론이 그를 간호할 때 놓았던 의자가 그대로 있었기에 깨우지 않게 신경 쓰며 슬쩍 걸터앉았다.
시우의 가슴이 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낫네.”
오늘은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든 날이었다.
델라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해 쓰러진 시우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혔고.
그럼에도 샤론을 위해 거짓말해주는 시우를 보며 고마운 마음에 눈물을 쏟았다.
샤워하며 그를 떠올리자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고양된 이상한 박동이었다.
한 번 이상해진 고동은 샤론이 일하고 들어온 순간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가 고맙다는 말을 할 때도 평소보다 살짝 빨리 뛰었고, 밥을 먹으려고 마주하는 순간에도 빨리 뛰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카메라 필터가 바뀐 것처럼 다르게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예전부터 시우가 이따금 가슴을 보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딱히 음흉한 시선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쑥스러웠다.
그 탓에 괜히 평소에 불편해서 싫어하던 브라까지 찬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고보니...”
샤론은 오늘 영화를 보던 중 키스는 어떻게 하게 되는거냐 물었을 때 시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심장이 뛰어.’
샤론은 잠자코 자신의 가슴 사이에 손을 얹었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
온몸에 혈액을 보내주는 고동이 여느 때보다 아주 조금 빨리 뛰고 있다.
겨우 시우의 방에 들어왔을 뿐인데 말이다.
“뛰네....”
샤론은 곤히 잠든 시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다음은 시우가 이렇게 말했었지.
‘그다음엔 그냥 입술만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먼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일단 시도해보는 거지.’
샤론의 눈길이 또르륵 시우의 입술로 흘렀다.
전체적으로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다.
조금씩.
심장이 빠르게 뛴다.
그럼 자신도 그와 키스하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걸까?
“....어떤 기분일까?”
영화로는 이미 익숙했다.
감동적이거나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며 까치발을 든 여자 주인공과 그 허리를 받쳐 든 남자.
바짝 맞붙은 두 사람의 얼굴 사이로 갑자기 조명이 강해지고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두 사람의 입술을 어슷하게 포개지고 이내 혀가 꽈배기처럼 꼬이면서 서로의 입안을 오간다.
윗입술이나 아랫입술을 빠는 경우도 있다.
“........”
샤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몰캉몰캉했다.
손을 옮겨 살짝 벌어진 시우의 입술에도 손끝을 가져다 대봤다.
조금 더 두꺼운 감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푹신푹신하고 탱글탱글했다.
신체 부위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한 번만.
아주 살짝만 닿아보는 건 어떨까?
샤론은 슬쩍 윗몸을 숙였다.
두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질 때마다 빠르고 크게 뛰는 심장.
떨리는 마음으로 몰래 키스를 시도하던 샤론은 1cm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우뚝 멈춰 섰다.
멈춰선 입술에 그의 숨결이 살랑살랑 닿는다.
샤론은 머리까지 울리는 심장 소리에 따라 콧김이 거칠어졌음을 느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의 방을 나섰다.
“으으, 괜히 뭔가 더 심란하네.”
현실의 문제를 잊으려 찾아왔는데 외려 이상한 충동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몰래 키스라니.
키스는 남녀 간의 중요한 행위이다.
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래 하는 건 비겁한 반칙이었다.
로맨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아까까지 그와 영화를 보던 소파에 대충 앉는다.
샤론은 자신을 다독이며 일부러 사고의 물꼬를 다른 쪽으로 텄다.
그래, 이 생각이 좋겠다.
“음.... 어쩌면 좋지?”
샤론을 위해 여러모로 열심히 힘 써준 시우.
반면 샤론은 시우에게 변변한 보상조차 해주지 못했다.
고작 대게와 치료.
대게 정도야 시우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마리씩도 시켜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샤론의 마법이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은 몸에 난 상처일 뿐이다.
마음에 난 상처는 그 어떤 마법으로도 치료해 줄 수 없다.
샤론을 위해 무리한 그를 위해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따라서 현세에 존재하는 아카식 레코드, 삼라만상의 비밀을 담은 구글에 접속했다.
“친구... 위로... 하는 법....”
서툰 타자로 검색을 해보니 쫘르륵 나오는 목록들.
과연 현세의 과학은 위대하다.
어지간한 것들은 이것 하나만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다.
“특별한 말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위로해 줄 것.... 위로에 앞서 상대의 감정을 고려해줄 것.... 상대방을 확인하고 지지해주며 해당 상황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줄 것....”
바보도 아니고 이 정도는 안다.
샤론이 대놓고 시우를 위로하기 난감한 것은 티가 나지 않게 위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그의 자존심에 2차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남자친구 위로해주는 법?”
그렇게 허울만 좋은 아카식 레코드를 뒤적거리던 중 뒤늦게 연관검색어를 발견했다.
한국에서 남자친구는 문자 그대로가 아닌 남자인 애인을 뜻한다.
시우와 샤론은 애인도 뭣도 아니다.
그래도 시우도 남자이니 어느 정도 도움은 되지 않을까?
“까짓거 보기나 하자.”
머리 쓰다듬어 주기.
안아주기.
키스해주기.
애교부리기.
예상대로 연인이 아닌 이상 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당장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안아주기라면 당장 오늘 낮에도 했고...
“어?”
그때 샤론은 한 질문 및 고민 상담 커뮤니티에 쓰인 글을 발견했다..
제목은 ‘남자친구가 너무 의기소침해요’.
내용을 간추리자면 임용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남자친구가 너무 속상해한다, 그러면서도 글쓴이에게는 티도 내지 않고 무리해서 웃는 통에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섣불리 위로도 못 해주겠다는 그런 내용.
완전 샤론과 시우가 처한 상황과 빼다 박았다.
“이거다!”
샤론은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황급히 답글을 보았다.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직방입니다]
동시에 잔뜩 기대했던 마음에서 피식 김이 빠졌다.
가슴은 무슨 가슴.
“바보 아냐? 그걸로 되면 세상에 고민하는 남자는 남아있지도 않겠다.”
하긴 말이 아카식 레코드지 인터넷에서 찾는 정보는 유용한 것도 많지만 쓸모없고 쓰레기 같은 것도 많다.
무성의하게 스크롤을 쭉쭉 내리던 샤론의 눈이 커진다.
[가슴이 최고예요 저도 남자친구 수능 망쳤을 때 ‘가슴 만지게 해줄까?’라고 했더니 좋아 죽던데]
그 아래로 또 비슷한 조언이 달려있다.
샤론은 충격받은 눈빛으로 다양한 답글을 읽어내렸다.
가슴은 바라만 봐도 기분 풀리지.
나도 인터넷에서 보고 해봤는데 효과 좋더라.
화날 때도 보여주거나 만지게 해주면 좋다.
여성의 가슴이 심리학 생물학적으로 남성을 진정시킨다.
등등 무수한 가슴 예찬론이 뒤를 이었다.
마지막 피날레는 글쓴이의 답변.
[감사해요^^ 여러분이 조언해주신 대로 했더니 남자친구가 엄청 좋아했어요. 기운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1년 더 옆에서 응원해 주려 합니다]
“진짜? 겨우 이걸로 된다고?”
샤론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폰 화면을 껐다.
그러고 보니 시우도 은근히 샤론의 가슴을 힐끔거렸었지.
대놓고 보거나 만지게 해주면 정말 위로가 되려나?
남자는 너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