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62화 (162/917)

#162

1.

옷만 갈아입고 오겠다던 샤론은 한 10분이 지나서야 거실로 나왔다.

“많이 기다린 건 아니지?”

“아니, 맥주나 좀 꺼내와 주라. 팝콘도 돌려놨어.”

“응!”

편의점에서 2000원에 파는 전자레인지 팝콘과 시원한 캔맥주.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무릎담요를 덮은 채 보는 영화는 극락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샤론처럼 예쁜 여사친이랑 함께 보는 영화란...

“웃챠!”

샤론은 팔걸이에 팝콘과 맥주를 놓고 털썩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당연하다는 듯이 거리가 가깝다.

돌핀 팬츠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앉았다.

“나 맥주 좀.”

“여기.”

여름이라 해도 에어컨이 워낙에 시원해 붙는다고 찝찝하지도 않고, 처음에야 신경 쓰였지 이젠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준이다.

시우는 맥주를 받기 위해 샤론 쪽으로 몸을 기울여 팔을 뻗다 무엇인가를 눈치챘다.

“.........?”

실내복 차림으로 돌핀 팬츠+나시티 조합을 선호하는 샤론.

가녀린 허리에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가슴을 지닌 샤론과 노브라 나시 티의 조합은 그간 시우에게 파괴적인 문화충격을 안겨 주어왔다.

샤론이 작게 움직일 때마다 출렁출렁 변화하는 가슴의 모양과 툭 튀어나온 젖꼭지가 거의 필터링 없이 보여졌으니 말이다.

다른 건 다 익숙해졌지만 그것만큼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적당히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체해 왔다.

시우가 대놓고 '거 남사스러우니 집안에선 브래지어 좀 입어 주시오!’라고 말할 만큼 호방한 성격도 아니고...

그런데 오늘 샤론은 갑자기 검은 나시 티 아래 검은 브래지어를 입고 있다.

아마 어깨끈 색깔을 맞춘 모양이다.

툭 튀어나와 존재감을 과시하던 꼭지 대신 브래지어 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시우가 멈칫하는 모습에 샤론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어딘가 쑥스럽다는 듯이 묻는 샤론에겐 시우의 반응을 의식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괜히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 팔뚝을 쓸어내렸으니 말이다.

“........큼.”

“흐음.....”

시우는 괜히 타는 목을 맥주로 축이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왜 이제 와서 브라를 했을까?

시선을 피한다고 피해왔는데 너무 힐끗거렸나?

굳이 난감한 부탁을 할 필요도 없이 신경 쓰이던 구석이 사라졌으니 다행이라는 마음이 3할.

‘왜 샤론이 갑자기?’라는 의문에 불편한 마음이 7할이다.

“....그, 아무래도 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랬어.”

“응?”

“그... 속옷 입은 거 있잖아. 여태껏은 안 입었는데 갑자기 입은 거. 혹시 다르게 생각할까 봐.”

샤론은 그런 시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민트빛 눈동자를 슬쩍 돌리며 말했다.

시우도 표정과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타입이다 보니 금방 티가 난 것이다.

“어, 그래.”

시우의 단답으로 끝맺음한 대화 뒤에는 맥주를 홀짝이는 건조한 소리만이 한동안 들려왔다.

뭐지 이 숨 막힐 듯한 어색함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

다행히 샤론이 먼저 운을 띄워주었다.

“근데 오늘은 무슨 영화야?”

“아직 못 골랐어. 원래 이런 거 잘 못 해서.”

“그럼 그냥 대충 보자.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럴까?”

띡띡 리모컨을 눌러 되는대로 영화를 골랐다.

원래는 전쟁 영화나 서스팬스를 고르려 했는데 서두르다 보니 전혀 예정에 없던 장르를 골라버렸다.

딱히 이름도 들어본 적 없고 특별히 명작으로 분류되지도 않을 것 같은 로맨틱 코미디였다.

시우와 샤론은 와그작와그작 팝콘을 씹어먹으며 영화관람을 시작했다.

“........”

“........”

시우는 영화 상영 15분도 지나지 않아 직감했다.

왜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초반 장면과 플롯이 흘러가는 것만 봐도 이건 재미없겠다 재밌겠다 판별할 수 있는 직감 말이다.

1차 평가에 의하면 시우의 초이스는 완벽한 실패였다.

배우들도 연기를 더럽게 못 하는데 심지어 남녀가 얽히게 되는 사건 자체도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이 이후로는 하품을 참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샤론은 그런 거 없이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시우야.”

“응?”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는 주제에 시작한 지 15분 만에 등장하는 진득한 키스씬.

그걸 보며 시우는 일말의 기대도 접었다.

남자 주인과와 여자 주인공이 졸업 파티에서 달라붙어 끈적하게 키스하는 것을 보던 샤론이 문득 시우를 불렀다.

시선만을 슬쩍 돌려 옆을 보니 샤론도 곁눈으로 시우를 바라보고 있다.

스크린의 불빛을 제외하고는 어두컴컴하기에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는데, 어째 얼굴이 좀 벌건 것 같기도 하고.

“넌 키스 해봤어?”

“갑자기?”

뜬금없는 샤론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이제 여심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시우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샤론이 이 타이밍에 이런 질문을 꺼내는 의도는 알아채기 힘들었다.

왜냐면 그간 샤론과의 동거에서 확신한 것은 ‘아! 샤론은 남녀관계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날 남자로 의식하지도 않구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호기심 탓일 테지.

그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샤론이 뒤따라 말했다.

“지금까지 영화 보면서 주인공끼리 키스하는 건 엄청 봤는데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 혹시 경험자이면 물어보려고.”

경험자라...

우선 기억나는 사람만 해도 넷이다.

아멜리아, 오딜, 오데트, 예빈.

갑자기 게헨나에서 생각보다 복에 겨운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감상이 들었다.

“해봤지.”

“역시 그렇구나...”

어쩐지 의기소침하게 들려오는 샤론의 목소리.

“역시는 또 뭔데?”

“그냥, 뭔가 너는 키스 장면 볼 때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보잖아.”

딱히 샤론이라고 주먹을 꽉 쥔 채 눈을 반짝거리며 보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중요한 건 그녀가 왜 이 말을 꺼냈느냐다.

“아 맞아.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뭐냐면.”

“응.”

“키스는 언제 하는 거야? 영화랑 똑같아?”

“영화랑 똑같냐니?”

샤론도 그간 보고 들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아직도 모호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 애인과 오랜만에 재회했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아니면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 로맨틱한 BGM을 배경으로 키스를 나눈다.

“키스는 두 사람끼리 하는 거잖아.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키스를 시작하더라고 혹시 ‘이거다!’ 싶게 느낌이 오는 거야? 아니면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항 같은 게 있는 건가 해서.”

그러나 꼭 그런 ‘중요한 순간’에만 키스가 나오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냥 만나자마자, 아니면 밥 먹다가, 자기 전에 등등.

일단 연인이라고 분류된 등장인물들은 온갖 일상 속에서 서로 혀를 물고 빨고 하는 것이다.

“음....”

어느새 영화는 뒷전이 된 채 시작된 대화.

시우는 샤론의 질문이 쌍둥이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새하얀 무지에서 나오는 호기심.

감정에서 비롯한 문제를 이성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구분하려는 시도라고 해야 하나?

“너는 어땠어?”

“나?”

첫키스의 경우 오딜이 덮치다시피 했으니 배제하고, 오데트와 했던 키스도 사랑의 묘약에서 기인한 속박 키스였다.

그럼 아멜리아와 예빈이 남는다.

아멜리아의 경우 울며 사과하는 그녀를 껴안다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포갰고, 예빈과 키스할 때는 ‘섹스 전에 키스 먼저 할까요?’라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서 했다.

“흠....”

그중에서 샤론의 질문에 부합하는 케이스는 딱 하나.

아멜리아와의 키스다.

괜히 가슴이 따끔거리네.

억지로 신경쓰이는 것을 무시하고 그 순간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꽃다발을 보면서 ‘이것이 꽃다발이다’라고 인식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정작 ‘몇 송이의 꽃부터 꽃다발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어렵네. 뭐랄까 그냥 하고 싶다고 느껴져.”

“어떤 게 느껴져?”

더군다나 뭔가 대화 주제가 참...

로맨스 영화를 보다가 이런 주제로 대화하는 게 낯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샤론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시우로선 상당히 뻘쭘했다.

“심장이 뛰어.”

“심장? 설마 두근두근 뛰는 거야?”

“응.”

샤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어째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모습이다.

“그다음엔 그냥 입술만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먼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일단 시도해보는 거지.”

“시도? 그럼 상대방 의사는?”

“글쎄 그 부분부터는 나도 잘 모르겠네. 생각해보면 ‘어쩐지 상대도 원하고 있을 것 같다’라는 촉이 오긴 왔던 것 같기도 하고.”

비록 낯간지러운 대화 주제였지만 유달리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샤론의 질문에 시우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확신이 없었으면 하지 않았을 거야?”

“안 했을 걸?”

“흐음... 남녀 관계는 영화보다 어렵구나.”

어렵지.

시우도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공식화할 수도 없는 복잡한 것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그것으로 일단 대화는 끝났다.

영화 내용을 보지도 않은 채 한참 시간이 흘렀지만 그냥 보기로 한 두 사람.

시우의 경우 애초에 영화 내용에 별 흥미가 없었고, 샤론은 시우의 대답을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츄릅...츄르르릅... 오우... 츕]

[하아....쯉쯉 헤룹헤룹]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득한 키스씬이 또 나온다.

화면에 시선을 두지 않고 골똘히 고민하던 샤론도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까 시우가 알려준 내용을 배경 삼아 정밀분석에 들어간 옆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느낌상 이건 키스로 끝날 것 같지 않단 말이지.

[오우, 퍽예~]

그간 로맨스 영화로 다져진 시우의 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키스를 하더니 곧바로 현관 합체하는 남녀.

성인용 로맨틱 코미디라 그런지 여자 가슴과 남자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배드씬이었다.

처음엔 샤론과 이런 장면을 보는 게 꽤 어색했었는데 어디 섹스 나오는 영화가 한둘이어야지.

정작 샤론이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기에 시우도 괜히 설레발치지 않은지 꽤 됐다.

물론 평소에도 갑자기 대화가 멎으면서 살짝 어색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힐끗 샤론을 보자마자 알아차린 사실이었다.

무릎을 껴안는 자세로 앉아있던 샤론이 그사이에 반쯤 고개를 묻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시우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오늘따라 가까이서 느껴지는 체취.

어스름한 TV의 조명이지만 이 거리라면 샤론의 모든 것이 보인다.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색상의 눈동자.

과장 조금 보태어 시우의 반쪽만 한 얼굴에 어디 하나 흠잡을 수 없는 이목구비.

긴 속눈썹과 옆으로 삐친 잔머리까지.

새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건 아니야.”

거절하려 했다.

시우는 지금 이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섣부르게 변화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질문은 어쩌면 관계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모종의 사건으로 샤론과 친구 사이가 아니게 되거나, 데면데면하게 된다면 꽤 속상할 것 같거든.

“뭔데?”

입에서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말은 본심보다 조금 더 용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