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160화 (160/917)

#160

1.

“후우....후우...후욱....!”

치열했던 접전이 끝났다.

몸을 감싸고 있던 그림자가 녹듯이 사라지고 시우는 털썩 쓰러졌다.

불꽃과 계속 마주했던 상반신은 땡볕에 온종일 서 있던 것처럼 화상을 입어 따끔거린다.

지면에 짓눌리는 광대뼈, 부서질 듯 잔 경련이 일어나는 근육.

혹사당한 마력 회로와 왼눈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

싸움이 끝나고 혈중 아드레날린 수치가 내려가자마자 온몸 곳곳이 비명을 질렀다.

“...시발.... 해치웠나?”

다시 한번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신들린 분전이었다.

장례식에 틀어놓을 매드무비가 하나 더 늘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시우가 판단하기에 이 승리에는 ‘운’이 아주 크게 작용했다.

압도적인 마력 앞에서는 아무런 쪽도 못 쓰는 시우의 상대가 우연히도 슬로우 스타터였다.

또 그 스타트를 아예 시작도 하지 못하게끔 디스펠할 수 있는 원거리 공격수단이 있었다.

거기에 이미 샤론과 격돌한 이상 어느 정도 소모가 있는 상대였다.

특히 승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우의 눈이다.

마법전은 체스와 비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마법전에서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우의 좌안은 ‘상대의 다음 한 수’를 예측할 수 있는 치트키나 다름이 없다.

결론적으로 델라를 계속 몰아붙여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도, 그녀의 중계식을 쉽게 디스펠 한 것도, 마지막 순간 두 번에 걸친 델라의 반격을 저지할 수 있던 것도 오롯이 이 눈 덕택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슬슬 이름을 붙여줘야겠다.”

좀 멋진 이름으로다가 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일본 만화 보면 여러 가지 있지 않은가?

만화경 머시기니 직사의 머시기니 하는 것들.

얼굴이 익으면서 뇌까지 익어버렸나.

실없는 생각들이 꾸물거렸다.

시우는 몸을 돌려 벌러덩 대자로 누웠다.

“크하....”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죽을 것 같다.

비록 갑주의 보조가 있었다지만 거의 20분가량 검을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그러면서 수시로 델라의 마력을 체크해야 했고 동시에 리본을 움직여 공중에 떠오른 마법진도 파훼해야 했다.

쉴 새 없이 빨려 나가는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거듭 증폭을 30번은 사용한 것 같다.

아무리 튼튼하고 회복이 빠른 영체라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이 정도까지 몰아붙이면 무리가 오는 것이다.

“끄으윽....! 샤론.”

애벌레처럼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시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샤론이 길바닥에 쓰러져있다.

입 돌아가기 전에 부축해서 일으켜야 하고 델라도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마력을 회복해 역습을 가해올지 모르니 말이다.

“샤론, 야!”

이면결계가 천천히 걷히며 파괴되었던 것들이 역재생하듯 수복되는 것이 보인다.

사실은 수복된다기보다는 원래 복사되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원본을 불러오는 게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지.

시우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샤론을 주워들고 뺨을 톡톡 두들겼다.

근데 반응이 없다.

가슴이 커서 그런가?

상체만 일으켜 세우려는데 어찌나 이리 무겁게 느껴지는지 한참이나 낑낑거리던 사이.

반대편 인도로 날아간 델라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큭...크윽....”

“이런.”

시우는 의식이 없는 샤론을 굴다리 벽면에 기대어 둔 채 다리를 질질 끌듯이 델라의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을 나뒹군 탓에 흐트러진 옷차림, 델라가 힘겹게 눈을 떴다.

리본에 얻어맞은 옆구리가 아픈지 고아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부여잡고 있었다.

근데 별로 안 미안하다.

“제가 이겼네요.”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시우를 본 델라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일 뿐 마력을 모두 소진하고 체력까지 죄다 빠져버린 델라에겐 달팽이처럼 몇 cm 움직이는 것이 한계였다.

“내가... 졌어요... 원하는 게 뭐죠?”

오만했던 눈동자가 자신감을 잃고 좌우로 떨린다.

마치 연쇄살인마라도 마주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겨우겨우 운 좋게 때려잡은 마녀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머쓱하다.

시우가 미친 살인마도 아니고 하물며 공적도 아닌데 설마 저항도 못 하는 상대 막타를 치겠는가?

그러나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적당히 무서워해 주는 쪽이 대화 진행이 편하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델라 레드클리프 마녀님이라고 하셨죠?”

“...남작....”

“네?”

“델라 레드클리프 남작이요...”

갑자기 끼어들어 자기소개에도 없던 남작을 기어들어 가듯 덧붙이는 델라.

잠깐 어안이 벙벙했던 시우는 그 의중을 파악했다.

‘난 남작이니까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난다?’라는 은근한 어필인 것이다.

위세 등등하던 그녀가 이러게 쭈구리가 된 모습을 보니 조금 웃기기도 하고 뭔가 통쾌하기도 하고...

“아하, 남작님이셨네요.”

그녀가 공적이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뭐 애초에 제머나이 백작가의 체면을 생각해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말을 했으니 에아처럼 무도한 추방자일 확률은 낮았지만 말이다.

이로서 서로 타협의 여지가 생겼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네....”

“특별히 남작님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녀가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닐 경우 피곤해지는 것은 시우다.

죽여서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 싶었다.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리 저라도 제머나이 가문을 정면으로 등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비밀은 지켜질 거예요.”

델라는 절박하게 느껴질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을 꺼냈다.

델라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낙인을 지닌 남자 + 대마녀 전에 특화된 마법 구성과 전투력 +제머나이 가문의 반지.

이미 델라의 머릿속에서 시우는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진행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살인병기다.

혹은 공적과 호문쿨루스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낸 백작가의 사냥개.

그 사실을 여기저기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소한 대립 정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제머나이 백작가라 해도 진행하는 비밀 프로젝트의 정체를 까발려진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아무리 델라라도 대놓고 알비레오와 데네브 자매를 등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지금은 비밀 유지의 명목으로 어떤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런 말씀 기분 나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한편 그런 망상을 전혀 모르는 시우로서는 델라를 믿을 담보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백작가의 분노가 그렇게 무서웠다면 애초에 전투를 시작하질 말았어야지.

“계약서... 계약서를 쓸게요. 레드클리프의 명예를 걸고 그 어떤 사실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요.”

“음.....”

마녀의 사회에서 마녀 명을 건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딱히 마법적으로 뭔가 제약이 걸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수대에 걸쳐 쌓여온 자신의 마녀 명을 걸겠다는 것은 그만큼 무겁고 진중한 약속임을 의미한다.

게다가 전형적인 마녀인 델라라면, 그것도 귀족이라면 그 의미가 더 무거울밖에.

게헨나에서 5년을 사는 동안 마녀 명을 걸고 약속이 오가는 것을 보는 것은 3번 내외이니 말이다.

“예, 뭐. 그럼 써주세요.”

지금은 서 있기도 힘들고, 이 이상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도 토할 것 같다.

시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델라는 황급히 명함 하나를 꺼내더니 작은 글씨로 휘갈기기 시작했다.

대충 읽어보니 별건 없고 레드클리프의 이름을 걸고 시우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말과 델라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시우도 서명하고 대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가봐도 되나요?”

아까의 고압적인 태도는 어디 갔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는 델라.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전히 옆구리를 붙잡은 채로 비틀비틀 일어났다.

“아, 그리고.”

깜빡하고 말 안 할 뻔했네.

쩔뚝이며 걸어가던 델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우를 돌아본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 샤론 괴롭히지 마세요.”

“....네, 알겠어요.”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델라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후에는 도저히 정신을 잃은 샤론을 들춰 매고 집으로 돌아올 자신이 없어서 좌표이동식을 사용했다.

거듭 증폭 3번에 걸쳐 마력을 확보하고 이틀 밤을 샌 것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꾸역꾸역 연산을 끝내 함께 텔레포트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샤론을 침대에 눕혀둔 그대로 고꾸라져 정신을 잃은 것이다.

2.

“끄어.....”

시우는 괴상한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아직까지 느껴지는 격통과 두통은 순식간에 아까의 기억이 착각이나 꿈이 아니었음을 일꺠워준다.

아니 깨고 나서 격통을 느꼈다기보다는 이것 때문에 깬 것 같은데.

샤론의 침실이었다.

영체가 인간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금강불괴 수준으로 막 굴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피로를 느끼면 쓰러지듯 잠들거나 기절하기도 하는데 보통은 그 수준까지 몸을 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이는 시우의 사투가 얼마나 처절했던 것인지를 방증했다.

“엥?”

시우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따뜻한 간호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마에 올려진 미지근한 물수건.

옷을 입은 채 쓰러졌는데 지금은 상의가 벗겨져 영체가 되며 저절로 생긴 복근이 드러나 있었다.

아무래도 샤론이 치료를 위해 이렇게 해 둔 것 같았다.

“따갑네...”

아까처럼 붉은 기가 감도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상체가 화끈거린다.

특히 얼굴은 무슨 화학약품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따가웠다.

-딸깍!

“시우! 일어났어?”

문을 열고 물컵을 가져오던 중인 샤론은 반쯤 몸을 일으킨 시우를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왔다.

거의 말라 죽어 가던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듯이 쌩쌩해 보여 다행이다.

“어디봐 봐, 괜찮아? 특별히 아픈 곳은 없고?”

샤론은 시우가 아플세라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두 눈가에는 걱정이 눈물이 되어 그렁그렁 매달려있다.

“어, 너는 괜찮아?”

“윽...흑...미안해... 내가 미안해....”

격렬한 반응이 좀 당황스러워서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시우와 봇물이 터진 듯이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하는 샤론.

괜히 자신이 델라와 시비가 걸린 탓에 시우까지 상처 입고 말았다.

그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슴에 사무치게 울린다.

“나 때문에... 너까지 다치고....”

“야야, 민망하게 왜 이래. 힘들 땐 서로 돕는 거지.”

“흑...흐흑....미안해....미안해....”

“괜찮다니까.”

진짜 괜찮은데.

누가 억지로 끌고 간 것도 아니고 시우 자신의 의지였다.

더군다나 무참하게 패배한 것도 아니고 나름의 분전 끝에 성취감 가득한 승리를 쟁취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건 설명해줘야지.

“그 델라인가?”

“응... 그 썅년이 너한테 뭐라 했어? 다친 거 이외에는 나쁜 일 당한 건 아니지?”

“아, 그... 사실 내가 이겼어.”

“뭐?”

샤론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한다.

“마법으로 맞다이 쳐서 내가 이겼어. 앞으로 너 안 괴롭히겠다는 약속도 받았고.”

한동안 입을 쩍 벌린 채 시우를 바라보던 샤론이 별안간 시우를 끌어안았다.

시우는 앉은 자세 샤론은 선 자세였기에 얼굴 전체가 푹신한 가슴에 푹 파묻히게 되었다.

E컵의 볼륨은 과연 속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알아, 그래그래... 믿어.”

“아니, 진짜라니까?”

“응, 정말 믿는다고.”

샤론은 한참 동안 흐느끼며 시우의 얼굴을 가슴에 껴안고 꼭 안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