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1.
델라는 짜증을 느꼈다.
모처럼 뜨겁게 불타올랐던 욕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린 까닭이다.
이대로 샤론을 방으로 데려가 질펀하게 즐길 생각이었거늘 웬 날파리 한 마리가 끼어들어 초를 치다니.
델라가 리본의 위험을 인식하기전에 자율방어가 작동해 실질적으로 델라가 입은 피해는 전무했다.
그러나 그것은 범인의 감상일 뿐, 고귀한 육신을 허공에 내동댕이친 죄는 무겁다.
델라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
“........”
잠깐의 대치.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살피는 일종의 탐색이다.
델라는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의 모습이 마녀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갑옷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180을 훌쩍 넘는 키.
게다가 마법과는 별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전신을 감싼 플레이트 갑옷과 투구.
굳이 한마디로 축약을 하자면 흑기사.
이 표현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어떤 마녀가 저렇게 촌스럽고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겠는가?
저렇게 독특한 행색이라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으니 필경 어중이떠중이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델라의 태도에 한결 자신감을 붙여주었다.
“나는 델라 레드클리프, 이 결투는 정당한 사유로 벌어진 것이고 샤론 에버그린에 대한 처분 권한은 내게 있어요. 그러니 이 이상 방해한다면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실력 행사하겠어요.”
-화르륵!
말 맺음과 동시에 델라의 왼손에서 조그마한 불길이 일었다.
불꽃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그 형태는 아주 작고 은은하게 타오르는 잿불과 같다.
그러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마저 잿불 따위와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태우고자 마음먹은 것이 있다면 전소해 잿가루가 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 초고온의 불꽃인 것이다.
“.........”
하지만 시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목소리를 통해 시우가 남자라는 것이 밝혀진다.
운 좋게 상대 마녀를 따돌려 도망을 친다고 해도 밝혀진 진실을 훗날 시우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자기소개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그리고....”
그러나 시우의 고민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허공으로 날카롭게 휘둘러진 델라의 팔.
뭔가 온다.
-캉!
라고 생각했던 시우가 방어의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이마에 격통과 한 박자 늦은 열기가 내달렸다.
목이 뒤로 꺾이며 기껏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가 날아가며 앞머리가 그을리는 것이 느껴진다.
“크윽!!!”
착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샤론을 상처하나 없이 쓰러뜨릴 정도의 마녀.
도망갈지 싸울지를 선택하며 안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보이는 것이 예의.....”
타오르는 불길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와는 정반대로 차디찬 빙옥같은 인상에 실금이 갔다.
시우가 뒤늦게 그림자로 투구를 재생해보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니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남자?”
“하아... 텄네.”
“남자인데 마법을 쓰는 건가요?”
마력의 크기로 가늠했을 때 14 위계 혹은 15 위계 정도라고 생각을 했는데 설마하니 그 정체가 남자였을 줄이야.
델라는 드물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기한 거 보여드렸는데.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던 중 델라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시우의 존재는 분명 상식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델라의 입꼬리가 내려간 것은 마법적 탐구심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갑자기 튀어나와 샤론을 감싸는 남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손에 넣으려던 것을 이미 누군가 가로채고 있었던 것이다.
“빚 갚는다고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남총을 거뒀을 줄이야... 어지간히 헐거운 가랑이인가 보네요.”
그 빈정거림이 향한 대상은 시우가 아닌 쓰러진 채 기진맥진해 있는 샤론이었다.
샤론은 무언가 대꾸하려다가 힘이 다 빠졌는지 한숨만 푹 쉰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는 시우는 우선 대화를 시도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시우는 손을 들어 제머나이 가문의 반지를 보였다.
에아 때와는 달리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부담하며 정면 충돌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델라의 홍옥 같은 눈동자가 시우의 손을 흘낏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우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샤론만큼은 아니더라도 살짝은 자중하는 기색을 원했는데...
“그래서요? 고작 반지를 보고 알겠습니다 하고 꼬리라도 내릴 줄 알았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제머나이 백작님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 체면은?”
델라는 전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시우의 말허리를 끊었다.
“멋대로 내 사냥터에 넘어와서 선공을 가한 건 에버그린 쪽이에요. 더군다나 심하게 다친 것 같아 치료까지 해주려고 했죠. 갑자기 끼어들어서는 제머나이 백작의 체면을 봐서라도 신병을 양도해달라?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요?”
언뜻 보기에는 말이 돼도 조금만 자세히 뜯어보면 콧방귀가 나오는 말이다.
사람을 이 꼴로 조사 놓고 치료를 명목으로 데려가겠다고?
게다가 어떤 일이 있어도 시민권을 되찾고 싶어하는 샤론이 아무 이유도 없이 선공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더라도 한 달 가까이 함께해 온 샤론과 델라 중 신용이 가는 것은 당연 샤론 쪽이다.
“훗날 정황을 파악해 적절한 보상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돌아가도 좋아요. 다만 샤론은 놓고 가세요.”
이거 봐라.
나중에 적당한 보상을 지급하겠다고 말하는데도 굳이 집요하게 샤론을 놓고 가라는 것부터가 수상쩍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그럼, 방법이 없겠네요.”
델라에게 맞서 시간을 벌고 샤론을 대피시킨다.
그 뒷일은 나중에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그 투기가 델라에게도 전해졌는지 그녀의 주위에 붉은 마력의 선이 휘감기기 시작한다.
“말리진 않을게요. 당신 말대로 제머나이 백작의 체면이 있으니 목숨을 빼앗진 않을 테지만 뜨거운 맛은 보여줄 테니.”
-탁!
델라가 발을 구르자 동시에 굴다리를 비롯한 일대가 망양히 빛나기 시작한다.
낙인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허공에 마법진을 흩뿌리듯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진을 기점으로 순식간에 주변을 떠돌던 마력이 델라의 통제 아래 들어간다.
말도 안 되는 마력 지배력이자 공간 장악력이었다.
짙게 때로는 옅게, 마치 아지랑이처럼 서로 얽히고설킨 마력 뭉치가 어느샌가 자연스레 공중에 마법진을 그려내고 있다.
아직 마법이 채 발현되지도 않았음이 분명한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복사열만으로 살이 익을 것 같은 열기가 전해져왔다.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농담도 못 된다.
자율방어조차 구축되지 않은 시우는 저 정도 규모의 열기를 막아낼 방법이 없다.
완전히 발동된다면 죽는다.
“.........”
그러나 시우는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이상하게 전투에 들어가면 그런 자잘한 감정들은 후순위로 밀린다.
더군다나 지금의 시우는 예전과는 달랐다.
아멜리아의 저택에서 에아와 싸울 때나, 라티푼디움에서 호문쿨루스와 싸울 때는 마법이 작용하는 방식을 보고 마법의 형태를 역산해 내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지금, 시우의 좌안은 선명하게 델라의 마법식을 눈에 담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다’라는 어드벤티지는 마법 전투에 있어서 압도적인 메리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녀의 마법식은 화로자리를 닮았다.
힘을 빼고 싸우겠다는 말은 진실인 듯 세 개의 선이 각도가 넓은 V자로 이어져 있는 단순한 마법식.
형태와 각도, 그리고 주위의 환경으로 미루어 봤을 때 마력으로 피워올린 불꽃을 3번에 걸쳐 축차로 분사하는 일종의 산탄총이었다.
그 자체로는 별다른 위력이 없을지 몰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숫자이다.
언뜻 보기에도 수십 개가 넘는 마법진이 델라의 주변을 호위하듯이 분기해있다.
“타올라라.”
-위이이이잉!
델라의 영창과 함께 주위의 마력을 흡수하며 과열된 엔진 같은 소음을 내는 마법진.
시우가 방어에 몰빵을 한다 해도 저 정도 규모의 공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낼 수는 없다.
따라서 시우가 선택한 것은 마법진이 발동하기 전에 미리 디스펠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피어라!”
“뭐?”
시우의 등허리에 뻗어있던 검은 리본이 종횡무진 마법진 사이를 누비기 시작한다.
완벽하게 발동되기 직전이야말로 마법은 가장 취약하다.
따라서 시우는 왼눈으로 보이는 마법진의 ‘핵심’을 리본으로 꿰뚫어 보이는대로 격파했다.
델라가 놀랄 틈도 없이 허공을 기는 뱀처럼 절반에 달하는 마법진을 격파하는 리본.
애초에 ‘그림자의 입자’ 자체가 마법식에 달라붙어 불능을 유도하는 만큼, 단순히 마력의 바늘을 만들어 마법의 흐름을 방해하는 디스펠 핀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위이이이잉!!!!
하지만 모든 마법진을 적기에 해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개수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절반가량의 마법진을 디스펠하는 한편 앞으로는 그림자의 방패를 치켜들어 심장과 머리를 보호했다.
-콰광! 쾅! 콰광!
얼굴을 감싸기 전 시우가 힐끗 본 것은 샷건이 쏘아지는 것처럼, 혹은 눈앞에서 불꽃놀이가 터진 것처럼 시야를 가득 채우며 덮쳐드는 형형색색의 불길이었다.
폭풍에 섞여부는 우박마냥 전신에 작열하는 마력의 불꽃이 그림자 갑옷과 방패에 닿을 때마다 찬연히 흩어져간다.
-투둑! 투두두둑!
“크윽!”
하지만 그림자의 방패가 모든 마법적 작용에 면역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발현되어 수백 도가 넘는 온도를 지닌 불똥들은 갑옷을 스쳐 가면서도 여지없이 시우의 살을 그을렸다.
뜨겁다.
이대로 갑옷이 뜨겁게 달아올라 놋쇠 황소에 들어간 사형수처럼 통구이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잠식했다.
“놀라운 분이네요.”
1시간 같던 10초가 끝나고 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하면 남을 칭찬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진심 어린 경탄이 섞인 음색이었다.
“나의 중계기를 즉석에서 간파하고 디스펠하다니... 정체가 뭐죠? 제머나이 가문에서 만든 비밀 마법 병기 같은 건가요?”
델라의 특기는 ‘공간장악’을 바탕으로 한 불의 원소 마법.
대부분의 마녀가 순전히 체내의 마력을 활용해 신체 내부에서 마법을 펼치는 것과는 다르게, 델라는 마법진을 ‘중계기’처럼 활용해 외부의 마력으로 마법을 펼친다.
중계를 거치는 만큼 정밀함은 다소 떨어지나 마력 효율이 극도로 올라가 한번 공간을 장악하고 나면 몇 차례나 대규모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보다 어떻게 한 거죠? 분명히 감추어 두었을 텐데.”
델라의 마법의 기조가 되는 것이 중계식인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중계식을 은폐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계기를 설치할 때 한 획을 통째로 은폐에 활용한다.
그 주변에 식별을 방해하는 아지랑이를 흩뿌려 간섭을 막고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보란 듯이 그 위장을 간파하고 디스펠을 시도, 성공했다.
유달리 감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감지에 특화된 자성마법을 지닌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까짓 중계기 몇백 개는 더 만들어 놓을 수 있다.
델라는 다시 발을 굴러 주변에 수십 개의 중계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후웁....”
시우는 숨을 골랐다.
갑옷은 원래의 온도를 되찾았지만 땀에 흠뻑 젖은 몸까지 뽀송하게 말려주지는 않았다.
그 탓에 온몸이 땀에 절어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덥다.
그러나 어느 정도 승산이 보인다.
조금 전의 격돌로 관찰한바 델라의 마법이 발동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허공에 마법진을 미리 설치해 둠.
2)낙인의 마력을 마법진으로 보냄.
3)설치된 마법진이 외부의 마력을 움직임.
4)마법이 발현.
순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투에 임했을 때 그의 본능은 언제나 정답에 가까운 답을 주었다.
이번에도 직감이 외치고 있다.
델라에겐 없고 시우에게 있는 것.
그 장점을 극대화해야 한다.
갑옷의 근력 강화를 이용해 거리를 주지 않고 육탄전을 이어가자.
그와 동시에 리본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마법진을 디스펠 하는 것이다.
“후웁!”
시우는 숨을 들이쉬었고.
한계까지 강화된 각력은 물렁물렁하게 변한 아스팔트를 두부처럼 짓뭉갠다.
그 모든 힘을 온전히 도약으로 승화시킨 시우는 방패를 앞에 세운 채 델라를 향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