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1.
시우는 단잠에서 깨어났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한다고 영체가 되었어도 수면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지만 샤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샤론?”
언제나 시우보다 일찍 일어나던 샤론이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시간쯤에는 소파에 앉아 배달 앱을 뒤적이며 아침 메뉴를 고르고 있어야 할 텐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혹시나 싶어 방에 노크까지 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뭐야? 어디 갔어?”
휴대폰도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고 간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잠깐 밖에 나선 모양이다.
시우는 욕실로 들어가 대충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뭔가 커플 같네.”
소파에 앉아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새삼스러운 심정에 사로잡혔다.
잠에서 깨서 당연하다는 듯이 동거녀를 찾게 되다니.
게다가 그 동거인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혼혈녀라니.
이 무슨 한참 사춘기인 남고생의 망상인가 싶었다.
뭐, 동거라고는 해도 연인관계이기는커녕 야릇한 에피소드 하나 없지만 말이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많이 있네?”
잘 생각해보면 있긴 하다.
자기 직전만 되면(또 기상 직후에) 노브라로 실내를 활보하는 샤론의 무방비함 탓에 시선을 둘 곳이 곤란하다던가.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 1층 코인 세탁소에서 건조기를 돌릴 때 샤론의 속옷을 발견해 괜히 뻘쭘했다던가 (참고로 시우는 그날 샤론의 가슴 사이즈가 E컵이라는 것을 알았다).
샤워나 목욕을 하는 샤론의 콧노래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오 괜스레 민망스럽다던가.
더 떠올려보면 이 이외에도 몇몇 사건이 있다.
그런데도 시우가 그것을 ‘야릇한 에피소드’로 분류하지 않은 것은 일련의 사건이‘샤론이 딱히 시우를 남성으로 인식하지 않음’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의미부여 하는 것도 우습고...”
아무튼 물 한 잔을 마시고 일어나자마자 모처럼 방을 깨끗이 정리했다.
참고로 정리라는 것은 훈련의 일환이다.
어째서인지 시우의 낙인 안에 섞여 있는 에아 사달멜리크의 리본, 처녀의 베틀.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다.
오르골의 은폐 효과를 최대로 올려놓고 등허리에서 뻗은 네 가닥의 리본을 나풀거리며 방을 정리하는 시우.
손처럼 활용할 수 있는 리본 네 가닥이 추가되었으니 두 사람이 돕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청소는 더디기 짝이 없었다.
한 가닥의 리본을 다루는 것은 제3의 팔이 생긴 것처럼 어렵지 않지만 숫자가 두 개 이상이 되면 저글링을 할 때 팔이 꼬이는 것처럼 리본이 꼬이기 시작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수십 가닥의 리본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에아가 얼마나 무서운 상대였는지 일깨워주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청소를 끝내 슬슬 마법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음에도 샤론은 돌아오지 않았다.
“위치포인트라도 갔나?”
성실한 만큼 언제나 칼같이 수업 시작 시각을 지켜왔던 샤론이다.
아마 늦지는 않은텐데... 30분 안에는 돌아오겠지 뭐.
그렇다면 그동안 놀기도 그렇고 샤론을 위해 버블티라도 사다 줄까 싶었다.
샤론은 요즘 버블티에 푹 빠져 있었으니 말이다.
“산책도 할 겸 다녀올까?”
샤론이 슬렁슬렁 요령을 부려가며 가르칠 사람은 아니지만 또 혹시 모르지 조공을 바치면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으려던 마법 특강을 해줄지도.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털레털레 밖으로 나왔다.
사실 시우는 버블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헨나에서 흉기로 써도 좋을 딱딱한 빵과 허여멀건 스프로 끼니를 때우며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어지간한 음식은 감읍하며 먹을 수 있는 경이로운 미각개조를 당했으나 버블티는 식감에서 아웃이다.
개구리 알 같은 물컹한 감촉이라니.
정작 개구리라면 질색할 여대생들이 왜 저걸 좋다고 마셔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튼 핸드폰을 뒤적여 이 근방에 버블티로 유명하다는 카페까지 꽤 먼 걸음을 했다.
컵 홀더에 버블티 하나를 꽂아놓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쭉 빨며 길을 걷는다.
“덥네....”
그냥 배달로 시킬 걸 그랬나 싶다.
이 거리라면 걸어가다 얼음이 죄다 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쿠웅!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인도를 걷던 시우는 별안간의 파동을 느꼈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가 풀어지는 것 같은 커다란 떨림의 정체를 곧장 깨닫는다.
바로 마력의 파동이다.
허나 어중간한 파동이 아니었다.
두꺼운 솜에 쌓여있는 듯이, 파형 자체는 크지 않지만 은은하게 몸을 떨게 하는 깊은 진동.
무엇인가 일어났다.
“또 뭔데?”
어째 걸어 다니기만 해도 트러블이 몰려드는 기분이다.
시우는 재빨리 안대를 올렸다.
마력의 흐름을 읽는 금빛의 눈동자로 주변을 훑었다.
만약 이 정도의 떨림이 느껴질 정도의 충격이 현세에서 일어났더라면 주위가 이렇게 잠잠할 리 없다.
적어도 폭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어딘가에서는 소란이 일어났겠지.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안색이 굳은 시우와 달리 행인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 이 마력의 파동은 이면결계를 뚫고 나온 것이라는 게 유력하다.
아무리 이면결계가 또 다른 세상을 복사해 붙여넣는 구조라지만 결국엔 수면 위에 놓인 나뭇잎과 그 허상처럼 맞닿아있는 공간이니 말이다.
주위를 둘러본 지 1분도 되지 않아 미묘하게 마력의 흐름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기찻길 아래로 차와 사람이 오갈 수 있도록 만든 오래된 굴다리 아래이다.
“젠장.”
시우는 고민했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건 사건이 일어났음은 자명하고 시우는 가능한 예기치 못한 사고는 피하고 싶다.
또한 가장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어야 할 샤론의 행방은 묘연하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도망치는 것이 옳았다.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샤론과 함께 나오면 나왔지 구태여 사건의 소용돌이에 발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우가 굴다리로 향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 갑자기 사라진 샤론과 그 근처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타이밍이 꽤 맞아떨어진다.
즉, 저기에 샤론이 있을 확률이 매우 매우 높다고 생각 중이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존나게 일어나냐....”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대학가 점집에서 사주라도 봐볼까 진지하게 고민이 들었다.
시우는 품에서 오르골을 꺼내 들었다.
잠깐 찍먹만 하고 나오자.
행여 샤론이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위험일 것 같으면 곧장 도망치자.
“피어라.”
시우는 영창을 외움과 동시에 가드레일을 박찼다
그리고 이면 결계 내부에 들어섰을 때 시우가 본 것은 전화에 휩싸인 듯 온통 새빨갛게 불타는 세상과 검게 변한 하늘이었다.
2.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시우는 투구 틈새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높다란 건물들이 죄다 불타오르고 있다.
만약 이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더라면 수십 년 만에 대화재라는 문구로 신문 일면에 대서특필 될 것 같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파괴의 중심지는 말할 것도 없이 굴다리였다.
굴다리 아래서 화산이라도 폭발했는지 위가 뻥 뚫려있고 마치 용광로라도 되는 양 붉은 빛과 고온의 열기를 뿜어댄다.
“콜록! 콜록! 이런 미친....”
별 생각 없이 그 열기를 들이마셨던 시우는 거세게 기침했다.
사우나에 들어섰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고열의 열풍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족히 100M는 떨어져 있는데도 이런 열기라니.
이대로 앞으로 나아갔다간 뭐가 문제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타죽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방으로 혀를 날름거리던 불길이 고이 잠들었다.
뜨거운 열기 역시 어디론가 날려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잠잠하다.
그제야 시우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발생할 전투에 대비해 온몸을 갑옷으로 감쌌다.
신체 강화와 최소한의 방어 수단을 마련한 채 오르골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 기척을 죽였다.
녹아내린 채 아직 굳지 않는 아스팔트가 발밑에 쩍쩍 달라붙는다.
달아오른 지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탓에 굴다리 아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20M까지 접근했을 때 발견했다.
붉게 치장한 한 마녀가 샤론을 억지로 들춰 매고 있음을.
마녀를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
정황상 저 마녀는 샤론을 쓰러뜨렸다.
그렇다면 추방자를 넘어서 공적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시우보다 높은 위계의 샤론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마 시우가 감당할 수 없는 강적임을 의미한다.
“피어라!”
그러나 시우는 일말의 고민도, 망설임도 없었다.
샤론이 쓰러져있다.
간신히 작동 중인 자율방어를 보아하니 목숨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납치당하기 일보 직전이다.
시우는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것저것 조건을 잴 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건을 따지는 건 어떤 식으로 샤론을 구출하겠는가로 충분하다.
그림자의 창을 던지는 것은 샤론이 휘말릴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직접 달려가 붉은 마녀를 떨쳐내는 것은 샤론이 인질로 잡힐 위험이 있다.
오르골이 작동하고 있어 초격에 한해 기습을 시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연하게, 상황에 맞춰 적’만’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은?
처녀의 베틀에 그림자의 입자를 섞어 짜낸 리본.
순식간에 늘어난 리본이 붉은 마녀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마녀를 샤론의 반대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고작 가느다란 리본을 손목에 묶어 휘두른 것뿐이지만 그 결과는 시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콰아아아아앙!!!!
그 몸이 허공을 날아 흉흉한 기색으로 처박히자마자 작열하는 화염에 의해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벽면에서 불똥이 우수수 떨어졌다.
좁디좁은 굴다리 내부에서 몇 번이나 메아리를 일으킨 충돌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뭐야....”
이렇게 강하다고?
특별히 시우가 커다란 마력을 주입한 것도 아니었다.
느낌으로 따지자면 적당히 팔을 휘두른 느낌.
그런데 그 정도의 힘만으로 흡사 중장비에 말려들기라도 한 듯, 마녀의 몸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괜찮아?”
시우는 곧장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샤론에게 달려가 호흡을 확인했다.
색색거리며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샤론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시우를 쫓는다.
“도망...쳐....”
“도망은 무슨 도망... 이리 와.”
더는 자세한 상황은 묻지 않고 곧장 좌표이동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공간이동이라는 마법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원하는 곳까지 도망치려면 적어도 10초 이상은 넉넉하게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러니 저 마녀가 벽에 처박혀 재정비할 때까지가 전투를 회피하고 튈 수 있는 유일한 골든타임이다.
-화르륵!
하지만 그런 시우의 바람은 좌표이동식이 새겨지던 노면에서 솟구친 불길에 의해 무산되었다.
“건방지네요, 건방져.”
굴다리의 반대편에서 느긋하게 걸어오기 시작한 붉은 마녀.
그렇게 커다란 소리를 냈는데도 그녀의 몸에는 생체가 하나 없었다.
아니 생체기는 커녕 옷이 구겨지거나 한 부분도 없다.
자율방어.
심상과 마법이 합일되는 15 위계의 경지를 지나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자동방어 시스템.
만전의 경우 전함의 주포도 막아내는 자율방어가 고작 벽에 내팽개쳐진 정도로 무너질 리 없다는 것을 시우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법이건만.”
붉은 마녀는 붉디붉은 눈으로 시우를 내려보았다.
이거 참.
익숙한 상황이다.
쌍둥이를 위해 에아 사달멜리크와 맞설 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부디 그때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도하며 시우는 마력을 증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