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1.
딱히 손님이 올 일이 없는 거실은 꽤 너저분했다.
청소기는 부지런히 돌리기에 대놓고 더럽다기보다는 여기저기 자질구레한 물건이 퇴적되어있는 정도.
얼추 정리한 시우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캔 맥주를 홀짝였다.
-쏴아아아아!
“흐음....”
조용해서 그런지 샤론이 몸을 씻는 소리가 다 들린다.
기분이 야리꾸리하다.
딱히 흑심을 품고 그녀를 안으로 들인 것도 아니지만 남자로서 이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고 작은 떨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달칵!
현관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샤론이 슬그머니 나왔다.
혹시 옷을 제대로 걸치고 나오지 않았을까 봐 시선 처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곧장 거실로 향하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저기, 고마워.”
“에이, 별거 아니야.”
마녀의 기본 소양 중 하나는 마법으로 샤워 이후 머리카락을 뽀송뽀송하게 만드는 것이다.
애초에 마녀라는 존재 자체가 여성이기도 하고 신체의 첨단까지 마력을 제어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훈련법이기에 견습마녀들에게도 권장되는 훈련법 중 하나이다.
그 덕에 샤론의 머리카락은 언제 샤워를 했냐는 듯 잘 마른 채였다.
그러나 잘 익은 복숭아처럼 은은하게 상기된 뺨이나 목의 피부까지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양 뺨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며 감사 인사를 표하는 샤론은 시우의 옆자리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앉아도 돼?”
“편히 앉아. 맥주도 하나 마실래?”
“좋아.”
샤론은 노곤한 듯이 풀썩 시우의 옆에 앉았다.
그 겨를에 나풀거린 머리카락에서 시우와 같은 샴푸냄새가 훅 풍기고 그 뒤로 고유의 체취가 코를 간질인다.
“샤워하고 마시는 맥주라... 오랜만이네 이것도.”
샤론은 시우가 미리 꺼내놓은 맥주에 살짝 마법을 걸어 더욱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벌컥벌컥 마신다.
“크으...! 좋아!”
그런데 이거 너무 가깝지 않나?
거실의 소파는 4인용.
게다가 발을 편히 뻗고 TV를 볼 수 있도록 발 받침대까지 있는 고급 모델이다.
그런데 샤론은 굳이 시우의 바로 옆에, 그것도 조금만 움직여도 팔꿈치가 닿을 거리에 앉았다.
이것에 의미를 부여해도 되는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옷은 그대로 입으려고?”
“아, 갈아입고 올게! 잠옷은 챙겨왔거든.”
샤론은 끙차 일어나려다가 몸의 근육이 녹아내린 것처럼 풀썩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다.
“와... 개움직이기 싫어.”
그간의 근심을 뜨거운 물과 함께 씻어 보냈는지 헛웃음을 짓는 샤론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났다.
이건 과장이 아닌데, 마녀인 데다가 미인에 속하는 샤론은 아멜리아처럼 오래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시우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정면을 바라보던 샤론이 힐끗 눈동자만 움직여 시우를 바라본다.
“왜?”
이게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리는지 모르겠다.
풋풋한 썸의 향기라고 하는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과민반응인지...
“아, 아니. 야식 시킬 건데 뭐 먹고 싶어?”
“야식?”
벌떡 몸을 돌린 샤론이 시우를 바라본다.
매번 사주는 데도 사줄 때마다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샤론.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말려야 했다.
“어, 저번에 뭐 먹고 싶다고 했더라?”
“나... 나는 너가 먹고 싶은 거면 좋아.”
반색했던 샤론이지만 여전히 시우에게 받기만 하는 것은 껄끄러운 모양이다.
그래도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시우가 원하는 메뉴를 고르자고 하는 것이 참 샤론답다.
“대충 종류를 꼽아주면 내가 아는 맛집에서 시킬게. 한식, 일식, 양식, 중식. 골라봐.”
샤론은 4가지의 제안을 듣자마자 신중한 표정으로 눈썹을 모으며 고민에 잠겼다.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결정하듯이 손가락을 꼽아가던 샤론이 제시한 것은...
“그...그럼 중식?”
“중식? 마라탕은 어때?”
“마라탕?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
“그럼 이걸로 하자.”
요즘 여대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인지 곳곳에 번화가 마라탕 가게가 넘쳐난다.
지금껏 관찰한 결과 샤론의 입맛도 은근히 현지화가 잘되어 있어서 아마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추가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꿔바로우까지 넉넉하게 시킨 시우.
샤론은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맛일까? 매워? 맵다고 들었는데.”
“제일 순한 맛으로 시켰어.”
“한국은 맛있는 게 너무 많아. 네 덕분에 알게 된 것 같아. 고마워.”
“야야, 고맙다는 말 좀 그만해. 낯간지럽게.”
“고맙다는 걸 고맙다고 하지 그럼 어떡해?”
샤론은 무척 잘 웃는 녀석이었다.
지금 이 짧은 대화 사이에도 세 번이나 웃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
으레 있지 않은가?
대화 중에 살짝 타이밍이 어긋나서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멎어버리는 그 순간 말이다.
하지만 어색한 것은 시우뿐이었나보다 샤론은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캐리어만 방에 들여놓고 옷도 갈아입을게.”
“벌써? 힘들다면서. 먹고 해.”
“아냐, 맥주 먹었더니 힘이 나네.”
작게 알통을 만들어 보인 샤론은 살랑살랑거리며 방으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갔다.
2.
샤론이 방에 들어가 부스럭거리던 사이 시우는 배달온 마라탕을 식탁에 펼쳐 놓았다.
이것저것 재료 추가를 많이 해서 용기가 흘러넘칠 것 같았기에 커다란 볼에 올려 담은 순간.
샤론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
샤론의 옷차림을 본 시우는 우뚝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훤히 드러난 맨살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샤론의 퍼스널 칼라가 있다면 민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밝은 청록색이 잘 어울린다.
할로윈 파티에서 컬러렌즈라도 끼운 것처럼 신비롭게 빛나는 눈동자도 그렇고, 진녹색 머리카락에 부분부분 섞여 있는 색도 그렇고.
전혀 작위적인 느낌 없이 잘 들어맞는다.
그런 그녀가 민트색 돌핀 팬츠를 입고 왔다.
게다가 위에는 흰 나시티이다.
훤하게 드러난 길쭉한 다리며, 상체에 찰싹 달라붙는 요가복 같은 티며, 당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특히 헐렁한 박스티 아래서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어필하던 가슴이 다가올 때마다 은은하게 출렁이는 까닭에 몹시 당혹스럽다.
저런 옷차림을 뭐라고 해야 하나.
여친 동거룩?
“왜? 뭐가 안 왔어?”
그런 시우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영수증을 뒤적이는 샤론.
그제야 시우는 알아차렸다.
눈치가 보여 잠옷으로도 갈아입지 못하는 시우와 다르게 샤론이 이렇게 편하게 행동할 수 있는 원인을 말이다.
시우를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우를 남자로 생각하지조차 않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실내복이라지만 저런 차림으로 앞에서 돌아다니겠는가?
“아냐, 먹자.”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흑심은 없다 단언해 놓고도 막상 샤론의 행동을 보자 조금 씁쓸하다.
그리고 시우의 의혹은 맞은 편에 앉은 샤론에 의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테이블에 바짝 당겨 앉은 탓에 유독 도드라지는 그녀의 가슴.
흰 옷감 사이로 은은한 두 개의 돌기가 드러나 있다.
즉, 노브라라는 소리였다.
“콜록 콜록! 어우... 고추 기름이 무슨...”
시우가 입을 벌리며 황망해 하건 말건 마라탕 냄새를 맡고 재채기를 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샤론.
서구권에서는 노브라가 당연하다지만 시우의 성 의식은 아직 그 정도로 선진적이지 않았다.
근데 이걸 뭐라고 말해.
너의 젖꼭지가 옷 위로도 내 시선을 자극하니 브래지어를 입어줄래? 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걍 본인이 알아차릴 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야지.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저러는 것일 수도 있겠다.
3.
샤론은 처음 먹어본 마라탕이 만족스러웠는지 열심히 8인분에 달하는 양을 먹어치웠다.
물론 그녀가 음식을 집어갈 때마다 유혹적으로 출렁이며 시우의 시선을 사로잡으려 드는 한 쌍의 봉우리, 가슴으로부터 시선을 떼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시우에게는 고역과 고뇌의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배부르게 먹은 두 사람은 시우의 제안으로 나란히 소파에 드러누워 영화를 시청하기로 했다.
준비물.
거실에 암막 커튼을 치고 불을 끈다.
전자레인지에서 막 튀긴 팝콘과 맥주를 쥐고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댄다.
146인치 TV와 빵빵한 서라운드 스피커로 영화를 감상한다면 정말 영화관 부럽지 않은 시청이 가능하다.
“나 영화 처음 봐.”
이번에도 유독 시우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은 샤론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때마다 향수를 뿌린 종이를 펄럭이는 것처럼 향긋한 향기가 전해져왔다.
이젠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기보다 안쓰러움이 먼저 떠오른다.
“너 정말 돈만 벌면서 살았구나?”
“빨리빨리 호문쿨루스를 잡아야 유산을 팔아 떼돈 벌 방법도 생기지.”
“보통 유산은 얼마 정도나 하는데?”
“위치포인트를 통해서 경매에 부치는데 그렇게 되면 제1 입찰권은 게헨나의 마녀들에게 가.
그쪽 마녀가 더 돈을 더 쳐주기도 하고. 그러면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음... 그냥 연구 문서라면 1000만 원에서 10억, 아티펙트라면 두 세배 정도 더 받고, 그노시스의 알이라면 종류에 따라 훠어얼씬 더 받지.”
샤론이 편의점 알바에 목을 매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있어 주된 수익은 알바비가 아니라 호문쿨루스 사냥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문서 쪼가리밖에 못 얻었지만 혹시 알아? 그노시스의 알을 얻으면 한 번에 빚을 탕감할지?”
말을 하면서도 그다지 자신이 없는 말투였다.
새삼 쌍둥이가 넘겨주었던 그림자의 법칙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된 시우였다.
아무튼 오늘 시우의 선택은 노트북.
남자가 여자친구 때문에 보다 울게 되는 영화 1위였다.
아내를 정말로 사랑했던 주인공이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린 아내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자신들의 길고 험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줄거리였다.
하지만 시우로선 영화의 내용보다 샤론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 더 재밌었다.
뭐든 첫 경험이 흥미롭다고 리액션이 풍요롭다고 해야 하나?
“저게 설레는 거야? 저 여자 왜 저러는 거야?”
“둘이 사랑에 빠진 거야? 근데 왜?”
“에고... 저걸 어째...”
“아니, 하아.... 그래도 저건 떠나면 안 됐지!”
“진짜 개답답하네! 약혼까지 했으면서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주인공 좀 냅둬 나쁜 년아!”
중반부까지 답답해하며 팝콘을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막장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들처럼 열을 내던 샤론.
그러나 영화가 클라이막스에 도달할수록 팝콘으로 향하던 그녀의 손이 멎는다.
뚫어질 듯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양 영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시울은 유독 붉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동시에 임종을 맞이한 주인공을 끝으로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끝이 났다.
“.........”
“커흠.”
시우는 리모컨을 조작해 불을 켰다.
그런데도 샤론은 여전히 영화의 여운에 잠긴 듯이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까 손에 쥔 저 팝콘.
한 30분 정도 전부터 저러고 있던 것 같은데.
마치 저 상태로 조각상이라도 된 것 같다.
괜히 울고 있는 샤론을 보자 시우는 조금 후회했다.
그냥 적당한 할리우드 영화나 액션 영화를 고를 걸 그랬나?
여자니까 로맨스 좋아하겠지? 라며 선택한 영화 탓에 괜히 더 울적해 진 건 아닐지 모르겠다.
“쓰읍.”
샤론은 손에 한참이나 들고 있던 팝콘을 마저 입으로 옮기고는 팔목으로 눈물을 훔쳤다.
“너무... 재밌는데, 너무 슬프다... 두 시간만에 이런 감정을 만들 수 있다니... 인간은 정말 대단하구나.”
멍하니 감탄사를 흘리는 샤론.
“괜히 이거 보자 했나? 다음부턴 재미있는 영화로 보자.”
“응? 아냐아냐, 나 완전 재밌게 봤고 감동적이었어. 다음에도 또 보고 싶어. 근데 오늘 딱 한편 더 보면 안 될까? 나 로맨스 영화 좋아하는 것 같아.”
“음... 그러면...”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새는 줄 모른다고.
그날 샤론과 시우는 동이 틀 때까지 총 세 편의 로맨스 영화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