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1.
달콤했던 현세로의 복귀도 잠시.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며, 변함없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빨리 권태에 물드는지 확인했다.
바뀌는 거라고는 메뉴 정도밖에 없는 지루한 생활.
그러던 중 샤론을 만나게 된 시우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요즘이라고 해봤자 최근 며칠이지만 이 지루한 생활을 목적과 방향성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도 없는, 퍽퍽한 닭가슴살 같은 풍요 속의 단조로움도 이제는 안녕이다.
“슬슬 나가면 되려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빈둥거리며 읽다 보니 금세 샤론의 알바가 끝날 시간이 되었다.
저번에 호문쿨루스 세 마리와 마주한 이후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전단지를 붙이며 호문쿨루스 수색에 나섰다.
“그날 이후로 한 마리도 못 봤네.”
하긴 호문쿨루스가 그렇게 많았더라면 샤론도 이보다 빚을 많이 갚았겠지.
그만큼 호문쿨루스에 의해 죽어가는 무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해도 작심한지 일주일만에 아무런 이벤트가 없자 조금 싱거운 느낌은 들었다.
시우는 겉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샤론처럼 착한 애가 빛을 많이 봐야 하는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저번처럼 실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맛집 탐방이라는 핑계를 들어 타협을 봤다.
본인이 먹는 걸 엄청 좋아하기도 하고 말이다.
약속 장소는 언제나 샤론이 교대하는 0시 정각 시우의 집 앞에서였다.
어쩐지 공기 중에 습기가 많다 싶더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기서 뭐 해?”
시우는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계단에 샤론이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하긴, 너 기다리고 있었지.”
피곤한 듯이 무릎 사이에 턱을 괴고 있던 샤론은 시우가 말을 걸자 일어서서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영체는 일반적인 신체에 비해 굉장히 튼튼해서 어지간하면 피로가 잘 쌓이지 않는데.
샤론은 언제나 굉장히 피곤해 보인다.
특히 요즘은 더.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전단지 붙이기는 무리겠는걸?”
“그러게.... 하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비가 오면 전단지 돌리기는 무리다.
샤론은 그것이 못내 아쉬운 듯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며 털레털레 시우에게 다가왔다.
“뭐야, 울었어?”
“아, 아니!”
어두컴컴한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온 샤론의 얼굴을 본 시우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둬 뭔가 굉장히 힘들고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야생화처럼 싱싱한 활기를 뿜던 샤론의 진녹색 머리카락마저 누런 잡초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날씨도 이 모양이라....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쉴게.”
샤론은 손을 설레설레 저으면서 힘없이 웃었다.
둔감한 시우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일을 감추려는 애절한 미소였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 맞아?”
그녀를 만나지 오래된 건 아니다.
그러나 샤론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시우는 곧장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샤론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이다.
말 못할 곤경에 처해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
샤론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색상의 눈동자가 밑으로 점점 물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 어...어...”
글썽거리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흐른다.
샤론은 당황했는지 눈물을 주섬주섬 닦았다.
“아, 뭐지... 이상하네... 슬픈 일도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눈물을 닦아봐도 둑이 터진 것처럼 점점 많은 눈물이 흐를 뿐이었다.
샤론은 목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욱....아... 잠만, 이거... 왜 이래....”
집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
시우와 전단지 붙이기가 끝나면 야식을 얻어먹고 밤새 공원을 걸어 다니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호문쿨루스도 수색할 겸 말이다.
집세가 굳는 것이라고도 생각해보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났으니 좋은 일도 일어날 것이라는 긍정적인 자기최면을 걸었다.
그때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다.
머리에 기름종이가 덮인 것처럼 조금 먹먹하고 흐릿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일상생활에는 커다란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뜨거운 것을 삼킨 것처럼 목이 메왔다.
“흑...흐윽...흑...”
10년만이었다.
누군가의 비아냥이나 비웃음이 아닌 걱정의 말을 들은 것은.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시우의 품으로 달려드는 샤론.
습기 찬 여름 공기 사이로 훅하고 번지는 달콤한 체취와 남자의 것과는 완연히 다른 부드러운 신체.
가슴팍에 폭 안겨 그를 끌어안는다.
외모는 앳된 기색이 가득해도 평소에는 누나 같이 느껴졌던 샤론이 이렇게나 작았구나 싶었다.
“흐아아아앙....으아아앙.....”
어린애처럼 마구 눈물을 흘리며 목놓아 우는 샤론을 시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위아래로 마구 들썩이며 시우에게 파고들려는 샤론을 보자 시우도 괜히 울컥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준다.
도대체 뭔일이래.
2.
“히끅....! 미안... 갑자기... 히끅! 놀랐지? 히끅!”
샤론과 시우는 나란히 계단에 앉았다.
샤론의 손에는 시우가 그녀가 근무하는 편의점에서 사다준 바나나우유가 들려있었다.
바나나우유를 소중하게 꼭 쥐고 코끝이 빨개진 상태로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샤론.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해.”
“응... 고마워 히끅!”
어찌나 서럽게 울어댔는지 아직까지 덜덜 떨리는 분홍빛 입술로 쪽쪽 바나나우유를 빨아 먹은 샤론은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잠시 고민하던 샤론.
“.....응, 말해줄게.”
그러나 울상이 가시지 않은 샤론은 이내 최대한 차분하게 요 일주일간 있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중간중간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울음을 참는 통에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존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노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걸 왜 이야기를 안 했어?”
시우는 자신의 목소리에 엄한 질책이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그럴 자격이 있나? 싶긴 하지만 조금 섭섭하고 또 화났다.
만난 기간은 얼마 안 됐지만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중대한 일이 있었더라면 말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짐이 되기 싫어서... 이 일은 내가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어.”
“그래도....”
이야기를 했어야지.
라고 말하려던 시우는 뒷말을 삼켰다.
여기서 혼을 내봐야 무엇하겠는가?
사실 고독한 생활을 계속했던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괜히 저번처럼 일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마워. 한번 울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네.”
코를 쓱 훔친 샤론은 전처럼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안 되겠다.
저런 걸 보고 어떻게 아무것도 안하고 ‘네가 불편해할지 모르겠지만 간섭 안 할 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 내 집에서 임시로 묵는 건 어때?”
“뭐? 아냐! 아냐 아냐. 그러려고 이런 거 아니야!”
샤론은 고개를 퍼득 들고 절레절레 저었다.
대뜸 찾아와 신세 한탄을 하고 품에 안겨 울었던 것이 모종의 구걸처럼 비치는 게 걱정된다는 반응이었다.
워낙에 샤론은 뭐든 혼자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으니 말이다.
“나도 너가 그렇게 계산적인 성격 아니라는 거 알아. 근데 지금은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 거 아니야?”
“...그래도....”
“어차피 투룸이라 침실도 두 개거든.”
사실 여사친에게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동거하자고 하는 제안 자체가 평소 시우였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제안이다.
그러나 만약 집을 새로 준다고 하거나 원룸을 구해준다고 하면 샤론이 극구 거부할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중간책이었다.
“대신 네가 내 공부를 조금 도와주는 거지. 저번에도 알려주겠다고는 했지만 정작 시간이 없어서 한 번도 못했잖아. 네가 전에 말했던 대로 윈윈이니까 괜찮지 않아?”
“....정말 그래도 괜찮아?”
고개를 들고 시우를 올려다보는 샤론.
배고픈 강아지가 손에 들린 소시지를 보는 것 같다.
어찌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어두컴컴한 계단이 환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그럼! 부담 안 가져도 돼.”
“그, 그래... 그래도 되나? 아니야 역시 아니야...”
“나는 다른 마녀나 호문쿨루스를 상대로 습격당할지도 모르는데 네가 보디가드까지 해준다면 정말 든든하지.”
예상대로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샤론에게 하나하나 장점을 설명하는 시우.
집세 대신 마법 연구 보조를 함으로써 돈을 더 빨리 모을 수 있다.
습격으로부터 대비할 수 있으니 시우에게도 충분한 메리트가 있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물론, 출퇴근이 빠르다.
정 신경이 쓰인다면 나중에 집세를 줘도 괜찮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매일 맛있는 밥도 사줄게. 혼자 먹기 심심했거든.”
“바... 밥?”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우왕좌왕 줄타기를 하던 샤론의 뒷덜미를 바짝 잡아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흐리멍덩해진 민트빛 눈동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샤론은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았어. 바로 짐 챙겨오면 될까?”
“응.”
“편의점에 놔뒀으니까 캐리어 가져올 게 조금만 기다려줘.”
“알았어.”
이렇게 샤론과 시우의 동거계약은 성공리에 체결되었다.
3.
“와....”
“들어와.”
샤론은 짐가방을 들고 시우의 집으로 들어왔다.
신축 오피스텔답게 깔끔한 방 구조.
고작 투룸이긴 해도 노숙-지하원룸-옥탑방 테크를 거쳤던 샤론에게는 호화 별장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좋아 보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샤론은 캐리어를 신발장에 세워놓고 쭈뼛쭈뼛 거실로 들어섰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방을 둘러보는 것에 따라 점점 펴진다.
번화가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거실에는 커다란 TV와 소파가 있다.
그렇게 잘 정돈되어있는 편이 아닌데도 샤론이 살던 옥탑방보다 훨씬 깔끔해 보인다.
시우는 샤론을 끌고 앞으로 그녀의 방이 될 곳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지내면 될 것 같아. 내 방보다는 조금 작지만 생활에는 지장 없을 거야. 오늘은 침대가 따로 없으니까 내 방 침대에서 자. 내일 바로 주문하자.”
“아, 아냐! 나 오늘은 안 잘 거야.”
“그래? 마침 나도 별로 자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서.”
샤론은 시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집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우.”
“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샤론은 시우의 손을 꼬옥 쥐면서 쓰다듬는다.
글썽이는 눈물이 그녀의 감동 수치를 나타내는 듯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하자 시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긴 뭘. 좀 쉬어 며칠 동안 밤새 걸어 다녔다며.”
“응.... 정말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꼭 갚을게! 근데 나 뜨거운 물로 샤워해도 괜찮아?”
“지금?”
“응! 너무 오랫동안 마법으로만 씻어서.”
“그래.”
시우의 허락을 받은 샤론은 호다닥 샤워실로 들어가 후다닥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아아아
“크흥.....훌쩍....”
뜨거운 물소리로 좁은 욕실 안이 시끄러워지자 마자 샤워 부스 구석에 쪼그려 앉아 훌쩍이는 샤론.
10년 만에 느껴보는 타인의 상냥함.
거기서 감동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마움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을 감정이 계속 눈물샘을 자극해서 버틸 수 없었다.
계속 앞에서 우는 것도 남사스러우니 물소리로 감추며 남몰래 눈물을 짜는 것이다.
하지만 궁상맞게 따뜻한 물을 맞으며 꺼이꺼이 우는 샤론의 얼굴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피어있었다.